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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예레31,31-3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8-09 조회수1,479 추천수0 반대(0) 신고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예레31,31-34)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그들은 내가 저희 남편인데도 내 계약을 깨뜨렸다.  주님의 말씀이다."  (32)

 

본절은 주님께서 그가 선택하신 계약 백성과 새롭게 맺으실 새 계약(신약)이

과거 모세 시대에 맺은 옛 계약(구약)과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는 가운데,

주로 옛 계약의 불완전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본절에서 '손을 잡고' 에 해당하는 '헤헤지키 베야담'(heheziqi beyadam)

주님께서 과거 선민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신 과정 가운데, 하느님께서 순전히

당신의 주권으로 그 일을 이루셨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원문의 뉘앙스를 고려해서 다시 번역하면, '내가 그들의 손을 강하게 붙잡고'

라는 의미가 된다. 이와 동일한 표현이 창세기 19장 16절에도 제시되는데,

이 멸망하는 소돔성에서 속히 나가지 않고 지체하며 머뭇거리자, 주님의 천사들이

그들의 손을 강하게 붙들어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을 성읍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적인 행동을 출애굽 과정에서 세 번 보여 주셨다.

 

한 번은 그 일을 수행치 못하겠다고 고집하는 모세의 의지를 꺾어,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그 사명을 수행하게 하는 과정에서(탈출4,13-16), 

다른 한번은 모세가 그 일을 행하면서 자기 동족들로부터의 반대와 저항을 받게 되었을 때,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과정에서(탈출5,21-23 ; 6,1),

그리고 나머지 한 번은 사면초가의 위기에 직면한 선민 이스라엘에게 홍해를

기적적으로  열어 주시는 과정에서(탈출14,10-25) 그렇게 하였다.

 

이러한 세 번의 사건은 주님께서, 이집트에서 나오지 않고 그 안에서 안주하려고 하는

나약한 성향을 가지고 있던 선민 이스라엘의 '손을 강하게 붙들고',

오로지 당신의 주권으로 그들을 이끌어 구원해 내셨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렇게 큰 은혜를 베푸신 후에 그들과 계약을 맺으셨지만, 그들은 이것을 깨뜨렸다.

 

이것은 인간의 사악함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주며, 더 나아가 그들의 역사가

오로지 반역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내가 저희 남편인데도 내 계약을 깨뜨렸다'

 

본문은 옛 계약의 연약함과 한계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옛 계약의 대상인 선민 이스라엘은 그것을 지킬 능력도 없었고, 의지도 부족하였다.

옛 계약은 모세 계약(탈출19-24장)으로 대표되는데, 그들은 계약을 체결함에 있어

흘렸던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주 하느님을 배반하는 행동을 보이고 말았다(탈출32,1-35).

 

본문에서 '내가' 에 해당하는 단어 '아노키'(anoki)가 사용되어 주어를 강조하고 있다.

즉 선민 이스라엘의 손을 강하게 붙들어 당신의 절대 주권에 입각해 구원해 내시고

그들과 계약을 체결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그처럼 놀라운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그들의 계약 파기에 대한 책임이 더 크게 부각된다.

 

한편, 본문에서 '남편인데도'에 해당하는 '빠알르티'(baallthi)의 원형 '빠알'(baal)

엄격히 말해서 '주인이 되다' 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인됨은 결혼 관계를 전제한다.

왜냐하면 '빠알'에는 결혼 관계를 통해 주인의 신분을 갖게된 '남편'이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탈출21,22).

 

그러므로 본절에중요한 점은, 결혼 관계 속에서 아내의 남편이 되든, 하인의 주인이 되든,

주님과 그 계약의 대상인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동맹의 관계,

다시 말해서 선민 이스라엘은 결코 주님을 배반해서는 안 되는 신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계약을 깨뜨린 당사자는 바로 '헴마'(hemma)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언급되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큰 은혜를 받은 그들이 결코 그렇게 하지 말아야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과의 계약을 깨뜨렸음을 부각시켜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33)

 

본절과 34절은 옛 계약과 대조되는 새 계약의 독특한 성격과 본질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전달해 준다.

 

옛 계약과 크게 대조되는 새 계약의 특징은 한마디로 내면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

그러나 그 계약의 당사자를 하느님 대전에 온전하게 세우는 것이다.

 

모세 계약으로 대변되는 옛 계약은 외적 측면이 두드러진다.

먼저 계약의 내용은 돌로 된 두 증언판에 기록하였다(탈출31,18 ; 34,28).

 

둘째 외적 행위로 주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에 촛점을 두고 있다.

물론 옛 계약은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된다'(탈출20,17)는 것처럼, 생각(마음)으로

탐욕을 품지 말라는 명령과 네 이웃을 네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고 그들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위19,17.18) 등의 내면적 명령도 포함된다.

 

즉 그 옛 계약이 비록 외면적으로 돌로 된 두 증언판에 새겨져 있고,

외적인 율법 준수를 강조하기는 하지만, 인간의 내면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것이 아니고,

내적인 거룩함과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계약 시대에는 주님의 법이 이스라엘의 마음 속에 새겨져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작용하여, 사람의 근본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역사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사도2장) 이전까지는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따라서 새 계약의 가장 현저한 특징으로, 주님의 법을 사람의 마음 속에 기록하여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그것을 지키게 하신다는 것은, 곧 성령의 전면적인 활동을

전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심으로써 새 계약을 세우셨고,

이것을 믿는 자를 성령의 인호로 영혼에 낙인을 주시어, 계약을 그와 더불어

이루어 가시는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써(사도1,4.5 ; 2,1-4), 새 계약이

계약의 당사자들 안에서 역동적으로 성취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새 계약의 당사자들은 결코 율법을 무용한 것이나

없앨 것으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이를 적극적으로 행하며 굳게 지키는 것이다(로마3,31).

 

이것은 인간적 의지와 결단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옛 본성을 부인하는 가운데

내적으로 주어진 성령의 능력을 따라 행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로마 8,4 ; 갈라 5,16.22.23).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새 계약을 그들의 살로 된 마음의 판에 새겨졌다는 것(2코린3,3)이

의미하는 바이다.

 

한편, 본문에서 '내 법' 에 해당하는 '토라티'(thorathi)의 원형 '토라'(thorah)

구약의 율법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와 동일하다(탈출24,12).

이런 점은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율법과 결코 무관하다거나 율법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점을 암시한다(마태5,17 ; 로마3,31 ; 야고2,26).

 

바오로가 갈라디아서 3장 1-14절에서 그토록 열변을 토하며 지적한 사실, 즉 율법의 행위가 성도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은 것은 성도를 율법의 저주에서 건지시기 위함이기에,

결코 옛 율법에 의지하여 구원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율법이 없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바오로가 반대하는 율법의 행위는 육신적 할례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절기 준수나 음식에 관한 규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왜곡된 구원관을

가르치는 유대교적 율법주의를 염두에 둔 것이다(콜로2,16.20-23).

 

구원이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율법은 거룩한 것이며,

신구약 시대를 막론하고 하느님의 백성들이 한결같이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 그 자체이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신약 시대 성도들에게 모세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돌판에 율법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낙인으로 사람들의 심령에 그 법을 새겼다.

이런 측면에서, 새 계약 시대의 성도들은 과거 옛 계약 시대의 이스라엘 집안보다

훨씬 더 주님의 율법을 잘 지키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로마13,8-10).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본문은 일차적으로 바빌론 포로 귀환 이후, 선민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긴밀하게 교제하게 될 것을 예언한다.

이러한 예언은 사실 옛 계약 때에도 주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었다(탈출6,7).

그러나 동일한 약속을 새 계약의 당사자들에게 다시 새롭게 주시는 것은,

옛 계약 시대의 백성이 그 약속의 축복을 완전하게 누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하느님께서는 옛 계약의 당사자들이 계약 준수에 실패한 것을 다시금 새 계약의 당사자들에게 주심으로써,

애초에 계약 백성을 통해 이 세상 가운데서 그려내고자 하셨던 원래 목적을 반드시 완수하고 말 것이라는

강력한 의지를 천명하고 계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마음의 법을 통해 주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그 계약 백성의 진정한 하느님이 되실 것이고,

또한 그들은 마음으로 주님께 순종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삶을 통해

자신들이 주님의 통치 아래 있는 하느님의 백성임을 나타낼 것이다(1베드1,14.15).

 

본문에서 '내 백성' 에 해당하는 '리 레암'(li leam)은 문자적으로 '내게 속한 백성으로' 라는 의미이다.

 

신약의 성도들은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웠다(사도11,26).

이 칭호는 원문상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라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근본적으로 본문의 '내 백성' 이란 표현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자신의 것인양 주장하는 자세를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며,

오직 하느님께 자신을 완전히 헌신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16,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마태16,21)

 

"죄를 끊어 버립니까?  끊어 버립니다."

이끌어 주소서~~~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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