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교황님 강론]35명의 새로운 성인 시성 미사의 프란치스코 교황 강론[2017년10월15일 주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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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진영 | 작성일2017-10-24 | 조회수1,027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미사 강론입니다. http://www.news.va/en/sites/reflections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7.index.html
------------------------------------------------------------------------------ [교황님 강론 날짜] 2017년 10월 15일 주일 [연중 제28주일] [강론 당일 독서와 복음 말씀] 제1독서 : 이사야서 25,6-10ㄱ 화답송 : 시편 23(22),1-3ㄱ.3ㄴㄷ-4.5.6(◎ 6ㄷㄹ) 제2독서 : 필리피서 4,12-14.19-20 복음 : 마태오 복음 22,1-14<또는 22,1-10> http://i.catholic.or.kr/missa/?missaid=8386&gomonth=2017-10-15&missatype=DA --------------------------------------------------------------------------------
35명의 새로운 성인 시성 미사의 프란치스코 교황 강론 http://www.news.va/en/news/pope-francis-canonizes-35-new-saints
2017-10-15 바티칸 라디오
(바티칸 라디오) 프란치스코 교황은 주일에 매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라고 모든 신자들을 초대하면서 거의 순교자들인 35명의 새로운 성인들을 “길을 가리켜 준” 모범으로 높이며 시성했습니다.
시성 미사에서 성 베드로 성당에 모인 35,000명의 순례자들에게 교황은 “그들은 사랑에 대해 잠깐 ‘네(yes)’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은 자신의 삶으로 끝까지 ‘네(yes)’라고 말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시성된 성인들은 서른 명의 순교자들과 두 명의 사제 그리고 평신도들을 포함했습니다. 그들은 1645년에 브라질에서 네덜란드 칼빈주의자들 아래서 반가톨릭 박해로 고통을 받았고 한편 16세기 멕시코에서 3명의 원주민 어린이들이 가톨릭 신앙을 포기하고 그들의 고대 전통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여 순교를 당했습니다. 새로운 다른 두 성인들은 1739년에 세상을 떠난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온 20세기의 사제입니다.
다음은 교황의 시성 미사 강론의 전문이니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방금 들은 비유는 하늘 나라를 혼인 잔치로 묘사합니다(마태오 복음 22,1-14). 그 주인공은 임금의 아들, 신랑인데 우리는 그 복음 안에서 쉽게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비유는 신랑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고 초대 받고 오리라고 기대했던 손님들, 그리고 혼인 예복을 입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손님들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혼인을 축하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혼인은 평생을 함께 하는 친교,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와 즐기기를 원하시는 친교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분과 우리의 관계는 이렇게 왕에게 헌신하는 신하들이나 주인에게 충성하는 종들이나 또는 스승에게 전념하는 제자들의 관계 이상의 것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사랑스러운 신부와 그 신부의 신랑과의 관계입니다. 즉, 주님께서 우리를 원하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찾으러 밖으로 나가시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해야 하고 그분의 율법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으로는 그분께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는 진정한 삶의 친교, 대화하는 관계, 신의와 용서를 열망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사랑 이야기는 그런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마음대로 주도하시고 그 누구도 초대받은 유일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이들이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호의를 누리기 때문에 아무도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나 그분의 다정하고 특별하고 영광스러운 사랑으로 태어나고 다시 태어납니다. 적어도 하루에 한번 우리 자신에게 우리가 주님께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지 물어 보십시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다른 모든 것 가운데에서 그분께 매일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저의 생명이십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지 물어 보십시오. 왜냐하면 일단 사랑을 잃어버리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공허해 집니다. 그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혼이 없는 몸이 되고 불가능한 윤리, 아무 이유 없이 복종해야 하는 율법과 규칙들의 집합체가 됩니다. 그러나 생명의 하느님께서는 삶의 응답을 기다리십니다. 사랑의 주님께서는 사랑의 응답을 기다리십니다. 요한묵시록에서 한 교회에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나무라십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요한묵시록 2,4). 이것이 위험입니다. ? 판에 박힌 일상이 되어 버린 그리스도인의 삶, “정상적인 상태”에 만족하고 추진력도 열정도 없고 짧은 기억만 지닌 그리스도인의 삶. 그렇게 하지 말고 우리의 첫사랑에 대한 기억을 불꽃으로 거세게 일으킵시다. 우리는 사랑 받는 이들, 혼인 잔치의 손님들이고 우리의 인생은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매일 매일이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할 수 있는 놀라운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그 초대가 거부될 수도 있다고 경고합니다. 초대받은 손님들의 대부분은 자기 자신의 일에만 몰두해서 아니오(no)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마태오 복음 22,5). 그들 한 사람 한사람은 자기 자신의 일을 신경 썼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왜 초대를 거부했는지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초대받은 이들은 혼인 잔치가 따분하거나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일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이 요구하는 대로 어떤 위험을 무릅쓰기 보다는 무언가를 갖는 일에 더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것이 사랑이 어떻게 차가워지는지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악행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것, 즉 자신의 안전함, 자기 확인, 자신의 편안함을 더 좋아해서 사랑이 차가워집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행복을 가져다 주는 이득들, 쾌락들, 또는 취미의 편안한 의자에 주저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나쁘게 빨리 늙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내면이 늙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확장되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은 자기 자신 안에 갇 혀 버리고 맙니다. 나에게 모든 것이 달려 있을 때 내가 좋아하는 것, 나를 최고로 섬겨 주는 것, 내가 원하는 것에 모든 것이 달려 있을 때 ? 그때에 나는 가혹하게 엄격해지고 고집스러워 집니다. 나는 복음에 나오는 초대받은 이들처럼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을 때립니다. 복음에서 그들은 그저 자기들을 귀찮게 하고 있다는 이유로 초대를 전하러 온 사람들을 수치스럽게 대하고 거의 죽이기까지(마태오 복음 22, 6 참고) 했습니다.
이렇게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자기 자신과 함께 서 있는가 아니면 하느님과 함께 서있는가? 하느님께서는 이기심과 자기 몰두에 반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그분께서 초대한 이들의 한결같은 거부와 무관심 앞에서도 하느님께서는 혼인잔치를 취소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초대하십니다. “아니오”라는 말을 들으실 때 그분께서는 문을 닫지 않으시고 더 널리 초대를 하십니다. 옳지 않은 일들을 마주 대하실 때 그분께서는 훨씬 더 큰 사랑으로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그들의 거부와 다른 이들에 대한 불공정한 대접에 상처를 받을 때 우리는 자주 원한과 앙심을 품습니다. 반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아니오(no)”에 상처를 받을 때 다시 시도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더 선한 일을 계속해서 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사랑 안에서 살고 체념을 극복하고 게으르고 투정 부리는 우리 자신의 변덕을 극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이 강조하는 마지막 한가지가 있습니다. 초대 받은 손님들의 마땅히 입어야 하는 예복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초대에 그저 한번 응답하는 것, 단순히 “네”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우리는 혼인 예복, 사랑을 실행하는 “습관”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고(마태오 복음 7,21 참고) 체험하지 않고 “주님, 주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하느님의 사랑을 입어야 하고 그분을 위한 선택을 날마다 새롭게 해야 합니다. 특히 순교자들이 많은 오늘 시성되는 성인들은 길을 가르킵니다. 그들은 사랑을 향해 일시적으로 잠깐 “네(yes)”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으로 그 마지막까지 “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매일 입었던 예복은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를 마지막까지 사랑하셨고 그분을 못 박는 사람들에게 그분의 용서와 그분의 예복을 주셨던 그 “미친” 사랑. 세례 때에 우리는 하얀 예복, 하느님을 위한 혼인 예복을 받았습니다. 성인들의 전구를 통하여, 우리 형제 자매들의 전구를 통하여 이 예복을 입고 그 예복을 흠없이 지키겠다는 결심을 매일 할 수 있는 은총을 그분께 간구합시다.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다른 무엇보다 그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께 다가감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분과 함께 사랑의 잔치를 축하하는 결혼식장에 들어가기 위한 중요한 한 걸음입니다.
(바티칸 라디오에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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