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전례상징’] 전례에서의 거룩한 옷
“그리스도의 사제직 수행의 표징” 언제부터 사람은 옷을 입었을까? 의식주(衣食住)는 사람이 생존하는데 필수적인 3가지 기본 요소입니다.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현대 인류에게 옷 없이 산다는 건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성서적 맥락에서는, 사람이 죄를 짓고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창세 3,7)라는 창세기의 내용을 통해서 하느님과 함께 사는 에덴동산에서는 필요 없던 옷이 죄를 지어 죽음을 맞이하는 유한한 세상에서 삶의 필수요건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기 교회에서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어떤 옷을 입었을까? 이에 대해 구체적인 말해주는 문헌은 없지만, 옛 지하무덤의 그림들을 통해 유추해보면 당시 로마시민들의 평상복을 입고 성찬례를 거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라벤나의 성 비탈레 성당 모자이크 ‘옷이 아니라 가르침을 통하여, 복장이 아니라 품행을 통하여, 장식이 아니라 마음의 깨끗함을 통하여’ 언제부터 평상복과 전례복이 구분되기 시작했을까? 콘스탄틴 황제의 밀라노 칙령(313)으로 그리스도교가 박해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 황제의 후원을 받아 대성당을 건립하면서부터 전례에 사용하는 제구와 거룩한 옷이 발전합니다. 첼레스티노 1세 교황(422-432)이 428년에 작성한 갈리아 지역의 ‘비엔나와 나르본 지방의 주교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옷에 이상한 장식을 하려는 경향에 대해 비난하면서 성직자들이 시민들과 구별되어야 하지만, ‘옷이 아니라 가르침을 통하여, 복장이 아니라 품행을 통하여, 장식이 아니라 마음의 순수함을 통하여’ 다른 이들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요한 3세 교황 시대(560-573 재위)에 그려진 칼리스도 카타꼼바의 성 코르넬리오 지하무덤 프레스코화에 단순한 달마티카(현재의 부제복)와 제의에 팔리움을 걸친 3세기에 순교한 식스토 2세 교황(257-258)과 동료 순교자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6세기 초기 교황 연대기(Liber Pontificalis)에서는 일상적인 복장과 전례에서 착용하는 의복이 달라야 함을 말합니다. 6세기 라벤나에 세워진 성 비탈레 성당 모자이크에서 유스티아노 황제와 부제들을 대동한 막시미아노 대주교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황제의 복장과 구별되는 전례복으로 전통적인 달마티카와 제의가 보입니다. “성품과 직무를 받은 모든 등급의 봉사자에게 공통되는 거룩한 옷은 허리에 띠를 매는 장백의다”(로마미사경본 총지침, 336항) ‘로마미사경본 총지침’에서는 ‘거룩한 옷’(335항~347항)이라는 제목으로 전례복에 관한 규정을 제시합니다. 성찬례 거행은 교회의 몸 전체에 관련되며, 교회의 각 지체는 위계와 임무와 실제 참여 정도에 따라 각기 다른 모양으로 성찬례 거행에 관여합니다. ‘거룩한 옷’은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하는 각 봉사자의 고유 임무를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그런데, 성품과 직무를 받은 모든 등급의 봉사자에게 공통되는 거룩한 옷이 있는데, 그 옷은 요한 묵시록에서 등장하는 “희고 긴 겉옷”(묵시 7,13)을 연상시키는 장백의입니다. 장백의를 입으면서 하는 “…제 마음을 어린양의 피로 깨끗이 씻으시어”라는 기도는 요한 묵시록 7장14절을 인용한 것으로, 희고 긴 장백의를 입는 외적 행위를 통하여 어린양의 희생제사를 통하여 마음도 깨끗해지기를 기원합니다. 장백의가 띠 없이도 몸에 잘 맞으면 띠는 없어도 됩니다(336항). 또한 장백의가 평상복(성직자는 수단 또는 로만 칼라, 수도자는 수도복)의 목 부분을 가리지 못하면 먼저 개두포를 두르고 입어야 합니다. 곧 개두포나 띠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장백의가 목을 못 가리거나 몸에 잘 맞지 않을 때 사용합니다. 현재, 한국에서 자주 사용되는 ‘약식제의’라는 용어는 잘못된 것으로, 목을 가리고 몸에 잘 맞도록 만들어서 개두포와 띠가 필요 없는 ‘장백의’를 말합니다. 구원의 사업을 펼치신 주님의 멍에를 의미하는 제의는 사제가 죽을 때도 입는다 목에 걸쳐 무릎까지 늘어지게 착용하는 넓은 띠의 형태인 영대는 성무를 집행하거나 전례를 거행한다는 것을 표시하는 상징입니다. 부제는 왼편 어깨에서 오른쪽 옆구리로 비스듬히 걸치고, 사제는 목에 걸쳐 양쪽으로 늘어뜨리는 방식으로 착용합니다. 전례시기에 따라 색깔이 구분되며, 고해 성사에는 보라색을, 세례와 병자성사, 성체 강복 등에는 흰색을 사용합니다. 영대를 하면서 “원조의 타락으로 잃어버린 불사불멸의 영대를 제게 도로 주시어”라며 기도하면서 영원한 생명으로의 회복을 기원합니다. 장백의에 영대를 한 사제는 제의를 입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in persona Christi) 미사에서 회중을 이끕니다. 사제는 전례 거행을 할 때 사적이고 주관적인 행위를 포기하는 마음의 자세를 지니고,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주례해야 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러한 인식은 제의를 입으면서 하는 기도인 “주님께서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셨으니 제가 주님의 은총을 입어 이 짐을 잘 지고 가게 하소서”에서 잘 드러납니다. 제의는 사제의 죽음에 동반하여 장례 때 제의가 입혀진 시신을 볼 수 있습니다. 교황의 장례 때에는 일반 장례 미사에서 사용하는 흰색, 보라색, 검은색이 아니라 빨간색 제의를 입는데, 이것은 옛 로마의 전통을 교황님 장례에서만 유지한 것으로 교황이 주님과 교회를 위해 살아온 희생적 삶을 드러냅니다.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에페 4,24) 일상적인 복장과 달리 전례를 위한 거룩한 옷은 내적 변화의 과정, 하느님을 닮아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과정, 인간의 죄의 역사로부터 생겨나 커지고 계속 새로이 자라난 죄의 장애물을 극복하는 과정을 겪는 새로운 공동체를 상기시킵니다. 베네딕토 16세는 ‘전례의 정신’에서 전례복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전례복은 사제가 본래의 자기로부터 벗어나 그리스도에 의해 그리스도를 향한 새로워짐의 역동성에 들어가도록 요구한다. 또한 전례복은 미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세례로 시작되어 성찬례 동안 계속되고 성사를 통해 이미 우리 일상에 모습을 드러낸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뻗은 새로운 길을 상기시킨다.” 전례에서 직무자가 입는 거룩한 옷은 단순한 기능적 역할을 넘어, “그리스도를 입고”(갈라 3,27)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나누어 주며, 스스로 그리스도를 위한 도구가 됨을 의미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5월호, 윤종식 디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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