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전례상징’] 전례에서의 색깔 계절마다 자연은 다양한 색깔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봄에는 새싹의 연두색, 꽃이 피는 시기에는 다양한 색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자연을 만납니다. 짙은 녹색이 인상적인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면 단풍으로 대표되는 빨간색과 은행잎이 드러내는 황금빛 노란색 등이 초록색과 어우러져 감탄을 자아내며, 겨울에는 아무래도 눈이 쌓인 하얀 세상이 떠오르지요. 이러한 자연의 색깔들은 빛이 있어야 구분이 가능합니다. ‘색’과 ‘빛’은 창조주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동생인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그림에 푹 빠져 있단다. 그러니까 나는 색에 빠져드는 중이야”. 그림과 색은 뗄 수 없는 관계이고 화가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자신이 좋아하는 색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또한 언제부터인가 보이그룹이나 걸그룹이 자신들을 상징하는 색을 통해 팬들을 하나로 만드는 경향이 대세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색에 빠져있나요? 그리스도교는 오래전부터 전례에서 색을 통해서 하느님의 구원사건의 다양한 측면을 드러내려고 노력했습니다. 특히 교회는 제의에 여러 가지 색깔을 사용하여 “거행하는 신앙의 신비의 특성과 전례주년에 따라 진행하는 그리스도교 삶의 의미를 겉으로도 더욱 효과 있게 드러내려”(로마미사경본 총지침, 345항)고 합니다. 성서적 배경에 따라 전례 색깔을 정리한 인노첸시오 3세 교황 인노첸시오 3세(재위 1198~1216)는 ‘제대의 거룩한 신비 De Sacro Altaris Mysterio’에서 전례 시기의 고유한 특성에 따라 구분해야 하는 제의의 네 가지 기본 색깔을 정리합니다. 네 가지 색, 즉 흰색, 빨간색, 보라색, 초록색은 로마 교회가 그날의 고유한 특성에 따라 거룩한 제의를 구분하는 색이다. 우리는 사실 율법서에 나오는 사제복의 색이 네 가지, 즉 금색, 자주색, 자홍색과 다홍색(탈출 28장 참조)이었음을 잘 알고 있다. 흰색 제의는 증거자와 동정녀 축일 때 입고, 빨간색 제의는 사도들과 순교자들 대축일 때 입는다. 이점에 대해 아가서의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연인은 눈부시게 하얗고 붉으며 만인 중에 뛰어난 사람이랍니다”(아가 5,10) 주님은 증거자들과 동정녀들에게는 순수하고 사도들과 순교자들에게는 빨간색과 같다. 사도들과 순교자들은 붉은 장미의 꽃송이들이며 증거자들과 동정녀들은 들녘에 핀 흰 백합들과 같다. 그러므로 완전무결함과 무죄함을 드러내기 위해 증거자와 동정녀의 축일 때에는 흰색 제의를 사용해야 한다. 사실 나자렛 사람들은 순수하며 항상 흰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걸었다. “그들은 동정을 지킨 사람들로서 여자와 더불어 몸을 더럽힌 일이 없습니다. 또한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입니다.”(묵시 14,4) 그리고 흰색 제의를 사용해야 하는 축일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천사들의 축일, 주님과 세례자 요한의 탄생일, 주님 공현, 마리아 정화의 날(현재의 주님 봉헌 축일, 2월2일), 주님의 만찬, 주님 부활, 주님 승천, 주교 서품 등입니다. 빨간색 제의는 십자가 현양, 성령 강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축일, 바오로 회심 축일, 동정녀인 순교자 축일 등입니다. 보라색 제의는 범한 죄와 죽은 이를 위한 고통의 날과 금욕의 날에, 곧 대림 시기와 사순 시기에 사용합니다. 특이한 것은 대림 제3주일과 사순 제4주일에는 장미색을 사용할 수 있다고 전해줍니다. 초록색은 “나르드와 사프란 향초와 육계 향 온갖 향나무와 함께”(아가 4,14)라고 말할 때의 색을 의미하며 평일과 연중 시기에 사용한다고 알려줍니다. 현재의 거룩한 옷인 제의 색깔은 어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은 현대화와 함께 전통과의 조화를 이루면서 인노첸시오 3세가 정리한 내용들을 많이 반영하였습니다. ‘로마미사경본 총지침’ 346항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ㄱ) 흰색: 주님의 부활 시기와 성탄 시기의 시간 전례와 미사 때 쓴다. 그 밖에 수난에 관계되는 거행을 제외한 주님의 축제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거룩한 천사들, 순교자 아닌 성인들의 경축일, 모든 성인 대축일 … 등에 쓴다. ㄴ) 빨간색: 주님 수난 성지 주일과 성금요일, 성령 강림 대축일, 주님의 수난 전례, 사도들과 복음사가들의 천상 탄생 축일, 그리고 순교 성인들의 경축일에 쓴다. ㄷ) 초록색: 연중 시기의 시간 전례와 미사 때 쓴다. ㄹ) 보라색: 대림 시기와 사순 시기에 쓴다. 죽은 이들을 위한 시간 전례와 미사에도 쓸 수 있다. ㅁ) 검은색: 관습에 따라 써 온 곳에서 죽은 이를 위한 미사에 쓸 수 있다. ㅂ) 분홍색: 관습에 따라 써 온 곳에서 ‘기뻐하여라’ 주일(대림 제3주일)과 ‘즐거워하여라’ 주일(사순 제4주일)에 쓸 수 있다. ㅅ) 더욱 성대하게 경축하는 날에는 그날의 색깔이 아니더라도 축제일 색깔이나 더 품위 있는 색깔의 거룩한 옷을 입을 수 있다. 한국 교구들에서는 특별히 성대하고 기쁜 전례 예식 때는 황금색을 쓴다. 죽은 이를 위한 미사와 시간 전례에서는 흰색을 쓴다. 다양한 전례 색깔의 바탕에는 검은색과 흰색이 있다 거행하는 신비의 특성과 전례 주년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 제의 색깔의 바탕에는 검은색과 흰색이 있습니다. 보편 교회는 사제 복장에 대해서 “주교회의에서 제정한 규범과 그 지방의 합법적 관습에 따라 적절한 교회 복장을 입어야 한다”(교회법 제284조)고 규정하고,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모든 공식 행사에 “수단 또는 로만 칼라”(한국천주교 사목지침서, 제15조)을 착용하라고 정했습니다. 수단의 경우, 사제는 수도복에서 유래한 ‘검은색’을 사용하는데, 이는 금욕을 뜻하는 고행과 속죄의 표식으로 이 세상의 헛된 욕망들을 포기하고 저 세상에서 영광의 옷을 입게 되길 바란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반면에 미사 거행에서 주례 사제가 입어야 할 고유한 옷인 제의를 입기 전에 먼저 장백의와 영대를 합니다. 여기서 장백의는 라틴어 alba에서 알 수 있듯이 ‘흰색’이어야 합니다. 이 흰색은 거룩한 변모 때 예수님이 “새하얗게”(마르 9,3) 빛났다는 것과 무덤에 묻힌 그리스도의 몸을 감쌌던 흰 아마포(요한 20,6 참조)에서 알 수 있듯이 부활의 상징입니다. 수단과 장백의에서 드러난 검은색과 흰색은 죽음과 부활로써 어둠을 이기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 예수님의 파스카 신비를 살아야 하는 사제적 삶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2월호, 윤종식 디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