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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0924 - 가해 연중 제25주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09-24 조회수750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7
09 24 () 가해 연중 제25주일 복음 묵상

Twenty-fifth Sunday in Ordinary Time

이사야서 55,6-9
필리피서 1,20-24.27
마태오복음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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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 이사야서 55,6-9

6
만나 뵐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 7 죄인은 제 길을, 불의한 사람은 제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
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9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Reading 1


Is 55:6-9

Seek the LORD while he may be found, call him while he is near.

Let the scoundrel forsake his way, and the wicked his thoughts; let him turn to the LORD for mercy; to our God, who is generous in forgiving.
For my thoughts are not your thoughts, nor are your ways my ways, says the LORD.
As high as the heavens are above the earth, so high are my ways above your ways and my thoughts above your thou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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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1,20-24.27

형제 여러분, 나는 20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21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22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3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24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27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십시오.


Reading 2


Phil 1:20c-24, 27a

Brothers and sisters:
Christ will be magnified in my body, whether by life or by death.
For to me life is Christ, and death is gain.
If I go on living in the flesh, that means fruitful labor for me.
And I do not know which I shall choose.
I am caught between the two.
I long to depart this life and be with Christ, for that is far better.
Yet that I remain in the flesh is more necessary for your benefit.


Only, conduct yourselves in a way worthy of the gospel of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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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마태오복음 20,1-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Gospel


Mt 20:1-16a

Jesus told his disciples this parable: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landowner who went out at dawn to hire laborers for his vineyard. After agreeing with them for the usual daily wage,
he sent them into his vineyard.
Going out about nine o'clock, the landowner saw others standing idle in the marketplace, and he said to them, 'You too go into my vineyard, and I will give you what is just.'
So they went off.
And he went out again around noon, and around three o'clock, and did likewise. 

Going out about five o'clock, the landowner found others standing around, and said to them, 'Why do you stand here idle all day?'
They answered, 'Because no one has hired us.'
He said to them, 'You too go into my vineyard.'
When it was evening the owner of the vineyard said to his foreman,
'Summon the laborers and give them their pay, beginning with the last and ending with the first.'
When those who had started about five o'clock came, each received the usual daily wage.
So when the first came, they thought that they would receive more, but each of them also got the usual wage. 
And on receiving it they grumbled against the landowner, saying, 'These last ones worked only one hour, and you have made them equal to us, who bore the day's burden and the heat.'
He said to one of them in reply, 'My friend, I am not cheating you. Did you not agree with me for the usual daily wage? Take what is yours and go. What if I wish to give this last one the same as you? Or am I not free to do as I wish with my own money? Are you envious because I am generous?'
Thus, the last will be first, and the first will be l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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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09 24일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셈법은 우리의 세상 셈법과 사뭇 다릅니다. 자본주의 논리에 익숙한 우리에게 ‘정당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경제 정의의 기초이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원 일꾼과 품삯의 비유에서는, 주인이 나중에 와서 적게 일한 일꾼과 먼저 와서 종일 일한 일꾼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는데 이는 우리의 경제 정의와 맞지 않습니다. 비록 포도원 주인과 일꾼이 맺은 계약으로 본다면 같은 품삯을 주는 것이 정당하지만, 먼저 일하러 온 일꾼이 더 많은 품삯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 이런 우리의 익숙한 경제 정의를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품삯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하느님의 은총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양으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차별로 느껴지는 품삯일 수 있지만, 하느님께는 같은 무게를 지닌 사랑의 표징입니다. 그 사랑을 더 받고 덜 받는 문제는 하느님의 방식이지 인간의 방식이 아닙니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받는 것이 세상의 잣대로 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고 전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가 곧 자신의 삶이고 죽음이 이득이라는 역설을 말하는 것도 세상의 논리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복음의 위대함을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는 이유는 먼저 복음을 들은 우리가 선점한 구원의 보증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마음을 세상 사람들과 나누기 위함임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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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0918일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아모스서 8,4-7
티모테오 1 2,1-8
루카복음 16,1-13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불의한 집사’는 비윤리적이면서도 영리한 사람입니다. 집사의 주인은 재산을 제멋대로 낭비한 그를 해고하지만, 그는 오히려 자신의 살길을 찾으려고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 빚을 탕감해 줍니다. 주인은 매우 너그러운 사람이어서 집사의 이 그릇된 행동을 나무라지 않고 칭찬합니다. 실직의 위기에 있는 집사가 살아남으려고 애쓴 처사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치열한 생존 방식을 알려 주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우리가 천상의 것을 추구하지만, 이 지상의 재물을 관리하는 데에도 성실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물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하지만 재물로 사귄 친구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로서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하는 한 재물을 관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섭리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게으르고 무질서하게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재물을 성실하게 관리하는 이유는 재물 자체가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성실한 삶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하면서 이 세상에서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들을 훈계하였습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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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0920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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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0921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이사야서 55,6-9
필리피서 1,20-24.27
마태오복음 20,1-16


19
세기 중반에 활동한 영국의 뛰어난 미술 평론가이자 사회 사상가인 러스킨은 연민과 도덕이 결여된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개인과 사회에 가져오는 큰 해악을 격렬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오늘 들려주시는 비유에 깊은 감명을 받고, 이 비유의 정신이야말로 효율성을 앞세워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당시의 사회를 변화시키는 열쇠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당시의 사회를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하려 한 네 편의 글을 한 권의 책으로 엮으면서 오늘 복음의 한 구절을 따와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이 책은 인도의 간디의 삶과 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또한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의 상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자주 인용되는 구절 하나를 대할 때 이를 직감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인류의 마음을 지배해 온 갖가지 망상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기묘한, 어쩌면 가장 명예롭지 못한 망상은, 사회적 행동의 규범은 사회적 애정의 작용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결정되는 것이 유리하다는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이른바 경제학이라는 근대의 학문일 것이다.
러스킨은 ‘세상의 셈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셈법’을 선택하지 않으면 사회는 점점 더 비인간화로 치달으면서 인간성이 파괴된다는 사실을 예언자적 직관으로 내다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셈법은 사람을 소모품이자 이윤을 내는 도구로만 생각하는 ‘경제학’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의 오늘 비유는 예수님 시대나 러스킨 시대보다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할 말씀입니다. 지금 이 시대만큼 ‘세상의 셈법’에 젖어 있던 적도 드물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시대의 잘못된 통념에서 우리의 생각을 되돌리는 ‘회심’의 여정입니다. 오늘 복음은 일자리를 잃거나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가운데 인격적 존엄을 침해 받는 이웃의 처지를 대할 때, 경제 논리가 아니라 연민과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헤아리는 따뜻한 마음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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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0922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아모스서 8,4-7
티모테오 1 2,1-8
루카복음 16,1-13


오늘 복음은 ‘약은 집사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주인공인 집사는 비윤리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주인의 재산을 제멋대로 낭비했다가 결국에는 쫓겨날 위기에 놓였습니다. 제 마음대로 낭비한 것도 비윤리적이지만, 그러한 위기를 당하자 또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그 위기를 벗어나려고 합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이 비유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도 그 주인처럼 집사를 두둔하시는 것입니까?
먼저, 예수님께서는 이 약은 집사를 두둔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을 잘 암시해 주는 말이 곧 ‘세상의 자녀’라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을 ‘빛의 자녀’라는 표현과 대비하시며 그를 비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약은 집사 같은 비윤리적인 자에게서도 배울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십니다. 바로 그의 ‘위기관리의 능력’입니다. 약은 집사는 자신의 위기를 알아차리고서는 그 위기를 모면하고자 치열하고 치밀하게 일을 처리합니다. 이 점이 우리에게 일러 주는 바가 큽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위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수많은 위기보다도 더 큰 위기를 대면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의 생명이 영원할 것이냐 한 줌 먼지가 되느냐, 자유냐 억압이냐, 영원한 행복이냐 영원한 불행이냐?’ 하는 기로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약은 집사는 자신의 자리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위기를 깨닫고 이를 지혜롭게 대처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빚진 이들을 탕감해 주는 집사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이들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다음으로는, 주인의 재산으로 다른 이들과 은인이나 친구가 되려고 했던 집사처럼, 우리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다른 이들과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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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0923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지혜서 2,12.17-20
야고보서 3,16-4,3
마르코복음 9,30-37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겪으실 수난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은 각기 다른 기대를 하고 있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제자들에게 스승님께서는 싸움에서 이기는 승리자의 모습이어야 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그들 중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에 대해 논쟁하였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장차 당신께 닥칠 죽음을 예고하시지만 제자들은 누가 더 큰 명성과 명예를 차지할 것인지를 놓고 싸웠던 것입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인간적인 기준에 따라 살아가다 보면 명성과 명예, 그리고 사회적 성공에 매달리기 쉽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섬기는 사람은 낮은 지위의 사람이고, 섬김을 받는 사람은 높은 지위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섬김을 받는 사람은 존경과 인정을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참된 명성이란 남을 섬기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에 대하여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십니다. 어린이 하나를 당신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섬김은 어린이와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것은 높은 지위와 명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낮고 비천한 곳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며 산다고 하는 우리는 과연 어디로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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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0918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이사야서 55,6-9
필리피서 1,20-24.27
마태오복음 20,1-16


예수님의 계산법이 우리와 달라서 때때로 우리는 당황합니다. 아흔아홉 마리를 그대로 둔 채,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마태 18,12 참조), 세상 사는 이치와 전혀 다른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오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포도밭에 아침부터 와서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나, 일이 거의 끝날 무렵에 와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받습니다. 마치 평생을 착하게 산 사람이나, 평생 강도 짓을 하다가 죽기 바로 전에 십자가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고 죽은 강도가 똑같은 대접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루카 23,42 참조).
예수님의 계산법이 이렇다면, 평생 즐길 것 즐기고 제멋대로 놀다가 죽기 얼마 전에 회개하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면 어떻겠습니까? 아니면 경제적으로 어느 만큼 생활이 안정되고 시간도 여유가 있을 때, 그때부터 열심히 성당에 나가고 봉사도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일수록 끝까지 회개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한 번도 제대로 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일’은 부름 받는 순간부터 주님께 “예!” 하고 응답하며 그 길을 충실하게 사는 일을 말합니다. 일찍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억울해할 일도, 늦게 부름 받았다고 덜 억울해할 일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했다고 자랑할 것도, 반대로 짧게 했다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주님의 일은 얼마나 일을 많이 했느냐를 따지는 ‘양’()의 개념도 아니고 맡겨진 일을 얼마나 잘했느냐를 따지는 ‘질’()의 개념도 아닙니다.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에 응답하여 얼마나 변화된 삶을 사는지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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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09 19)
(
성 야누아리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아모스서 8,4-7
티모테오 1 2,1-8
루카복음 16,1-13


주님께서는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도 하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하느님을 포기하거나 뒤로하고, 재물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맙니다. 한순간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 영원한 행복을 놓치고 맙니다.
구원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지만, 우리 삶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참생명이시며 사랑이신 하느님을 섬기기보다는, 잠시 있다가 곧 없어지고 말 재물, 명예 따위를 섬기기를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경제 살리기란 이름으로, 주님께서 주신 대자연을 파괴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돈 앞에서는 부모 형제도 안중에 두지를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죽어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욕심을 부립니다.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은 곧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판가름입니다. 그러므로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기도와 선행으로써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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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09 20)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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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09 21)
(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이사야서 55,6-9
필리피서 1,20-24.27
마태오복음 20,1-16


오늘의 복음 말씀은 쉽게 수긍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밭으로 일꾼들을 데리고 옵니다. 하루 일당은 모두 ‘한 데나리온’입니다. 아침에 오는 사람이나 낮에 오는 사람이나 오후 늦게 오는 사람이나 모두 같은 일당을 약속합니다.
일이 끝나고 일당을 지불하자 아침에 와서 일한 사람이 오후 늦게 와서 잠깐 일한 사람 때문에 불평을 합니다. 자기와 똑같은 일당을 받는 것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어떻게 같은 일당을 받을 수 있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생각해도 일리 있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주인은 일당으로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습니다. 다만 늦게 온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풀어 한 데나리온을 모두 준 것에 불과합니다.
비유의 교훈은 간단합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의 판단 기준’으로 속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하느님의 일을 ‘우리 식’으로만 생각하려 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됩니다. 신앙인은 이것을 믿고 따르는 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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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09 23)
(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아모스서 8,4-7
티모테오 1 2,1-8
루카복음 16,1-13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집사는 주인의 재물을 축내다 발각됩니다. 화가 난 주인이 쫓아내려 하자 잔꾀를 부립니다.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문서를 조작하여 훗날에 대비하려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집사의 행동을 칭찬하시는 듯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평범한 집사도 장래가 불안하면 살아날 궁리를 하거늘 하물며 영생을 바라고 있는 사람들은 무얼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원은 삶의 결과입니다. 어떻게 살았는지의 판가름이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에 쏟는 노력만큼 신앙생활에도 정성을 쏟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노력하는 만큼 신앙생활도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첫 번째의 노력은 기도 생활입니다. 기도 없이 어찌 주님의 축복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의 노력은 선행입니다. 신앙생활에 선행이 없으면 그의 신심에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데 어찌 기쁨이 주어지겠습니까?

세 번째의 노력은 성사 생활입니다. 주님께서는 성사를 통하여 당신의 은총을 주십니다. 우리가 매일 할 수 있는 성사 생활은 미사 참여입니다. 비록 날마다 미사에 참여하기는 힘들더라도 자주 성사 생활을 하도록 노력합시다. 그러면 하느님의 힘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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