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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원칙대로 하셨더라면 (로마 1: 16- 17)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8-26 조회수2,201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

 원칙대로 하셨더라면

로마서 11617

16 나는 그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들에게, 그리고 이방인들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17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성서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 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은 도덕과 윤리와 사회법 아래에서 원칙을 지키는걸 정의라고 하죠 맞습니까? 도덕과 윤리와 사회법 아래에서 원칙을 지키는게 정의 맞아요 그런데 혹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원칙대로 인류를 취급하셨다면 인류는 어떻게 됐을까요 하느님께서 원칙대로 했다면 여러분은 다 죽어야 됩니다.

먹으면 죽는다 라는 그 말은 내 말대로 살지 않는 자는 다 죽인다라는 말이거든요 피조물 중 누가 창조주 하느님의 말대로 살아낼 수가 있어요? 피조물이 하느님에 말대로 살아낼 수 있는 자는 하느님 밖에 없어요 그런데 하느님이 세운 원칙은 단호합니다. '안지키면 죽는다'에요 그게 구약 율법입니다 이 진퇴양난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담과 하와가 생겨나기도 전에 이미 창세전 언약이 체결됐던 거에요 그게 에페소서 1장입니다 창세전에 하느님에 자해의 시나리오가 창세전에 이미 작성이 된 거에요 하느님이 죽어서 정말 죽어야 할 그러한 자들이 살아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에 예요 디카이오수네 사다크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희생되심으로 없음에 자리에서 그렇게 죽은 흙으로 존재해야 하는 우리가 있음에 상태로 새롭게 창조가 되었다라는 그 엄청난 구원에 현실을 인생과 역사와 육신속에서 체험을 하고 면목없고 미안한 마음으로 그러나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 절대 의존자에 자리로 한발 한발 가는게 바로 성도에 신앙여정인 거에요

하느님 절대 의존자라는건 나는 내 힘으로 요만큼에 그 어떤 공로로도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없네요를 고백하는 자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결국에는 하느님 당신에 나라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옵소서 라는 절대 의존에 고백을 하게 되는 거에요

 

하느님 여태까지 내가 강도짓도 하고 도둑질도 하고 남을 밟기도 하고 하여튼 죽을힘을 다해서 행복에 도달해 볼려고 했는데, 하늘에 도달해 볼려고 했는데 그 어떤 방법으로도 안되네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요? 하느님 당신 나라 임할때 나좀 기억해 주세요 이 방법밖에 없는 거에요 그걸 성도에 의라 그래요 그게 디카이오수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정말 예수를 죽인 자라는 진심어린 자각이 있어야 돼요. ? 예수님이 자신에 죄가 되셔서 죽으셔야 했는지를 처절하게 삶 속에서 경험을 하고 인정해야 된다 말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이 세상에서 자신을 개발하고 변화를 추구하여 하느님도 놀랄만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걸 목적으로 하여 사는게 아니라 원래 없음이여야 했던 자신에 처음 자리와 그걸 덮으신 하느님에 자비와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알아가는 걸 목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영생은 착하고 훌륭하게 사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하느님과 그에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거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에요 그게 영생이에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를 히브리 원어로 번역하면 그거 하바꾹에서 인용한거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은 그 의 그걸 가진 자만 산다란 뜻이란 말입니다 착하게 살면 의인되는거고 그러면 산다 이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믿음으로 만들어진 그 의 가진 자만 천국에 들여보내주겠다라는 그런 뜻이란 말이에요 그 말은 그 의 이외에 다른 의는 전부 폐기 처분시켜 버리겠다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하느님은 이 세상에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고 말씀을 하신 거에요 그건 어느 시점 제한된 고 시점 고 안에서만 없다는 뜻이 아니라 전 역사를 아울러 하나도 없는 거에요 해 아래에, 그런데 해 위에서 한분이 내려오셨죠 예수. 그분만 의인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진술하는 바에요.

 

로마서 310절 보십시오 성서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올바른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노바디 (시편 14:1-3, 53:1-3; 전도 7:20.)

전도서 720사람이 제아무리 착하다 할지라도 좋은 일만 하고 나쁜 일 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이렇게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이신 그분에 말씀을 온전히 다 지켜낼 수 있는 피조물은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야고보는 다 지키다가 하나라도 어기면 다 어긴거다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다 죄인 맞죠 그 상태를 불의라 그래요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피조물은 죄를 지어서 불의한게 아니라 하느님에 도우심이 없이는 그 어떤 존재도 의에 상태가 될 수 없는 거에요 죄를 지어서 불의한게 아니에요 그것을 바오로가 이렇게 기록합니다.

로마서 320절 보세요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아무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줄 따름입니다.

육체에 행위 율법에 행위로는 하느님 앞에 의로 갖고 나갈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이사야가 인간에 최고에 의를 뭐라 그래요 더러운 옷 그 단어는 필티 렉이라 그랬죠 똥걸레에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걸레. 걸레 중에서도 그게 인간에 최고에 의라 그래요 이사야가, 인간쪽에서는 그 어떤 열심과 노력을 내어 놓은다 할지라도 하느님 앞에서 의로 인정이 될 수 없다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받으실 만한 의를 성취하셔서 왜 그분은 하느님이기 때문에, 의를 성취하셔서 하느님에 백성들에게 인퓨테이션 전가를 시켜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거죠 그게 인카네이션이에요 성육신

 

마태복음 313-15절 보십시오 그 즈음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오셨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게 오십니까?" 하며 굳이 사양하였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은 예수께서 하자 하시는 대로 하였다.

모든 의가 이루어지는 현장이에요 지금, 모든 의를 이루자... 어떻게? 나를 세례를 줘 그러면 모든 의가 이루어진다 지금 이 이야기하고 있죠 모든 의.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바로 그 장면이에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요한에 세례는 회개에 세례죠 그 말은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죄인들에 자기 인정에 자리란 뜻이에요 그게 세례 요한에 세례의 자리에요 세례는 연합이죠 세례는 연합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요한에 세례를 받으세요 그건 예수님께서 죽어야 할 죄인들과 연합을 하시는 장면이라 그랬습니다. 굳이 안받아도 되는데 우리 같은 죄인이 되셔서.. 예수님이 우리에 죄가 되셨고 ..우리에 저주가 되셨다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에 죄가 되시는 그 장면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이란 말이에요 우리와 연합되어지는 장면이에요 거기가.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세례를 받아야 하느님에 모든 의가 이루어진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에요 15절을 보다 원문에 맞게 번역을 하면 가르가 있어요 그 앞에 왜냐하면 번역성경은 이 단어를 자주 빼먹어요

 

왜냐하면 이렇게 해서 모든 의를 이루는게 우리에게 적합한 것이다. 란 뜻이에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그렇게 예수님께서 저주에 홍수에 빠져 죽으시고 그 품에 안긴 은혜로 말미암게 되는 하늘에 백성들이 의인으로 살아나게 되는 그것이 바로 모든 의가 이루어지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세례를 받는 방법밖에 이 모든 의가 이루어지는 길이 없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모든 의에요

그러한 하느님에 의에 인간들이 보탤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라는 의미에서 모든 의에요 예수님이 모든 의를 다 성취하세요 그럼 인간이 거기에 뭘 보탤 수 있어요? 없어요 그래서 모든 의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 모든 의는 영 단번에 성취가 될 것이다 라는 의미에서 모든 의를 이루다가 부정과거시제에요 헬라어에 부정과거 시제는 영 단번에 일어나 영원히 영향을 미치는걸 부정과거 시제로 표현한다 그랬잖아요

거기에서 의를 이루다에서 쓰인 그 헬라어 프레르오라는 동사는 플필이라는 의미거든요 그러니까 완전히 한번에 꽉 채워지다란 뜻이죠 풀필 그게 부정과거 시제란 말이에요 완전히 한번에 꽉 채워지다 빈틈없이 채워지다 그게 하느님에 의에요 그 의를 감사함으로 면목없이 받아들이는걸 인간에 의라고 그래요

 

여러분이 성경에서 보시다시피 에 주인 그 의에 주체는 하느님 한분뿐이세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의를 이루셨어요 그 말은 이 땅에 그 어떤 의도 다 쓰레기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모든 의를 예수가 이루시는 거에요 잘 새겨들으셔야 돼요. 착한일을 하지 말라는게 아니에요 착한일 많이 하세요 그러나 착한 것과 의로운 것은 다른 것임을 꼭 잊지 마세요 그리고 하느님은 착한 일을 보시고 구원을 하는게 아니라 의를 보고 구원하신다라는 걸 잊지 마세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예수님에 십자가가 의에 모든 것이였어요 나에게 세례를 베풀어 그래야 모든 의가 이루어지는 거야, 십자가잖아요 세례 자체가 그게 의에 모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진짜 의에 현장 그

인간들에 의는 그 어떤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양을 하고 있더라도 그 중심에 항상 자기가 있어요 하느님은 그걸 죄라 그래요 바오로는 그러한 의를 율법에 의라고 불렀어요

 

필립보서 34-6절 보세요 하기야 세속적인 면에서도 나는 내세울 만한 것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세속적인 것을 가지고 자랑하려 든다면 나에게는 자랑할 만한 것이 더 많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났으며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 사람 중의 히브리 사람입니다. 나는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파 사람이며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나는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흠이 없는 의인이였대요 흠이 없는 의인 그런데 그 의가 율법에 의래요 사도 바오로는 그러한 자신에 모습을 로마서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율법에 의를 가지고 아주 흠없이 열심히 살았는데 그 열심이 어떠한 열심이였는지 보세요

로마서 103 그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을 깨닫지 못하고 제 나름의 방법을 세우려고 하면서 하느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힘써서 흠없는 삶을 열심히 살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하느님에 의를 등지고 힘써서 반대 방향으로 달리더라는 거에요 그게 율법에 의에요 착하게 살았어요 하느님을 위해서 목숨건 사람이에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열심이 하느님에 의를 등지고 열나게 반대방향으로 달리던 열심이였다라는 거에요 율법에 의입니다 의인은 의로운 행위를 해서 의인이 되는게 아니에요 그걸 율법주의라 그래요 하느님은 그러한 바리세인들에게 독사의 새끼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리고 니네 아비는 마귀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말은 니네들 다 마귀새끼다란 뜻이에요 율법에 의로 최선을 다해서 산 사람들에게 율법에 의인과 하늘에 의인은 완전히 달라요 하늘에 의는 예수의 의가 우리에게 거져 전가되었다라는 것을 믿는 믿음에 의해 규정되요 그게 하늘에 의인이에요

 

로마서 109절 보세요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어떻게 의에 이뤄요 믿어서요 뭘 해서가 아니에요 믿어서, 하느님은 인간 측에서 내어 놓는 그 어떤 모양의 착한행위도 의로 받아주시기 않으세요.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자 이러한 말씀에 근거해서 위에 제가 열거한 그런 자타가 공인하는 세상에 영웅들 그 의인들에 삶을 그거 의 아닙니다 라고 부정할 때 그게 의가 아니구요 예수를 믿는 믿음이 의입니다 예수가 의를 완성하셔서 그분이 우리에게 선물해 준 그 의를 그냥 면목없이 받는 게 의입니다 라고 그들앞에서 이야기를 할때 세상이 그 이야길 하는 자를 어떻게 취급할까요 너 미쳤니 그럴 거에요

 

고린도 전서 132.3절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보세요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구제를 하고 자신의 몸을 불살라서 공익을 구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전부다 헛거라는 뜻이에요 그 말은 다른 말로 예수님의 사랑을 입지 않는 자들의 삶 속에서도 자신의 전 제산을 기부하는 행위와 심지어 세상을 위해서 분신도 서슴치 않는 그런 위대한 행위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하느님은 그걸 카운트 안해준다는 뜻이에요

예수와 관계없이 하는 그런 일은 하느님이 카운트 안해준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걸 본받겠다고 하는게 오늘 날 건강한 교회라는, 그런 교회들이 행하는 작태들입니다 자기들이 세상을 정화할 수 있다는 거에요 예수의 사랑을 입은 자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아닌 인간들이 자신들에 열심과 노력과 의지를 근거로 내어 놓는 모든 것은 다 헛것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 어떤 것도 그들이 천국가는데에 유익으로 쓰이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인간들은 그렇게 자신들에 의를 부정당하면 자신의 의를 부정하는 진짜 의를 부수고 죽일려고 해요 왜 난 선악과 따먹고 지금 하느님처럼 되었는데 누가 감히 내 자존심을 건드려 죽이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리세인들이 예수님을 그래서 죽은 거에요 그들에 제사와 율법을 인정해 주지 않으니까 그들에 착한 삶을 인정해 주지 않고 걸핏하면 뱀새끼 독사새끼 욕을 하니까 기분 안나쁘겠어요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12절 보세요 우리가 카인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카인은 악마의 자식으로서 자기 동생을 죽인 자입니다. 그가 동생을 죽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동생이 한 일은 옳은 일이었는데 자기가 한 일은 악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의로움이 디카이오 수네에요 착하서 죽인거 아니에요 이 말은 아벨이 착해서 죽였다는 말이 아니라 아벨이 하느님에 은혜만을 의지하는 것이 꼴보기 싫었다는 뜻이에요 아벨은 당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양을 키우던 사람입니다 그때 당시에는 고기를 먹던 시절이 아니라구요 고기는 노아의 홍수 이후에 허락된 거에요 그때에 양이라는 짐승이 쓰일 곳은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가죽옷을 만드는거 뿐이였어요 그러니까 아벨은 자기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입고 있던 그 가죽옷에 의미를 알고 있는 자로 등장한 거고 어차피 대표에요 모형이에요 카인은 그 의미를 모르고 자신에 힘과 가치를 향상시키고 쌓아 올리는 데에만 집중하여 살았던 자로 등장하는 거에요

 

히브리서 114절 보세요 아벨은 믿음으로 카인의 것보다 더 나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그 믿음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그의 예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죽은 후에도 여전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잘 보세요 아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거에요 제사를 지내서 의로운게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자 그에 제사가 하느님께 바쳐지게 되는 거지 그에 제사로 그가 의롭게 된게 아니란 말이에요 여기서는 믿음이 주어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 믿음은 하느님에 선물이죠 그 믿음이 아벨에게 들어오자 아벨이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 그러죠 성경을 잘 보세요, 그 증거가 뭐였냐 하면 아벨에 죽음이였어요 믿음으로 아벨이 의인이 되어서 의인에 삶을 사는데 그에 삶에 그가 의인이라는 증거가 나타났어요 그런데 그 증거가 뭐냐하면 카인에게 맞아 죽은 거라니깐요

여러분이 여기에서 그 증거라는 단어에 주의를 집중하셔야 돼요 그 단어는 헬라어 마트리오를 번역한 단어인데 증인이 되다라는 뜻이에요 증인이 되다 그 단어는 마티스 증인 순교자죠 영어도 똑같해요 순교자죠 증인이에요 그게 그 증인이에요.

 

오늘날 이렇게 인간들에 행위를 강조하고 인간들에 이 세상에서의 삶에 그런 세상적인 복을 강조하고 하는 이런 곳에서 그거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떠나야 되는 거고 우리는 나그네로 살아야 되는 거고 여기에서는 우리가 오히려 죽어서 하느님에 그 의를 받아 하느님 나라로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느님에 의만 의지해야 됩니다. 십자가만 의지해야 됩니다 피만 의지해야 됩니다 그러면은 교회가 뭐라 그러냐 하면 이런 행동없는 양심 여러분 진짜 그렇게 하느님에 의를 의지하면 행동이 없어지나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에 십자가에 의만을 의지하게 되면 자기를 향하여 쏟아 붓던 사랑이 밖으로 터지게 되기 때문에 그 사람 속에서 진짜 선함이 나와요 그래서 두 증인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곳에서 맞아 죽는 거에요 그들이 어디에서 다시 예언했다 그래요 다시 예언했다라는건 니네들이 알고 있는건 틀렸어 이게 진짜 복음이야 이렇게 전했다는 뜻이죠 그게 다시 예언이죠 어디서 성전에서요 성전은 당시에 딱 한군데 있던 교회입니다 거기에서 니네들 다 틀렸어 예수 믿어야돼,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야 이거 부셔 3일만에 내가 다시 지을 거야 그 성전은 뭐였어요 3일만에 살아나실 예수 당신을 이야기한 거다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성경은 일관성있게 예수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라는 단어가 히브리서 1139절과 40절에서 잘 설명이 되요 한번 보고 갈까요 39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40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더 좋은 것을 마련해 두셨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제쳐놓고는 결코 완성에 이르지는 못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39절 보시면 믿음의 조상들을 총칭하는 이 사람들이 나오죠 히브리서 11장에 거론된 모든 사람들 믿음의 조상들입니다. 구약에 하느님에 백성들 그들. 그들이 전부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다 그러죠

아벨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는데 그 증거가 뭐였냐 하면 맞아 죽는 거였어요 그런데 그걸 다 뭉뚱그려서 이 사람들이 전부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다 그래요 그런데 이 말이 어디에 붙어 있는 거냐면 바로 고 윗구절을 한번 읽어 드릴께요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고 채찍으로 얻어맞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여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였습니다. 37 또 돌에 맞아 죽고 톱질을 당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몸에 두르고 돌아다녔으며 가난과 고난과 학대를 겪기도 했습니다. 38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살 만한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로 헤매며 다녔습니다.

이게 믿음의 조상들에 인생에 나타났던 의인됨에 증거에요 고난입니다 죽음이에요 믿음이 그분들을 증인 순교자로 만들었다는 거에요 그런데 그들이 약속을 받지 못했다 그러죠 약속이라는 것은 미래에 주어질 어떤 것에 대한 보증이죠 그죠 아직 오지 않은 거 보지 못한 것 그것을 보증해 주는게 약속이잖아요 그런데 구약에 수많은 예언자들이 뭘 약속하고 왔어요 올거야 올거야 뭘 예수. 그러니까 약속에 실체는 누구에요 예수.

 

마태복음 2333-36절 보세요 33 이 뱀 같은 자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지옥의 형벌을 어떻게 피하랴? 34 나는 예언자들과 현인들과 학자들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그러나 너희는 그들을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십자가에 매달고 또 더러는 회당에서 채찍질하며 이 동네 저 동네로 잡으러 다닐 것이다. 35 그래서 마침내 무죄한 아벨의 피로부터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된 바라키야의 아들 즈가리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서 흘린 모든 무죄한 피 값이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 36 분명히 말해 둔다. 이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이 이 세대에 내리고야 말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의인으로 온 자들은 전부 맞아 죽었어요 어디서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거기가 어디에요 교회에서요 세상은 교회에게 관심이 없어요 항상 잘못가던 교회가 진짜 교회를 때려 죽이는게 교회의 역사였다니깐요 늘 올바른 이들은 소수였어요 그러면 그렇게 이제 십자가에서 약속에 실체가 오셨어요 우리는 그 약속에 실체를 받은 사람들이죠 2천년전에 역사속에서 실제로 십자가가 섰고 그것이 이렇게 명확하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우리는 실체를 받은 겁니다 그러면 인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돼요 인제 망고 땡인가요 여러분 십자가에서 그 바통이 다시 교회에게 주어져요 예수로 부터 이 교회는 그러면 그걸 들고 어디로 달려가야 돼요? 재림 예수에게로 또 달려가는 거에요 한번 보세요

사도행전 18절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또 나오죠 아 이제 다 됐잖아요 구약의 성도들이 증인의 삶을 다 살아서 예수님에 십자가가 뭔지를 그들에 삶으로 보여줬잖아요 그런데 뭘 또 살아요 그런데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통을 주신다니깐요 너 똑같이 증인의 삶을 살아야되 달려 그러는 거에요 달려.......

 

디모데후서 46-8절 보세요 나는 이미 피를 부어서 희생제물이 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가 왔습니다.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날에 정의의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월계관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의에 면류관을 약속으로 받은 바울이 의인됨에 증거를 갖고 자신에 인생 내내 달렸어요 의에 면류관은 이미 창세전에 받은 거에요 그러니까 의에 면류관을 약속받은 자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된다 증인됨에 바통을 들고 달리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걸 들고 달리면 세상이 반드시 그를 죽여요 정확하게 찾아내요 정확하게 귀신들이 정확하게 찾아내요

 

바오로가 그렇게 육신에 죽음 앞에서 그 상태를 달려갈 길을 다 마친 상태라 그래요 그런데 그 달려감이 어떤 특별한 사람들에게 특별하게 주어지는게 아니라 모든 하느님에 성도 에 면류관을 약속받은 모든 하느님에 성도들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그러한 것이라고 바오로가 확고하게 이야기를 해요 그 육적 자아에 죽음에 질주는 모든 교회가 다 달려야 된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내게만 아니라 주에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라고 이야기 하는 거에요 모든 자에게 성도 모두에게 그 죽음에 질주가 허락된다 말입니다 그건 매일 같이 죽는 죽음에 질주에요 그래서 사도 바오로가 그렇게 달려가는 자기에 인생길을 날마다 죽는 삶이라고 하는 거에요 성도는 그 바통들고 죽어라고 달리는데 달리면서 하느님이 그를 죽여가요

 

고린도전서 1531절 보세요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을 나의 자랑으로 생각하며 이 말씀을 드립니다. 나는 날마다 죽음의 위험을 당하고 있습니다.

죽어라고 달리고 있는데 그게 죽음에 길이에요 그게 달려가는 자에 삶이며 믿음에 증거를 가진 자에 삶이며 증인됨에 바통을 들고 뛰는 자에 삶인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도 복있는 자여 너희들은 의를 위하여 팝박을 받는다 라고 하는 거에요

 

마태복음 510절 보세요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산상수훈을 전부 감탄문이에요 복있는 자여 에페소서 1장에서 그러죠 하느님께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너희에게 복 주셨다 그러죠 과거 완료에요 에페소서 1장에서 그런데 그 복을 받은 자여 너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된다 의를 선물받게 되는데 그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게 된다 이야기하는 거에요

인간은 뭐냐고 이 세상은 뭐냐고 뭐에요 다 불탈거지 그래서 성경이 의인들이 모여있는 교회를 나그네의 무덤 피밭 아겔다마라고 하는 거에요 피밭 여긴 피밭이에요

마태복음 273-10절 보세요 3 그 때에 배반자 유다는 예수께서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자기가 저지른 일을 뉘우쳤다. 그래서 은전 서른 닢을 대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돌려주며 4 "내가 죄없는 사람을 배반하여 그의 피를 흘리게 하였으니 나는 죄인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알 바 아니다.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5 유다는 그 은전을 성소에 내동댕이치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 6 대사제들은 그 은전을 주워 들고 "이것은 피 값이니 헌금궤에 넣어서는 안 되겠소." 하며 7 의논한 끝에 그 돈으로 옹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8 그래서 그 밭은 오늘날까지 "피의 밭"이라고 불린다. 9 이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 "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정한 한 사람의 몸값, 은전 서른 닢을 받아서 10 주께서 나에게 명하신 대로 옹기장이의 밭 값을 치렀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즈가리야 11:12-13.) 12 내가 그 장사꾼들에게 품삯을 주고 싶으면 주고, 말테면 말라고 했더니, 그들은 은 삼십 세겔을 품삯으로 내놓았다. 13 야훼께서 나에게 그 후하게 받은 품삯을 금고에 넣으라고 하시기에 나는 그 은 삼십 세겔을 야훼의 전 금고에 넣었다.

 

예레미야서를 아는 분은 이게 무슨 얘기인지 금방 알죠 피밭 이 이야기가 뭐에요 가롯 유다가 자신에 죄를 뉘우치고 예수님에 핏값으로 받은 은 30냥을 대 제사장들과 원로들에게 도로 갖도 줬습니다. 멋있죠 뉘우쳤단 말이에요 그리고는 내 죄는 내가 책임진다 그러고 목매달아 죽었어요. 베드로는 아시잖아요 이게 더 나쁜 놈이죠 남자답고 의로운 사람 세상적 관점으로 봤을때 남자답고 의로운 사람은 유다에요 뉘우쳤고 자기에 죄를 자기 스스로 해결한다고 목매달아 죽었잖아요 그걸 죄라고 한다니깐요

30냥은 큰 돈이 아니였어요 당시에 파리 목숨처럼 여겨졌던 노예 한사람의 몸값이였어요 세상이 예수를 그렇게 취급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대 제사장들이 그건 큰 돈도 아니였고 또 핏값으로 지불되었던 꺼림직한 돈이였기 때문에 성전고에 넣지 않고 그걸로 밭을 샀어요 그래놓고 그걸 나그네의 무덤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요게 예레미야 서에서 예언된 어떤 것이 지금 성취된 거라고 성경이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여러분 지금 그 예수에 핏값으로 밭을 샀는데 성경이 그 맡을 나그네의 무덤이라고 그러죠 그런데 성경이 성도를 뭐라고 불러요 나그네라고 부르죠 보세요 성도는 나그네에요 베드로는 교회를 어떻게 부르는지 한번 볼까요

베드로전서 11711절에도 나그네라고 부르는데 17절에서는 여러분은 각자의 업적에 따라서 공정하게 판단하시는 분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으니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은 늘 두려운 마음으로 지내십시오.

사도행전 2028절 보세요 여러분은 늘 자신을 살피며 성령께서 맡겨주신 양떼들을 잘 돌보시오. 성령께서는 여러분을 감독으로 세우셔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피로 값을 치르고 얻으신 당신의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피로 산게 뭐에요 교회에요 교회. 그런데 예수님에 핏값으로 제사장들이 사놓은게 뭐에요 나그네의 무덤 하겔다마 피밭 그게 예레미야가 이야기한 교회란 말입니다 하느님에 백성 그렇다면 3단 논법에 의해서 교회 이콜 나그네의 무덤이 되는 거죠 여러분에 무덤이 되는 거에요 교회는 진짜 교회는 따라서 교회는 하느님의 힘을 동원하여 잘먹고 잘사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모이는 곳이 아니라 이 세상의 나그네들이 마치 코끼리들이 자기들에 무덤을 찾아가서 죽음을 맞이하는것 처럼 자연스럽게 찾아와서 모여들어서 거기에 묻히는 장소에요

교회는 성도에 육적 자아가 땅속 깊이 계속 묻히는 곳이에요 그래서 결국에는 하느님 그 어떤 방법도 다 소용없는 거네요 당신에 나라 임할때 나좀 기억해 주세요 이 하느님 절대 의존에 고백을 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거에요 그게 죽음이에요 그게 무덤이에요 그게 피밭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진짜 쉼이 있어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예수님이 나에게 와라 그러잖아요 교회로 오라는 거에요 예수님이 계신 진짜 교회로 와라라는 거에요 거기서 내가 쉼줄께 그러잖아요

마태복음 1128절 보세요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이 너희들이 나에게 오면 내가 멍애를 걸꺼야 멍애는 주인이 이끄는데로 가야되는 결박이거든요 그런데 그게 쉼이라 그래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그 말씀이 교회에게 진짜 일어난다는 뜻이에요 내가 멍애 지우고 끌고 갈거야 술남미고 솔로몬이 준 목걸이를 항상 달고 있죠 신부들은 항상 뭘 달고 있어야 되요 열드라크마 신랑이 주는 목걸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걸 하나 잊어 버리면 죽도록 찾는 거에요 그걸 왜걸어요 신부가 남편이 끌고 가는데로 끌려 가야된다라는 의미가 있는 거에요 우리가 교만한자 지 마음대로 사는 자를 목이 뻣뻣하다 그러죠 거기다 거는 겁니다 멍애를 걸어서 끌고 가는게 그게 쉼이라는 거에요 여러분 우리가 왜 이렇게 고단해 하죠 이 인생을 왜 그렇게 힘들어 해요 우리에 육적 자아에 욕망에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어서 그래요

 

전도서 18절 보세요 세상만사 속절없어 무엇이라 말할 길 없구나. 아무리 보아도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수가 없고 아무리 들어도 듣고 싶은 대로 듣는 수가 없다.

자꾸 자기가 원하는 어떤게 있으니까 보고 듣는데 차지 않으니까 피곤하다라는 거에요 피곤하다 그러니까 죽여주겠다는 거에요 하느님이 안피곤하게 그게 교회라니깐요 근데 예수에 이름을 부르면서 오늘날 교회가 뭣들을 구하고 있냐구요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고단하게 해달라고 발광들을 떨고 앉아 있는 거에요 더 피곤하게 해달라고

그런데 나에 감정을 휘둘렀던 이 옛 세상이 이제 나와 상관없는 것이 되는데 왜 내가 피곤하냐는 거에요 그래서 죽이는 거에요 하느님이요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소망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피곤한 거에요 이 세상에서 효부를 볼려고 하니까 이렇게 고단한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여러분에 삶 속에서 세상에 대해서, 여러분을 대하여 세상을 끊어 내는 거란 말이에요 그게 신앙생활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2천년전에 하느님이 십자가에서 너희에 대하여 세상을 못박았고 세상에 대하여 너희를 못박았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왜 하느님이 못을 박을수 밖에 없었는지를 그냥 경험하는게 신앙생활이구요 그런데 뭐가 그렇게 안된다고들 안달을 떨고 뭐가 그렇게 부족하다고들 원망을 하고 되고 싶은 나에 미치지 못한 나로 절망합니까 떠날거면서

 

진정한 자유는 육에 소욕이 죽을때... 육에 영광과 가치를 향한 추구가 박살이 날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에요 하느님이 그래서 오늘도 철장으로 우리를 부수시고 내일도 철장으로 내리 치시는 거에요 그런데 내 속에 또 다른 법이 있어 예수님에 철장을 매 순간 상단막기로 막아내고 예수님을 향해 훅을 날리죠 우리는요 안맞을라 그래요 사도 바오로가 그 일을 정확하게 체험했어요

로마서 721-25절 보세요 21 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는 내 마음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23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25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나는 과연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

보세요 나를 묻을려고 하는 예수님의 열심과 내 마음에 법이죠 절대로 교회라는 무덤에 묻히지 않겠다는 우리의 옛 자아 간에 전투가 일어나요 그런데 내 마음에 법이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에게 자주 저요 바오로는 사도였어요 그런데 사도도 졌대니깐요 이렇게 그때에 성령을 받은 성도에 마음속에 어떤 마음이 들까요 성령을 받은 성도의 마음속에 내가 죽어야 된다라는 것을 아는 자에 마음속에 어떤 마음이 들겠어요? 아니 수시로 내가 이겨버리네 내가 져야 되는데 그때 어떤 마음이 들겠어요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당신에 나라 임할때 나좀 기억해 주세요 이 말인 거에요 요게 성도에 죽음인거에요

 

나는 이런 존재인데 하느님이 의로 부어서 의로운 자로 만들어 주셨으니까 감사할 수 밖에 없구나 그러한 감사속에서 하느님 저 이런 존재니까 하느님께서 그렇게 예수를 보내서 죽이는 수 밖에 없었던 거네요 하느님에 의 그게 진짜 의고 우리에 의는 이렇게 초라한 것입니다 이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요 하느님에 의만 바라게 되는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요 정의롭게 사는 것을 열심히 추구하는 자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게 아니라 하느님에 의를 추구하는 자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거에요 그들만 배부르다 이게 산상수훈입니다 복있는 자여 너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를 거야 하느님은 여러분을 그렇게 죽여 가시는 거에요 따라서 여러분은 교회 안에 들어와서 하느님에 복음을 전해 들으면서 자신에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매일같이 폭로당하셔야 돼요 하느님에 의가 아니면 도저히 살 수 없는 자신에 실체를 보셔야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주시는 그 하늘에 의를 간절히 바라는 자가 돼야 돼요 그게 변화에요

 

로마서 1013절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돼요 그래야 구원 얻어요 돈 부르지 마세요 자식새끼 이름 불르지 마세요 여러분에 건강 부르지 마세요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구원 얻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도덕과 윤리 사회법 아래에서 원칙을 지키는게 의 아니에요 그게 정의 아닙니다 속지 마세요 복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함부러 그러면 여러분은 반드시 여러분을 칭찬하게 되어 있어요

하느님께서 원칙대로 하셨다면 우리는 다 죽어 마땅한 거에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에 자비와 은혜를 베푸셔서 이렇게 살려 놓으신 겁니다 그 은혜와 구원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게 뭐에요 하느님에 이름만 부르는 거에요 그걸 찬양이라고 하고 그걸 예배라고 해요 그걸 입맞춤 푸르스큐네오 예배라고 한다 말입니다 그 자리로 가셔야 되는 거에요 그러기 위해선 여러분이 그 하느님에 의가 기록이 되어 있는 그 의가 설명이 되어 있는 하느님에 말씀을 너무너무너무 배우고 싶어 해야 되겠죠 여러분 말씀 앞에 더욱더 진지해 지세요

살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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