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겉과 속이 다른 체면치레만 하는 우리는 / 연중 제5주간 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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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18-02-06 | 조회수1,588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우리도 이제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미 노인네가 된 육칠십 대가 부모님 모시기도 한다. 허나 많은 이가 이런저런 여러 핑계와 구실로 나이 드신 부모님 모시는 걸 피하려한다. 그러면서도 자기 자식에게는 꼼짝 못하고 매여 산다. 몸이 아픈 어느 황혼의 자매님이 늙으신 시어머니를 모시는 게 너무 힘이 든단다. 우리 삶의 한 단면이다. 부모님 공경은 세월이 흘러도 변할 수 없는 자식의 도리일 게다. 황혼의 나이에도 많은 어려움을 이기며 어르신을 공경하는 분들의 모습은 석양보다도 더 아름답다.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마르 7,1-13)’ 십계명의 처음 세 계명은 하느님 사랑이고 나머지 일곱은 사람 사랑의 계명이다. 그렇다면 십계명의 전부는 ‘사랑하라.’라는 것이리라. 이웃 사랑의 첫 계명은 ‘부모 공경’일 게다. 부모를 공경하는 게 이웃 사랑의 첫걸음이다. 부모님 공경의 교회 가르침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라며 정말로 엄격하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나이까?” 이 기도에서 나약한 인간의 죄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이 느낀다. 교만과 위선에 갇힌 인간으로는 절대 드릴 수 없는 기도이다. 멀리서 찾지 않아도 내 주변에는 겉과 속이 너무 다른 이들을 종종 만난다. 믿었던 이에게 사기당하고 가까운 이의 숨겨진 추악함과 가식을 보면서 우리는 자괴감을 맛본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한결같은 사랑과 자비를 보여 주시는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어 우리 안에 당신을 닮은 모습을 심어 주셨기에. 그래서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전통이 그분 모습을 닮으려 할 때 진정한 가치를 지닐게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율법의 정신이 하느님의 자유와 평화로 향하게 하지 않고 우리의 형식 안에 가두려는 위선적 태도를 엄히 비난하신다.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나를 헛되이 섬긴다.”라며 전통이라는 이름에 갇혀 형식주의나 교회의 사업에만 몰두하는 것을 비판하신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도 정작 상처받은 이들의 치유에 무관심해진 조직이 아닌지를 깊게 되돌아보게 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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