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0.9."누가 제 이웃입니까"_ 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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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송문숙 | 작성일2017-10-09 | 조회수1,332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루카 10,25-37(연중 27 월)
드높고 푸른 가을 하늘입니다. 묘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맑아지면 드높아진 만큼 낮아집니다. 안도현 시인의 “가을 엽서”가 떠오릅니다.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는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 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이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오늘 <복음>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저는 초라해진 저의 모습을 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여전히 저 주변에도, 초주검을 당해 쓰러진 이들이 여기 저기 웅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볼 때마다 마치 그들과는 반대방향의 열차에 앉아, 그들을 다루고 있는 신문쪽지를 바라보며 혀나 끌끌 차고 있는 저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처럼, 길을 피해 달아나는 저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낯선 이를 여관으로 옮겨가며 돌보아준 사마리아인의 용기와 사랑 앞에, 부러우면서도 자신이 비참해지고 그지없이 부끄럽고 그저 숙연해집니다. 말없는 그의 헌신과, 뒷날까지 챙겨주면서도 고요히 떠나는 그이가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떤 율법교사와 예수님과의 두 번의 대화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이 질문 뒤에는 율법교사의 편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고 있다. 마치 스스로의 행실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구원은 ‘무엇을 하느냐?’는 행위의 문제라기보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는 존재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묻기 전에, 오히려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임을 깨닫고, 주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할 일입니다. 구원이 자신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은 그분께 메여있는 존재임을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보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의 문제에 먼저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소임을 맡느냐가 중요하기보다,어떤 사람으로서 그 소임을 수행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두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10,29)
이 질문 뒤에도 역시 그의 옹졸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는 누구를 사랑하며 누구를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지? 사랑의 대상에 한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사랑의 대상에는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은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10,36)
예수님께서는 누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가? 대답하기보다, 오히려 모든 이웃이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사실,우리 모두는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모두에게 이웃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단지 이웃이 아니라 형제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누가 나의 이웃인가? 라는 문제보다, ‘나는 이웃이 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먼저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가 나의 형제인가 묻기에 앞서 나는 그의 형제인가? 물어야 할 일입니다. 곧 내가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대화의 마지막 구절에 있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 10,37)
이 말씀은 아는 것에 멈추지 말고,행동으로 실행하라는 요청입니다.말로만 하지 말고 몸으로 하라는 말씀이요, 의무적으로나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사랑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에게는 이미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것을 알 때가 아니라,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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