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1.2.위령의 날.-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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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송문숙 | 작성일2017-11-02 | 조회수1,178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마태 5,1-12(위령의 날)
단풍이 참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우리네 인간은 유난히도 단풍의 아름다움에 대해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 같습니다. 단풍은 꽃의 화려한 아름다움과는 사뭇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향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더 매료당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단지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은 꽃의 아름다움에 취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그 어떤 매료당함입니다. 분명,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사실, 잎은 새싹일 때부터 단풍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이미 잎 속에 간직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차차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아름다움은 사라짐의 아름다움입니다. 퇴색의 아름다움입니다. 죽음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이미 새싹일 때부터 품어온 것이었습니다. 사실, 사라져가는 아름다움의 단풍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은 나날이 죽어가는 우리의 아름다움이 아닐까?우리는 단풍의 아름다움에서, 우리의 인생의 아름다움이 느껴지기 때문에 끄달림 당하는 것은 아닐까?우리 인생의 처지를 단풍에서 보면서, 우리의 아름다움을 보고 싶은 까닭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우리도 죽음을 몸에 달고 다닙니다. 하루하루 죽으면서 삶을 살아갑니다. 새싹처럼, 내 몸 안에서 단풍을 성숙시켜가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성장시켜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질병과 죽음을 마치 원수처럼 여기며,그것을 피하거나 극복하려고 애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에게 병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에 미치면, 사실 죽음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병이 얼마나 은혜로운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죽지 않으려는 것은 단지 자신에 대한 애착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내려놓고 남을 위해 죽는 법을 배워야 새로운 삶이 펼쳐지게 됩니다. 남을 위한 죽음,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죽음입니다.
죽음은 생명의 탄생처럼 신비롭습니다. 죽음은 인생의 신비를 알려줍니다. 아니, 죽음이 있기에 인생은 신비롭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살아있는 동안에 죽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살아있으면서도 남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살아있는 죽음을 통해 이기적인 자아의 지옥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니 부활은 인간이 살아있는 죽음을 통해 이루어야 할 목표인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부활은 자신의 몸 안에 본래부터 살아있는 예수님의 생명을 드러나는 사건이 됩니다. 이처럼, 죽음 한가운데 생명이 있고, 죽음 한가운데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니 죽음 없는 생명도, 죽음 없는 사랑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죽음이 신비한 것은 죽음이 한 생을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생명의 신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삶은 죽음의 또 다른 일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죽을 몸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4,10)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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