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늘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 부름에 /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 |||
---|---|---|---|---|
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18-07-06 | 조회수1,569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것이 무엇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2ㄴ-13 참조) 예수님은 이렇게 반대자들에게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고 당신 사명을 분명히 밝히신다. 자비는 과연 무얼까? 그것은 하느님을 움직이는 힘이 되는 좋은 행동이란다. 그러나 타고난 자비심은 없다. 자비는 노력과 희생의 결과일 게다. 참을 줄 알아야만 자비를 베풀게다. 비웃음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참된 자비가 없다. 조금 더 가졌다고, 하나 더 안다고 거들먹이고 높은 자리에 있다고 사람을 우습게 군다. ‘이래서야 어찌 자비를?’
죄인이었던 마태오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 그는 가난한 백성들의 세금을 걷어 로마에 상납하며 부를 축적하는 공공연한 죄인이요 파렴치한인데도. 죄인들도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그분 식탁에 앉는다. 이런 모습을 바리사이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우리도 마찬가지일 게다. 흔히들 하느님의 모습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단다. 하느님께서는 왜 못된 이에게 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침묵하시는지를 자신들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때가 많다나. 사실 부족한 이를 챙겨주는 이가 정녕 자비로운 이다.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챙겨 주는 이가 진정한 자비로운 자다. 이 주님 자비는 우리의 일상에서 다양하게 다가온다. 이에 대한 진정한 우리 응답은 참으로 참 행복으로 이끌리라. 이런 부름이 여러 번 주어지지만 우리는 그걸 수차 놓치곤 할게다. 그 부름이 지나간 것을 알 때에 우리 마음은 얼마나 허망할까? 그분께서 부르시려고 ‘나를 따르라!’라는 그 부름에, ‘다가가는 자세’를 갖도록 노력해야겠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