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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기본교리( 26-2 갈라진 교회)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2-27 조회수1,840 추천수0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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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하나인 교회
 26-2 갈라진 교회
그러나 이 단일한 하느님의 교회는
초기부터 분열이 생겼던 것이며
11 세기에는 동·서 교회가 분열되었고,
16 세기에 와서는 결정적인
종교 분열이 시작되었습니다.
1)동서의 분열 :
서방에서는 교회가 현세적
권위로부터 독립되어 나가고
교황이 한층 두드러진 존재로
나타나면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언제나 긴밀했습니다.
동로마와 서로마가 정치적으로
갈라지면서 동방과 서방의
교회 사이에는 이질적 분위기가
강하게 생겨났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로마
(서방 가톨릭의 중심)
와 콘스탄티노플
(동방 가톨릭의 중심)
사이에는 전부터 자주
긴장된 관계가 있었습니다.
신학적인 명제
(성령이 성자로부터
나온다는 데 관한 문제)
전례의 실천
(누룩있는 빵이냐 누룩없는
빵이냐 하는 문제)
영적 권위
(로마 주교 즉 교황의 우위성이란
무엇이냐 하는 문제)
등에 대하여 일치를
이루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문제들은 결국
정치적 배경과 언어,
문화의 차이가 복잡하게 얽히며
굳어져만 갔습니다.
결국 1054 년 로마의
교황권으로부터 분열되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1965 년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날 무렵
동방 교회에 화해를 제의하여
일치를 향한
제 일보를 내디뎠습니다.
교리상의 많은 일치를 보았고
전례의 본 뜻에 있어서도 상호
거부감 없이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 교황의 수위권은
 아직 인정치 않고 있습니다.
동방 교회에서는 대주교가
최고의 책임자로 있습니다.
2)자기이론의 고집으로 일치보다
분열을 만든 루터
루터는 1483 년 10월 10일
독일 아이슬레벤에서 탄생하였으며
(유아세례, 세례명은 마르티노)
 1489 년 만스펠트 시립학교에서 라틴어,
전례음악, 교리를 배웠고 1502 년에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문학사 학위와
 3 년 후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505 년 7 월 17 일에 에르프르트에
있는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원에 들어가
1506 년 9 월에 정식으로 수사가 되었고
1507 년 4 월에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1513 년 10 월 19 일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성경교수로 활동하며
1515 년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원
11 곳을 관장하는 지부장이 되었습니다.
이 때에 수도생활을 철저히 하며
자신의 구원에 힘을 썼지만 불가항력적
육욕의 감정이 일어나 수도생활로는
불가능하다는 영신적 번뇌에 빠졌습니다.
그 후 '신앙에 의한 의화'라는 교리를
주장하면서 평온을 찾고 여러 신학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교황 레오 10 세는 베드로
대성전의 건립을 위해서 전임
교황 때에 공포한 대사부(大赦符)
판매를 재 공포하며 대사에 관한
설교를 루터에게 부탁하였을 때에
루터는 신자들이 대사의 참다운
의미와 가치를 망각하고 대사부를
면죄부로 착각하여 남용하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1517 년
10 월 31 일에 교구장에게 95 개
조항으로 된 대사의 올바른 의미와
실천에 관한 신학 명제들을 정리하여
제출하였습니다.
이것이 인쇄업자들의 손에 의해서
널리 퍼지게 되었고 인문주의자들과
교회개혁을 원하던 독일의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다음해 6 월에는 95 개 조항의
 해설서를 냈고 1518 년 10 월에
카예따노 추기경에게 교리를
취소할 명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였고
수차에 걸친 항의 취소를 명령받았으나
마찬가지로 거부하던 중 1520 년 2 월에
루터의 가르침에 대한 조사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6 월 15 일에는 교황교서
 "Exurge Domine(주여 일어나소서)"가
반포되어 루터의 이단교리 41 개항을
단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에 맞서 루터는 교황과
교황청을 비난하는 소책자들을
내었고 개혁 선언문들
(독일 국가의 그리스도교
귀족들에게 고함,
그리스도교인의 자유 등)
을 내어 독일인들의 감정을
이용한 반 이태리 분위기를
이끌어 나갔고 이에 1521 년 1 월 3 일
교서 "Decet Romanum Pontificem"으로
루터를 공식 파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독일의 군주 프리드리히의
주선으로 미사성제,
성직자의 독신생활,
수도허원 등을 비난하는
저서들을 내놓았고
그리스어로 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며 자신의
이론과 어긋나는 성경들을
제외하였습니다.
이 결과 독일의 종교사회는
혼란이 일어나고 성직과
수도생활을 떠나거나 회의를
일으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 시토 수녀회로부터
환속한 카타리나
본 보라와 루터는 결혼
(루터는 42 세, 보라는 26 세)
하였습니다.
2 남 2 녀를 낳았고
1546 년 2 월 18 일에
"당신이 설교한 가르침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그렇다"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하였습니다.
2 월 22 일 멜란히톤 신부의
주례로 장례를 치루고 유해는
 비텐베르크성의
중앙 성당에 안치되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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