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 돋보기]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전례력에서 성인 축일을 제외한 대부분의 축일은 인간의 역사 안에 하느님이 개입하신 특별한 사건들을 기념한다. 성탄과 부활, 성령 강림 대축일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축일 외에도 교회 역사 안에서 생겨난 신심이나 신학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제정된 축일이 있다. 이런 축일들은 주로 1000년대 이후에 특정 지역이나 인물에 의해 확산되어 교회 전례력 안으로 도입되었고, 대림·성탄·사순·부활 시기가 아닌 연중 시기에 거행된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로 연중 시기가 시작되는 6월에 모여 있다. (이밖에도 연중 시기의 마지막인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과 성탄 시기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도 이에 해당 된다.)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에 대한 이탈리아 신자들의 정성은 상상 이상으로 열광적이다. 이탈리아 중부 지역, 아씨시 근처의 인구 만 명도 되지 않는 작은 마을 스펠로(Spello)는 아직도 이 대축일의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대축일 새벽부터 가정과 회사, 단체별로 큰길, 골목길 할 것 없이 길을 따라 갖가지 도안을 그리고 그 위에 색색의 꽃잎으로 아름답게 수를 놓는다. ‘인피오리따(infiorita)’라고 하는 이 ‘꽃잎 카페트’는 주교좌 성당에서 대축일 오전 미사가 장엄하게 거행되고 나면 성광에다 성체를 모신 사제들과 주교가 성당 밖으로 행렬을 시작할 때 밟고 지나가도록 온 동네가 새벽부터 준비한다. 여기에는 대축일을 맞으신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이 ‘꽃길’만 밟으시라는 마을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이 녹아있다. 1264년 교황 우르바노 4세가 제정한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다음 주일에 지낸다. 이 대축일의 제정에는 벨기에 리에즈(Liege)의 율리아나 수녀(1191~1258년)가 체험한 전례 안에 성체를 공경하는 축일을 지낼 것을 명하신 예수님의 환시와 1263년 이탈리아 중부지방의 볼세나(Bolsena)라는 곳에서 일어난 성체 기적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성체 성혈 안에 예수님께서 실재로 현존하심을 공언한 이 대축일의 제정은 이후 성체 현시, 성체 행렬과 같은 장엄하고 화려한 성체 공경 예식과 열광적인 성체 신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중세의 이런 성체 공경은 그 한계도 분명했다. 이 시기에는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의 몸을 모시고 그분과 하나 되는 성체성사의 본래 의미보다 성체 그 자체에만 주목했다. 즉 우리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남겨 주시고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주신 성체의 의미는 잊혀지고, 성체 안에 기적처럼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두려워하며 성체를 ‘바라보는 대상’으로만 생각하게 되었다. 신자들은 열광적으로 성체에 대한 신심을 표현했지만 영성체는 하지 않았다.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자신들 몸 안에 모시기가 부당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성체 신비의 한 측면이 아닌 균형 잡힌 성체 공경을 원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례 개정 위원회가 이날을 위한 새로운 감사송을 마련해 성체성사의 역사적이고 구원적인 측면을 교회가 함께 기념하고 기억하도록 했다. : “주님께서는 이 큰 신비로 신자들을 기르시고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류를 하나의 신앙으로 비추시고 하나의 사랑으로 뭉쳐 주시나이다. 이제 저희는 이 놀라운 성사의 식탁으로 나아가 주님의 은총을 가득히 받고 부활하신 성자의 모습을 닮은 새로운 인간이 되고자 하나이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은 그저 바라보이기만을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먹히시고, 우리 안에 온전히 녹으셔서 우리가 당신과 하나되고, 당신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고 양육 되기를 바라신다. 성체를 모시는 가운데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내며, 예수님이 다른 어떤 곳이 아닌 우리 마음 안에서 꽃길을 걸으시고, 그로 인해 우리 또한 그분과 함께 꽃길을 걷을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가꾸면 좋겠다. [월간빛, 2023년 6월호, 소형섭 아우구스티노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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