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무지無知의 병 -회개와 겸손이 약藥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 |||
---|---|---|---|---|
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8-08-03 | 조회수3,733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2018.8.3.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예레26,1-9 마태13,54-58
무지無知의 병 -회개와 겸손이 약藥이다-
글씨는 마음의 거울이라 했습니다. 내용과 더불어 친필 글씨의 편지를 읽을 때는 푸근하고 편안한 느낌이었는데, 2천년대 들어와선 거의 친필 편지를 받지도 못했고 쓰지도 못했습니다. 예전에는 매일 강론도 꼭 손으로 써 보관했는데, 2천년대 들어와선 노트북을 사용하기에 거의 친필 강론을 써 본적이 없습니다. 예전의 편지와 전화를 대신 하는 것이 카톡입니다. 수도원 봉헌함을 개봉할 때 마다 봉투에 적힌 각자 고유의 친필 글씨의 내용이 참 반갑고 고마워 정독합니다.
“수사님,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이틀이지만 맛깊은 영성의 샘물, 참 달콤합니다. 건강하십시오.” “편히 쉬었다가 갑니다. 수도사님, 신부님 뵈옵고, 마음의 평안과 안식을 조금이나마, 배우고 갑니다. 저의 삶에서 실천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또 오겠습니다.” “천국같은 곳에서 머물러 있다 갑니다. 감사합니다. 작은 정성이라 죄송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늘 영육간에 건강하세요.” “잘 쉬고 갑니다. 수사님과 수도원 식구분들 평안을 빕니다!”
한결같이 따뜻하고 다정한 글입니다. 흡사 영혼의 쉼터같고 영혼의 하늘병원같은 수도원에서 치유받은 모습들입니다. 회개를 통해 무지의 병이 조금이나마 치유된 겸손한 모습들입니다. 새삼 수도원을 의인화擬人化한 자작 좌우명座右銘 애송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넷째 연이 생각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무지의 병의 치유에 하늘병원같은 수도원에서의 피정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을 것입니다. 회개와 겸손의 약으로만 치유되는 무지의 병입니다. 단번 치유가 아니라 평생동안 치유받아야 하는 무지의 병입니다.
요즘 참 많이 강조한 마음의 병, 무지의 병입니다. 모르면 알려줘도 모릅니다. 모르기에 오해와 착각이요,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에 불통입니다. 무지의 불통입니다. 만병의 근원이, 만악의 근원이 바로 무지입니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란 불가에서 말하는 세가지 번뇌의 탐진치 삼독도 무지에서 기인하고, 에바그리우스의 탐식, 음욕, 탐욕, 분노, 슬픔, 나태, 허영, 교만의 여덟가지 병든 생각도 결국은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우리의 근원적 두려움과 불안 역시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하느님의 빛’뿐입니다. 무지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우리의 영원한 도반이신 빛이신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하는 것뿐입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무지의 병-회개와 겸손이 약이다-’로 정했습니다. 정말 우리의 궁극의 적은 무지입니다. 하여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고 이웃을 알기위해 평생공부하는 평생학인인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가장 쉬운 것이 남판단하는 것이고 가장 힘든 것이 자기를 아는 일입니다. 하여 자기를 아는 것이 겸손이자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겸손을 통해 자기를 알아감으로 비로소 치유되는 무지의 병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예수님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나자렛 사람들에게서 고질적인 무지의 병을 봅니다.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에다 질투에 눈멀어 있어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을 보지도 믿지도 못합니다. 무지로 인한 불통입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고향인들의 무지의 현실을 인정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아마 예수님은 고향인들의 무지의 병임을 인정함으로 무시나 배척에도 초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회개와 겸손을 통해 무지의 병이 치유될 때 함께 사는 형제들도 편견없이 존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레미야 예언자도 복음의 예수님과 흡사한 처지입니다. 완전히 무지의 세력들에 포위된 사면초가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해 이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내가 너희 앞에 세워 둔 내 법대로 걷지 않는다면, 또 내가 너희에게 잇달아 보낸 나의 종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나는 이 집을 실로처럼 만들어 버리고, 이 도성을 모든 민족들에게 저주의 대상이 되게 하겠다.”
무지에 눈 먼 사제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이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라며 예레미야에 위협을 가합니다. 회개는 커녕 더욱 적대적이 되어 갑니다. 무지의 병보다, 무지의 악보다, 무지의 죄보다 두렵고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인류의 모든 전쟁도 대부분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인간의 본질과도 같은 무지입니다. 예수님 고향 사람들이나, 예레미야에 적대적인 무지의 사람들은 바로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무지의 병의 치유에 유일한 약은 회개와 겸손뿐입니다. 평생동안 치유되어야 할 무지의 병에 처방은 평생 회개와 겸손뿐입니다.
무지의 병의 치유에 매일 바치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무지의 병을 치유해 주시고 당신의 온유와 겸손을 선물하십니다.
“하느님,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은 참된 구원이시옵니다.”(시편69,14ㄷㄹ).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2).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