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13,18-21(연중 30 화)
오늘 <복음>에서, 루카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의 첫째 단락을 마무리 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한 쌍의 비유를 전해줍니다. 곧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13,19)
‘겨자씨’는 유다문학에서 ‘작은 것’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합니다. 사실,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그것은‘정원’에 심었을 때를 말합니다. 아무 데나가 아니라 ‘정원’에, 그것도“자기 정원”에 심었을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올리브 동산 갈바리 언덕에 심어진 십자나무가 모든 인류를 끌어안은 큰 나무가 된 것을 말해주는 듯이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그 십자나무에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셨듯이 말이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거창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가르치십니다. 아니, 오히려 가장 작은 모습으로 오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당신께서도 아주 작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대체, 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작은 모습으로 오셨을까?
안도현 시인의 시, “가을 엽서”가 떠오릅니다.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는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 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이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사랑에 빠져본 이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결코 사랑에 빠져보지 않으면 그것은 알아들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왜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는지,왜 작은 자로 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사랑에 빠져본 자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이 앞에서, 늘 가장 작은 자로 머무는 법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자기가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언제나 자신의 모든 것을 벗어놓고 작은 자로 그를 위해 봉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가장 작은 모습으로 종이 되어 오신 이유는 진정으로 우리를,인간을 사랑하신 까닭일 것입니다.그래서 사랑하는 우리들 앞에 작은 자로 올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작은 자인가? 진정 작은 자의 모습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는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나는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아닐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대체 누구 앞에서 작아져 있는가?
사랑하는 이 앞에 서면, 분명 작아지기 마련일 것입니다. 만약 내가 형제 앞에 서 작아지지 않는다면,나는 그 형제를 사랑하고 있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 앞에서조차도 작아지지 않는다면, 어쩌면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겨자씨’는 이미 나 자신이라는 하느님의 ‘정원’에 뿌려졌고, 누룩은 나 자신이라는 ‘밀가루’에 넣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맘껏 자라나고, 맘껏 부풀어져야 할 일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