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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제1독서 (예레31,1-7)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8-08 조회수1,896 추천수0 반대(0) 신고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제1독서 (예레31,1-7)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칼을 피해 살아남은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다.

 

 이스라엘이 제 안식처를 찾아 나섰을 때, 주님께서 먼곳에서 와 그에게 나타나셨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2-3)

  

'칼을 피해 살아남은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다.'

 본절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과거 이스라엘 자손들이 경험한 출애굽 사건을 염두에 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을 가장 현저하게 뒷받침해주는 것은 본절의 시제가 과거를 나타낼 때

주로 쓰이는 완료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과 '광야' 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광야' 에 해당하는 '미드빠르'(midbar)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를 빠져나와

도달한 시나이 광야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입었다' 에 해당하는 '마차'(matsa)는 완료 시제로서 문자적으로 '발견했다' 는 의미이다.

그리고 '은혜'에 해당하는 '헨'(hen)은 어원상 지체가 높은 존재가 지체가 낮은 존재에게 다가가,

비록 그가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몸을 굽혀 조건없이 호의를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히브리 민족은 주님의 그러한 은혜를 입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등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시어

(탈출6,4-8) 그들에게 풍족한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셨다.

 

본절이 이처럼 과거 출애굽 사건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이것은 장차 선민이 바빌론 유배 생활에서 해방되어 고향 땅으로 회복되는 것을,

출애굽 사건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른 한편, 본절의 예언은 과거가 아닌 미래의 사건, 즉 바빌론 유배 생활에서의

해방을 직접 염두에 둔 표현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러한 해석을 가장 자연스럽게 뒷받침하는 것은 '칼' 이라는 표현이다.

'칼'에 해당하는 '하레브'(hareb)는 잔인한 살육을 비유하고 있는데,

예레미야나 에제키엘 같은 바빌론 유배 직전과 직후의 예언자들은 이 단어를 자주

바빌론의 잔인한 살육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하였다 (예레21,7 ; 24,10 ; 에제5,12 ; 6,3).

 

바빌론 유배를 통해 포로로 끌려간 자들은 사실상 그 살육에서 생존한 자들이다.

그런데 이 경우 '은혜를 입었다' 는 표현이 완료 시제로 되어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마차'(matsa)라는 완료 시제는 예언적 완료(prophetic perfects)로 해석할 수도 있다.

 

예언적 완료란, 아직 발생하지 않은 미래의 사건을 예언함에 있어서, 완료 시제로 표현함으로써,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일임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면, 본문은 시간을 초월하여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 하느님께서

그 사건을 미리 계획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그 사건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다.

 

한편, 출애굽과 바빌론 포로 귀환 사건이 그 성격에 있어서 상당히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면,

본절의 예언을 두 가지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떠한 관점으로 보든지 상관없이, 본문이 전하는 보다 근본적인 의미는

그들이 주님의 은혜를 입을만한 자격을 조금도 갖추지 못하였지만,

주님의 과분한 은총으로 말미암아 참되고 온전한 안식을 얻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이 제 안식처를 찾아 나섰을 때'

 

본문은 부정사 구분으로서, 시제가 상반절의 지배를 받는다.

주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 가실 때에, 그들이 칼에서 벗어나

광야에서 주님의 은총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원문에 가깝게 해석하여 '안식을 얻게 하리' 에 해당하는 '레하르끼오'(leharggio)

원형 '라가으'(lagah)는 요동하는 것을 진정시키고 달래는 측면의 평안함을 의미한다(예레47,6 ; 50,34).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신다는 본문의 표현은, 원문상 '라가으' 와 다른 단어가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그들에게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하신다는 여호수아서 1장 13절, 23장 1절 등의 표현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그점에서 본문은, 포로 귀환민들이 살던 곳에서 나와, 다시 자신들의 본래 기업

가나안으로 가서 그곳에서 정착하게 된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주님께서 먼곳에서 와 그에게 나타나셨다'

 

'먼곳에서'에 해당하는 '메라호크'(merahoq)는 구약 성경에서

공간적이거나 시간적의미로 모두 사용되는 단어이다.

공간적 의미의 입장을 취하면, '먼곳에서(부터)'(신명28,49)라는 의미가 되며,

시간적 의미 입장을 취하면, 이것은 '옛날부터'(옛적에)(이사22,11; 37,26)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2절과 본절의 예언을 과거 출애굽 사건과 연결하면, 여기에서

'메라호크'는 시간적 의미를 지닌 것이 되며,

바빌론 유배 귀환의 문맥과 연결하면, 공간적 의미를  지닌 것이 된다.

 

3절에서 동사가 모두 세개 사용되었고, 이들 표현들은 모두 완료 시제로 표기되어 있다.

이를 과거 시제로 보면, '메라호크'는 시간적 측면에서 해석해야 하지만,

'예언적 완료'로 보면, '메라호크'는 공간적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본문은 주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진정한 이유가 그들을 변함없이

신실하게 사랑하시는 자애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여기의 '영원한 사랑'에 해당하는 '아하바트 올람'(ahabath olam)

선민에 대한 주님의 계약적 사랑을 함축하는 표현이다(신명4,37 ;10,15).

 

하느님의 계약적 사랑은 선민의 조건과 형편과 관계없이

그들에 대한 주님의 일방적 은혜로 베풀어지는 사랑이다.

때문에 그 사랑을 받아 누리는 이스라엘이 그것으로 인해 자신들의 공로를 내세울 수는 없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전적으로 무능한 가운데 있을 때에 그들을 사랑하셔서,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는 궁지에서 건져 내셨다.

 

그러한 은혜가 여기에서 또 다시 '자애' 라는 표현으로 반복된다.

'자애'에 해당하는 '하쎄드'(hased)계약 백성을 향한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신실한 사랑을 강조하는 단어이다(예레9,24 ; 호세2,23).

이러한 주님의 계약적 사랑을 배제한다면, 이스라엘은 구원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

실패와 좌절을 맛보며, 절망에 사로잡혀 필경 망하고 말 것이다.

 

한편, '베풀었다' 에 해당하는 '메샤크티크'(meshakthik)의 원형 '마샤크'(mashak)

무능력으로 주저 앉아 있는 자를 생명으로 이끌어 낸다는 의미를 지닌 표현이다.

여기서도 이 단어는 주님께서 이집트의 고난으로부터 선민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신 것

또는 바빌론의 압제로부터 이끌어 내신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이것은 구원사적 측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어두운 데에서 불러내어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주님의 놀라운 구원(1베드2,9.10)의 이미지와 잘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마태15,27)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요한21,16)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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