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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서 槪觀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8-22 조회수1,585 추천수0 반대(0) 신고

 

 

 

로마서 槪觀
 
(로마1:1)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나 바울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 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특별한 사명을 띤 사람입니다. 

로마서는 아주 짧은 책입니다. 마음먹고 읽으면 30분이면 정독을 할 수 있는 그런 책입니다.  그러나 2,000년 교회사가 내어놓은 로마서에 대한 주석은 그 어떤 책보다 방대한 분량입니다.  로마서는 그 안에 심오하고 방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중요한 것은 로마서 안에 방대하게 숨어 있는 메시지가 전부 복음에 관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아오스딩을 비롯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이 로마서를 통해 회심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 로마서의 저자는 바오로입니다. 그리고 이 로마서의 원 수신자는 로마 교회입니다. 로마 교회가 정확하게 언제 생겨났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바오로가 브리스킬라와 아퀼라 라는 부부를 만나 귀한 사역을 함께 하는데 그들이 바로 로마 교회 교인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은 브리스킬라와 아퀼라가 로마의 글라우 디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에 의해 고린도로 피난을 온 사람들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오로를 만났을 때 이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이렇게 로마 교회는 로마서가 기록되기 훨씬 이전부터 로마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로마서의 내용을 보면 이미 로마 서가 기록될 즈음에는 많은 이들에게 칭찬과 존경을 받고 있던 교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오로는 이 로마서를 고린도 교회에서 썼습니다.  16장에 보면 바오로가 이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고린도교회 교인인 페베(Phoebe)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바오로가 그 편지를 쓸 때 묵었던 집 주인의 이름이 가이오고 기록이 되어 있지요? ‘가이오가 문안한다’ 

그 가이오는 고린도전서 1장 14절에 나오는 인물인데, 바오로가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 바오로에 의해 전도를 받고 회심을 한 인물입니다다.  뿐만 아니라 당시 고린도 지역의 재무관이었던 에라스도의 문안도 있는 것으로 보아 로마서는 고린도에서 기록이 된 것이 맞습니다. 

1929년 에 발견된 고린도 지역의 비문에서 당시 고린도 지역의 재무관이었으며, 공회당의 관장이었던 에라스도의 이름이 정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과 정황으로 보아 로마서는 AD57-58년 어간에 고린도에서 기록이 된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바오로는 AD52년 봄에 가이사랴와 예루살렘에 가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안디옥에서 겨울을 보냈습다.  그 후 AD53년에 에베소로 가서 3년간 사역을 합니다. 그리고 AD57년 말기에 고린도에서 석달간을 보냅니다.(행전 20:3) 

사도행전 20장 16절을 보면 바오로가 그 다음 해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힘을 썼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따라서 바오로는 58년 봄 오순절 이전 고린도에 석달 머물때 이 로마서를  쓴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오로는 이 로마서를 로마 교회에 전달한 것일까?  로마서 15장을 보면 그의 에페소 사역이 2년 이상 계속되고 그 성과가 주변 지역에 상당한 영향 을 미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선교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필요성을 느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15:22~24) 22 그래서 여러분을 찾아 가려던 나의 계획이 번번이 좌절되었습니다. 23 그러나 여러 해를 두고 여러분을 찾아 가려고 별러 온 나는 이제 이 지방에서 할 일을 다 끝냈기 때문에 24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여러분을 만나 잠시나마 함께 지내면서 즐거움을 나누다가 여러분의 후원을 얻어 그 곳으로 가게 되었으면 합니다. 
바오로는 로마에 가는 것이 그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로마를 지나 스페인 지역까지 가기를 원했습니다.  따라서 안디옥 교회와 같은 전도 활동 기지가 필요했습니다.  바오로는 당시 땅 끝이라고 여겨졌던 스페인으로 전도를 하러 가기 위해 로마 교회를 잘 교육하고 훈련시켜서 전도 활동 기지로 사용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24절에 보면 ‘여러분의 후원을 얻어 그 곳으로 가게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지요?  로마 교회를 선교의 근거지로 삼아 땅끝으로 가려했던 사도의 심중이 그대로 노출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20여 년간 가르 쳐왔던 복음을 로마 교회에 자세하게 설명을 함으로 해서 그들을 자신의 사역에 동참토록 준비시키려는 의도에서 로마서를 썼던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15장 30절 이하에 보면 사도바오로는 로마로 가기 전에 먼저 유대를 방문할 것이라고 하면서 불길한 징조를 예감한 듯 로마 교회에 기도 부탁을 합니다. 
(로마15:30-31)  30 형제 여러분, 나는 성령이 베푸시는 사랑을 믿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여러분도 나를 위하여 하느님께 간곡히 기도하여 주십시오. 31 내가 유다에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화를 입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는 구제금이  그 곳  성도들에게 기쁜 선물이 되도록 기도하여 주십시오. 
 
결국 바오로는 로마 교회에 가지 못하고 사슬에 묶인 죄인이 되어 로마로 향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 바오로가 예루살렘에서의 불길 한 일을 예감하고 혹시 자기가 어떻게 되더라도  로마 교회가 자신의 유지를 따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복음의 중심이 되어주기 를 원하는 마음에서 거의 유언장처럼 비장한 마음으로 이 편지를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로마서는 사도 바오로가 마치 유언장을 쓰듯 장엄하게, 복음의 핵심을 목숨 걸고 총력을 기울여 기록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로마는 바오로 사후에, 로마가 전쟁용으로 구축해 놓은 2,800km에 달하는 비아 아피아(via apia)를 통해 복음을 세계로 흘려보내는 역할 을 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의 수도라  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고,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비아 아피아 (via apia)가 잘 발달 되어 있었습니다. 그 도로로는 전투용 전차 두 대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길이었습니다. 그길로 바로 사도 바오로가 자신의 피를 짜서 기록을 한 이 로마서의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하느님의 역사는 참으로 신묘막측하지요?
이 로마서의 핵심 단어를 세 가지로 추리면 ‘의(디카이오오), 구속(아폴리트로시스), 화목 제물(힐라스테리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로마서를 공부하는 내내 그 ‘하느님의 의’ 와 ‘성도의 구속’ 과 ‘화목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 에 대해서 확실하게 공 부를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먼저 이 로마서가 어떤 구조로 ‘의’와 ‘구속’과 ‘화목 제물’이라는 중요 주제를 설명하고 있는지 로마서의 전체 구조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마치겠습니다.
로마서는 바오로가 자신을, 복음을 위해 선택함을 입은 사도로 소개하면서, 사도가 전할 복음은 하느님이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 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1:2)는 말로 시작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전개될 사도의 복음의 핵심은 약속을 따라 세상 에 오신 ‘아들’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전체를 꾹 짜서 한 덩어리로 만들면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라는 이 야기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느님의 능력’(1:16)이라고 말합니다.

 1장 17 절에서는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 될 수 있는 것은, 복음에는 하느님의 의가 나타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에 나타난 하느님의 義가 인간을 의롭게 하기 때문에 누구든 하느님의 의를 믿는 자는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 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그 이야기를 3장 21절에서 한 번 더 반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왜 인간들에게는 자신들의 의가 아닌 하느님의 의가 필요한지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을 합니다.
  

하느님의 의를 믿는 자는... 자신이 불의한 존재이고 하느님 의 심판이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하지만 인간은 순순히 자신의 불의를 인정하지 않고 하느님의 의를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여  자기 스스로도 의를 행할 수 있다고 여기는  교만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하느님의 진노가 불의에 대해 하늘로부터 나타난다는 것을 말하고(1:18)  왜 세상의 모든 인간이 불의 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말합니다(1:18-31).

 

 즉 사도는 하느님의 의가 구원의 능력이 됨을 선포하고, 그누구도 하느님의 의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말하기 위해 모든 인간을 불의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 후, 결국 하느님의 진노는 불의한 세상에 대한 정당한 조치임을 설명합니다(2:5-8).

 
아울러 인간의 불의함은 유대인의 율법으로 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자세하게 기록을 해 나갑니다.  이방인들은 양심이 있는 자로 죄를 범하는 존재들이고 유대인들은 율법이 있 는 자로 죄를 범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도 이방인과 다를 바 없이 하느님의 진노에 속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2:12절부터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3장4절에서 사람은 다 거짓되다는 선언을 합니다.그러므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으며(3:9), 따라서 세상에 의인은 없고 오직 죄인만 있을 뿐임을 3:10-18에서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3:19-20까지에서 유대인들이 율법을 오해했음을 말합니다.  로마 교회의 구성원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지만 그 속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꽤 있었거든요.

사도는 율법이 인간의 입을 막고 온 세상이 심판 아래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한 기능으로 주어진 것이지 인간을 의롭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그리고 다시 1장 17절에서 선포했던, 복음의 핵심인 하느님의 의에 대해 말하고, 인간은그 의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을 3:21-31에서 확언합니다. 이것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거기에 대한 예로 4장에서는 유대인들의 위대한 조상인 아브라함을 얘기하면서  아브라함도 하느님의 약속을 믿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지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이 시키시는 일을 잘 해서 그 대가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 이 아니라  그저 약속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의로운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5장에서는 하느님의 의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  하느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말합니다즉 믿음으로 의로워진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5장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과의 평화입니다(5:1). 

모든 인간은 그들의 불의함으로 인해 하느님과의 평화가 깨어진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하느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의가되심으로 그 의를 믿는 믿음의 사람에게는

하느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신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할 수 있으며, 믿음으로 인해서 환난 중에서도 인내하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5:2-4). 

이것은 법의 세계가 아닌 놀라운 은혜의 세계입니다. 이 은혜의 세계를 가능하게 한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신자는 예수님의 은혜를 더 욱 풍성히 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은혜는 인간의 불의와 죄의 현장에서 더욱 풍성히 드러나게 됩니다(5:20). 

그래서 사도는 한 사람으로 인해서 세상에 가 들어왔고, 그 죄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으며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르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그 5장 후반부의 단락을 시작하는 것입니다(5:12).  사도는 이렇게 반복하여 인간의 죄를 지적하고 설명을 합니다.

우리가 주의해서 읽어야 할 것은, 사도가 앞부분에서 죄를 말하는 것은 왜 인간은 하느님의 의가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인가 를 말하기 위해서이고5장에서 다시 죄에 대해 언급하면서 모든 인간이 사망에 이르렀음을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 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가 은혜의 풍성을 드러낸다고 해서 고의로 죄에 거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6:1). 왜냐하면 하느님과 화목된 관계에 있는 신자는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느님에 대해 산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6:11). 

하느님에 대해 산 자들은 더 이상 자신의 행위와 업적과 공로에 가치를 두지 않게 되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의 유무 나 다소에 따라 은혜가 더 많이 부어지거나 적게 부어진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하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 죽고 하느님에 대해 산 자들은 하느님 앞에서 죽은 흙임을 자각해가는 과정 속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하며 살 것 이 아니라 자신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느님께 드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해 들어가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6:13). 물론 그것도 하느님께서 주도하시는 일입니다. 

사도는 신자가 더 이상 죄에 매이지 말아야 하는 것을 7장에서 남편이 죽어서 다른 남자에게 시집간 여인으로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즉 신자는 죄로부터 해방되어 예수께 속한 자로서, 죄의 열매가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 열매를 맺는 존재라는 것입니다(7:4).


노파심에서 말씀 드립니다만 성경에서의 죄란 단순히 사건화 된 도덕적 윤리적 사회법적 위반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지어진 인간이 자기주장, 자아 숭배, 자아실현, 자아확장’의 삶을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죄에서 해방 이 된다는 것은 자아 숭배에서 해방이 되어 자기 부인의 자리로 내려가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 운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에게서 여전히 죄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실존적 경험을 통해서도 이미 증명 이 된 것이죠.  그렇게 죄의 세력은 신자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즉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죄로부터 완전 히 벗어난 존재가 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도 여전히 죄 가운데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가 7장에서 다시 죄 를 언급하는 것은, 믿음이 있는 신자의 안에서 여전히 죄가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는 실상을 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6장까지 에서는 인류의 보편적인 죄에 대한 지적과 하느님의 은혜라는 해결책에 관한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7장은 이미 죄의 문제에 서 해결을 받았다고 하는 신자들 안에서 꿈틀대는 죄의 문제에 대한 기술인 것입니다. 

 

사도는 7:15-23에서 마음은 선을 원하는 데 원하는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것이 신자의 실상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실존적, 경험적 모 습 아닙니까?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불가능하며 추악한 죄인인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이러한 자기 실상을 보게 하고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7:24)는 고백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고백과 함께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바로 그 자리가 죄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자리인 것입니다.  

자신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의지해 야 한다는,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필연성을 자각하고 그 은혜를 의지하게 되는 그 상태가 바로 하느님 의존의 상태니까요.
 
이처럼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은 자신이 죄로 인해 죽은 자임을 실감하는 현장에서 생생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단죄함이 없다(8:1)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하느님의 ‘은혜’는 자신이 죄로 인해 죽은 자임 을 실감할때 선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가 죄를 언급할 때마다 그 의미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가 죄를 언급하는 것은 단지 ‘인간은 죄인이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하느님이 베푸신은혜가 어떤 것이며, 인간이 하느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때그때 죄에 대해 언급을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화목된 관계에 있게 되었지만, 문제는 여전히 죄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육신에 이끌려 육신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의의 무기로써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길을 스스로의 힘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 측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을 보내십니다. 성령이 함께 함으로써 육신의 생각이 아니라 영의 생각으로 살게 하시고 하느님 의 의에 소망을 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이기 때문에 사도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8:9)고 말합니다.

 

신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보내셔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의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됩니다(8:15). 또한 그 사랑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됩니다 (8:17). 그러나 고난 중에도 낙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현재의 고난이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8:18). 

오직 성도만이 고난을 영광의 전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성령에 의해서. 그러한 하느님의 사랑 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이 있는 신자는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8:38-39).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한 신자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해서 하느님과 화목의 관계에 있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하느님의 선택과 유기의 교리가 등장합니다. 이러한 신자는 자기자신이 하나님을 선택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의한... 하느님의 선택의 결과라는 것 입니다. 하느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사오는 미워하였다’(9:13)고 하신 것처럼 이미 작정된 일입니다. 

인간의 자질과 조건, 그 리고 인간 측에서 내어 놓은 선을 따라 택하신 것도 아니고 자녀로 삼으신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하느님의 선택과 유기에 대해 하느님이 불의하다고 반문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천국에 가는 것이 마땅한 자를 지옥 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불의한 존재이지만  그 안에 택한 자가 있고 그들을 세워서 하느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의 풍성함을 드러내는  그릇으로 삼은 것입니다.그 그릇이 하느님이 택한 남은 자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방인 중에도 있습니다(9:20-28).
 이처럼 신자는 이미 나기도 전에 택하심을 따라 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신자 됨에 대해서도 자기 의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다만 ' 자비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하고 싶은 사람에게 동정한다' 하느님의 은혜일뿐입니다(9:15). 이처럼 신자는 끝까지 자신의 공로를 내세울 수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신자는 하느님의 영광과 능력과 그분의 속성과 하신 일을 드러내 는 그릇에 불과한 존재입니다그렇다면 신자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하느님의 열심에 의해 격발이 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신자가 자기의 업적과 공로를 스스로 챙겨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가 신자의 믿음을 가리 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그 진술은 두 가지 측면에서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인데,   하나가 신자의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와 실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능력이라는 것이고다른 하나가 신자의 믿음이 어떻게 현상화 되어 나타나는가, 입니다. 

 

사람들이 첫 번째 메시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데 두 번 째 메시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신자 안에 들어 있는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고 그 선물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실상이나 증거로 현상화되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쉽게 말해서 눈에 보이는 업적이나 공로나 열심 등으로 사람들의 믿음을 판단하거나 판별할 수가 없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기도를 저렇게 많이 하니까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는 둥, 저 사람은 저렇게 착하게 살기 때문에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는 식의 판단을 인간 측에서 내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려는 사람들이 그 믿음을 사용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얻어내려 하는 엉터리 신자들인 것입니다.

 믿음 예수와 십자가의 필연성 앞에 납작 엎드려 항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오심과 그분이 지신 십자가는 누가 참된 하느님의 백성인가를 가려내는 하느님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참된 백성이라고 여겼지만, 사실 하느님의 백성은 아브라함의 씨가 아니라 이사악, 즉 하느님의 약속으로 선택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로마서 10장에서 아주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민족적 이스라엘은 하나의 모형일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민족 자체가 훌륭하고 사랑받을만해서 선택이 된 것이 아니라 이삭의 후손, 즉 하느님의 은혜 에 의해 선택이 된 하느님 나라 백성들의 모형으로 이스라엘이 선택이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에 의해 선택이 되어 모형으로 쓰여진 이스라엘이 복음 앞에서 버려지는 일이 생기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을 모두 버렸다는 것은 아닙니다(11:1).이스라엘 안에도 하느님의 택하심을 따라 남은자가 있습니다(11:4). 이 부분을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민족적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해석을 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건 정말 큰 오해입니다. 

그 말씀은 이스라엘 안에도 남은 자가 있어서 이스라엘이 전부 집단적 유기의 상태에 던져진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방인 가운데도 역시 택함을 받 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1:5). 

그런데 누가 하느님이 택하신 참된 백성이냐는 것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증거 됩니다 (10:13).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자기 영광을 추구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성령에 의해 자기의 이름을 잃어 버린 자들, 즉 자기부인의 과정을 통과하게 되는 자들이 자기 이름이 아닌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자들이 바로 하느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속으로 ‘난 여전히 이렇게 내 이름을 부르며, 내 이름을 위해서만 살고 있고, 나의 영광만 을 위해 살고 있는데, 그럼 난 가짜인가?’하고 생각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만 부르고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것은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목적지를 향해 한발 한 발 인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게 자기부인의 삶인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왜 주님 이 구원의 능력일 수밖에 없는가를 알았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이 택한 남은 자이고 그리스도 의 영이 함께 한 참된 백성입니다.

이제 신자는 하느님의 의로 구원 받은 자로써 의의 정신을 세상에 나타내야 합니다. 그것이 이웃 사랑이고 그것을 몸으로 드리는 산제사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12장 전체의 내용입니다. 

사도는 12장 전체에서 구원 얻은 하느님의 백성의 삶이 어떤 삶으로 지향되어 지는 지에 관해 설명을 합니다. 새 마음으로 사는 새사람은 성령으로 사는 삶을 지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성도가 사회와 정부에 대하여 어떠 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줍니다. 성도는 사회나 정부나 개인에 대해 친히 원수 갚아서는 안되고 하느님의 진노하심에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12:19)
그게 바로 성령 받은 자에게서 서서히, 그러나 필연적으로 격발이 되게 되는 성경적 의미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자신만을 향해 있던 사랑을 자기부인의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놓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하느님과 이웃에게로 방향전환이 되어 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자기 밖으로 향하는 사랑이 신자에게서 나타나야 할 믿음의 열매이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그게 13장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이러한 믿음과 사랑 안에서 서로 문안하는 관계임을 말하는 것으로 로마서 를 끝내고 있습니다.

 
어떠세요? 로마서 안에 복음의 핵심 교리와 성도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모두 나와 있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끈질긴 사랑과 그 사랑을 알게 된 자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말세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깊이 자성하는 시간도 될 것입니다.
 

성경의 진의를 잘 살펴 행복한 하느님의 자녀 되길빕니다.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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