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12.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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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17-12-27 | 조회수1,743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2017년 12월 27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제1독서 1요한 1,1-4 사랑하는 여러분, 1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2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3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 복음 요한 20,2-8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2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초등학교 들어가서 처음 보았던 시험은 받아쓰기였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단어나 문장을 말씀하시면 이를 듣고 시험지에 받아쓰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문제를 내시기 전에 선생님께서는 절대로 남의 시험지를 봐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책상 가운데에 책가방을 세워놓으라고 했습니다. 그 뒤부터 계속해서 선생님께서는 남의 것을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즉, 절대로 커닝(cunning)을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는데 남의 시험지나 미리 준비한 답을 봐서 좋은 성적을 얻는다면 얼마나 불공평합니까? 때부터 쭉 봤습니다. 그런데 신학교 들어가서 뜻밖의 시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글쎄 시험 전에 교수 신부님께서 ‘오픈북’이니까 책을 가지고 와서 답안지를 작성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책의 내용을 굳이 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어디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만 알면 답안지를 쉽게 작성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이 시험을 통해 배운 것이 더 많았습니다. 책의 어디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를 알아야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책을 읽었고, 책을 읽다보니 다른 친구들과 많은 토론도 할 수 있었습니다. 시험을 보는 것이 지금의 우리 모습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배운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시험을 보는 것이 아닐까요? 예전에 봤던 글이 하나 생각납니다. 어느 작은 초등학교에 젊은 교사가 부임해서 아이들에게 시험을 나눠주면서 절대로 커닝(cunning)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잠시 뒤에 몇몇 아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토론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선생님은 그래서는 안 된다며 호통을 쳤지요. 그러자 한 아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일을 겪으면 혼자 해결하지 말고 여럿이 지혜를 모아 해결하라고 했어요. 오늘 시험문제가 어려워서 어른들 말씀대로 한 것뿐인데 잘못된 것인가요?”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면 이 세상은 너무나 피곤하고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보다는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우리가 되면 안 될까요? 사랑하셨다는 제자로 알려져 있는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그는 늘 함께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과 늘 함께 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도 모든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진 상태에서도 십자가 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또 한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성모님과 함께 하셨으며,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예수님 부활 소식에 베드로와 함께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통해 제자들과도 함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함께 하는 삶이 요한 서간 한 가운데 ‘사랑’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함께 함에서 ‘사랑’은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랑이 바로 주님과도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합친 것보다 현명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켄 블랜차드) 외젠 뷔르낭의 '달려가는 제자들' "오늘 이 말은 꼭 해주세요" (‘좋은 글’ 중에서)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힘을 내세요."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힘이 나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해 보도록 하세요. 그러면 당신도 힘을 얻게 될 테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걱정이 사라지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들려주세요. 그러면 당신도 걱정이 줄어들 테니까요. "용기를 잃지 마세요." 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용기가 생겨나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속삭이세요. 그러면 당신도 용기를 얻게 될 테니까요. 할 말은 조건 없이 "용서합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감격하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들려주세요. 그러면 당신도 용서를 받게 될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따사롭고 푸근해 지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또렷하게 해 보세요. 그러면 당신도 감사를 받게 될 테니까요. "아름다워요."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따사롭고 환해지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소곤거리세요. 그러면 당신도 아름다워지게 될 테니까요. "사랑해요." 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사랑이 깊어지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하셔야 해요. 그러면 당신도 사랑을 받게 될 테니까요. 요한 사도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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