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8주간 수요일(마르10,32-45)
갈 길은 멀고 험해도
우리가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삶에 활력을 줍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사람과 가르침을 받는 사람의 지향하는 바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애써서 가르쳐도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게으르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면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스승은 끝까지 품고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동고동락하면서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예고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을 꼭 붙들고 안 된다고 반박하다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르8,31-35). 하고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예고(마르9,30-32)에서도 알아듣지 못하고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을 하였습니다. 세 번째 예고(마르10,32-34)에서도 알아듣지 못하고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 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하고 높은 자리, 영광을 받는 자리를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10,43-44).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광의 자리에만 집착하는 제자들에게 이제 인간의 생각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고 살라는 일깨움을 주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너무도 다릅니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인간을 생각하고 계시지만 인간은 먼저 자기 자신을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더 많은 것을 베풀고자 하시지만 인간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챙길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적인 것을 먼저 생각하지만 인간은 육적인 것을 우선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하느님의 나라와 아버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지만 인간은 먼저 자기의 뜻과 이익만을 찾습니다. 세속적 승리, 이성적 승리가 아니라 십자가의 실패를 통한 승리를 갈망해야 하겠습니다.
높은 자리, 영광의 자리에 앉기를 원하는 야고보와 요한을 보고 다른 제자들이 불쾌하게 생각하였다는 것은 역시 그들도 그런 욕심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줍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높은 자리를 바라는 것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영광의 자리에 가기 위해서는 먼저 그만한 노력과 희생이 따라야 하는데 그런 수고 없이 영광만을 바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수고와 땀 없이 주어지는 영광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높이높이 오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고 하신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 멀고 험해 보여도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겸손하게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섬김은 가식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천적이어야 합니다.
요한복음13장36-3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예고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 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베드로는 착한 목자가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듯이(10,11.15.17참조) 자신도 예수님을 위해 바치겠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명하신 새 계명의 실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은 그분이 보여주신 모범을 충실히 따르는데서(“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나와야지, 자신의 의지나 용기를 과시하는 것으로 나타나서는 안 됩니다. 간절한 원의와 실천할 능력 사이에는 커다란 틈이 있기 마련입니다. 배워서 알았으면 안 만큼 진실하고 겸손하게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