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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례] 슬기로운 전례상징: 성체성사의 상징 - 빵과 포도주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3-08-05 조회수1,765 추천수0

[슬기로운 ‘전례상징’] 성체성사의 상징: 빵과 포도주

 

 

음식을 통해 자신을 기억하게 한 먹보 주님!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마태 11,19) 예수님은 먹보, 술꾼으로 불릴 정도로 식탁에서 다른 이들과 식사하는 것을 꺼리지 않으신 듯합니다.

 

한때 ‘먹방’이 유행이 되어 옥스포드 영어사전에도 ‘mukbang’이라고 등록이 되었는데, 왜 우리는 남이 먹는 것을 보면서 즐거워할까? 사람들은 자신이 먹는 것뿐 아니라 남이 먹는 것을 보는 것도 즐깁니다. 그것은 맛있는 음식을 보면, 위와 췌장에서 그렐린 호르몬이 만들어지고 이 호르몬이 식욕을 자극하기 때문이라고 뇌과학자들은 말합니다.

 

먹고 싶은 욕구와 자신을 멋있게 보이고 싶어서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는 심리적 갈등 사이에서 고민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또 다른 차원, 곧 하늘나라의 잔치에서 먹고 마실 수 있는 희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이제부터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마태 26,29)

 

 

땅의 결실인 빵과 포도주!

 

미사 중에 사제는 예물 준비를 하면서 “저희가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주님께 바치오니”, “저희가 포도를 가꾸어 얻은 이 술을 주님께 바치오니”라고 기도합니다. 주님께 봉헌되는 빵과 포도주는 창조주께서 창조하신 ‘땅의 결실’입니다. 땅에 뿌리를 두고 토양 깊숙이 있는 모든 기운을 모아서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입니다.

 

빵이 되기 위해서 밀알은 가루가 되고, 포도주가 되기 위해서 포도알은 즙이 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내어준 예수님의 삶을 매일 미사 때 봉헌되는 빵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장 레미 신부님은 ‘생명의 태양인 성찬례’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밀은 자라서 추수되기 위해 땅에서 죽는다. 하지만 추수도 밀을 빻아 반죽해서 빵을 구워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 이런 이중의 죽음을 통하여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빵이 되는 것이다. 이 죽음은 생명의 양식이 되기 위한 길이다.”

 


탈출에서의 ‘어린 양’과 ‘누룩 없는 빵’과 광야에서의 ‘만나’

 

고대 유다인에게 있어서 이집트를 탈출한 사건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정립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체험입니다. 왜냐하면 출애굽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 종살이의 멍에를 던져버리자고 스스로 결정한 게 아니라 주님께서 구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르고 그 고기는 가족이 먹는 파스카 축제(탈출 12,1-14 참조)와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무교절(탈출 12,15-20 참조)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출애굽과 연결된 가장 중요한 축제들입니다.

 

브랜트 피트는 ‘성만찬의 신비를 풀다’에서 “파스카 축제를 완성하는 것은 어린 양의 죽음이 아니라 그 고기를 먹는 것”이라고 하며 그 이유는 성경에서 그들이 어린 양을 ‘먹어야’ 한다고 다섯 번에 걸쳐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에서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마태 26,26)라는 말씀의 배경이 됩니다.

 

출애굽 여정을 위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베푼 특별한 음식은 ‘만나’(탈출 16,31)입니다. 만나는 40년 동안 매일 나타났으며,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도달하자 그 기적이 멈추었다고 전해줍니다(여호 5,12). 여기서 핵심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는 사실로서, ‘만나’라는 이름이 히브리어로 ‘이게 뭐지?’(man hu)라는 의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자연에서 얻은 천연 물질이 아니라 하늘에서 온 초자연적인 빵이라고 이스라엘 민족은 믿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주님의 기도’(마태 6,9-13; 루카 11,2-4)에서 ‘일용할 양식’이 그리스어 단어인 ‘에피우시오스’(epiousios)이고, 불가타역 라틴어로는 ‘수페르숩스탄찌알레’(supersubstantiale), 곧 ‘초자연적인’ 빵이라는 사실과 잘 연결이 됩니다.

 

 

최후 만찬의 빵과 포도주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며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은 매년 ‘파스카 예식’을 거행했습니다. ‘파스카 예식의 만찬’은 ‘세데르’(seder)라고 불리고, 파스카 만찬의 규정은 ‘하가다’(Haggadah)라고 알려진 문헌에 담겨 있습니다. 파스카 만찬의 기본 구조는 예수님 시대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정형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최후 만찬에 대한 이야기는 두 그룹, 곧 마태 26,26-30와 마르 14,22-26, 루카 22,14-20과 1코린 11,23-25으로 나뉩니다. 이 두 그룹의 차이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는 문구가 있느냐 일 겁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몸과 피로 변화시키고 제자들에게 먹고 마시라고 주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라 교회는 지금도 성찬례를 거행하며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며, 주님과 일치를 이룹니다.

 

성서학자인 스콧 한은 ‘네 번째 잔의 비밀’에서 유다교의 파스카 예식과 비교했을 때, 예수님께서 네 번째 포도주잔을 마시지 않았음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번째 잔을 거르기로 택하셨을 때, 파스카 만찬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나라의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까지 포도주를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고 하셨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직전에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건네진 포도주를 한 차례 거부하셨다(마르 15,23 참조).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에 이르자 ‘신 포도주’가 예수님께 건네졌다(요한 19,29; 마태 27,48; 마르 15,36; 루카 23,36 참조). 요한복음에서만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을 알려 준다.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면서 숨을 거두셨다’(요한 19,30).”

 

우리는 성체성사에 참여하여 말씀과 성체와 성혈로 양육을 받으면서도, 아직도 또 다른 그리스도로 동화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언제 예수님처럼 “다 이루어졌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밀처럼 가루가 되어 빵이 되듯이, 포도가 짜여서 즙이 되듯이, 사랑 때문에 자신이 가루가 되고 짜이는 아픔을 넘어서야 비로소 가능할까요?!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8월호, 윤종식 디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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