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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 (로마3:9~20)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8-29 조회수1,583 추천수0 반대(0) 신고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

(로마3:9~20)

9 그러면 우리 유다인이 나은 점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미 내가 지적했듯이 유다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다 같이 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10 성서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올바른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11 깨닫는 사람도, 하느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12 모두가 비뚤어져 쓸모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며 그들의 혀는 거짓을 말하고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흐르니 14 그들의 입은 저주와 독설로 가득하다. 15 그들의 발은 피 흘리는 일에 날쌔며 16 간 데마다 파괴와 비참을 남긴다. 17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고 18 그들의 눈에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19 우리가 알다시피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은 그 율법이 명령하는 모든 것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사람은 말문이 막히게 되고 온 세상은 하느님의 심판에 복종하게 된 것입니다. 20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아무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 줄 따름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사도 바오로가 로마서 118절 이후로 장황하게 나열하고 있는 모든 인간들의 마귀적 실체가 너도 죄인, 나도 죄인, 우리 모두 죄인의 양태로 결론지어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열거한 것처럼,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하느님을 목숨 걸고 섬긴다고 하는 유대인이나, 율법은 받지 못했지만 양심대로 살아서 인간들의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헬라인이나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율법을 주어도 그걸로 죄를 짓고 양심을 주어도 그것으로 죄를 짓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죄론의 결론을 올바른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하느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비뚤어져 쓸모없게 되었다.’로 내려 버립니다. 이게 사도 바오로가 118절에서부터 320절까지 그 긴 설명을 통하여 말하려 했던 메시지의 핵인 것입니다. 인간들의 모든 선, 깨달음, , 같은 것들이 다 쓸모없는 배설물이라는 것입니다. 그건 인간 모두를 죽은 자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가 모든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위와 생각까지도 다 악으로 부정해 버리니까요. 악이라는 것은 산 자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예수님께서도 사람에게서 나오는 모든 생각의 실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7:21~23)21 안에서 나오는 것은 곧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음행,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다. 23 이런 악한 것들은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의 실체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생각까지도 다 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절대 산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생기가 부어지기 전까지는 아무리 생각을 하고 움직이고 일을 한다고 해도 다 죽은 것입니다. 왜요? 빛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내가 생명이고 내가 진리고 내가 길이라고 하셨잖아요? 내가 생수라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요한복음 1장에서도 예수 안에만 생명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예수 밖은 다 뭐라는 거지요?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만 빛이고, 예수만 생명이며, 예수만 길이고, 예수만 진리이며, 예수만 생수라는 것은 예수 이외의 모든 것이 다 어두움이고, 죽음이며, 낭떠러지이고, 거짓이며, 청산가리 탄 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한 예수 이외의 모든 것을 라 합니다.

그 죄가 거짓에서, 낭떠러지에서, 어두움에서, 죽음에서 살아올라오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난 어두움이고, 죽음이고, 낭떠러지에 떨어진 자며, 거짓에 속한 자입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빛이시고, 생명이시고, 길이시고, 진리이신 예수의 의를 붙드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빛을 조금 섞는다고 빛이 될 수 없어요. 청산가리 탄 물에 생수 조금 섞는다고 그게 생수 되지 않아요. 전적으로 다 비우고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잘 들어보세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느님의 생명력으로부터 차단이 된 그 상태를 죽음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생기가 들어가서 생령이 되었다면 하느님의 생기가 빠져나간 그 상태는 죽음이 맞지요?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이 된 것입니다. 그 상태를 노아의 방주 사건에서는 하느님의 신이 떠난 상태로 표현을 합니다.

(창세6:3) 3그래서 야훼께서는 '사람은 동물에 지나지 않으니 나의 입김이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사람은 백 이십 년밖에 살지 못하리라' 하셨다.

여기에서 입김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생기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 루아흐입니다. 하느님의 입김이 떠난 상태를 육체라고 하고 그 상태가 정녕 죽은(무트 타 무트) 상태인 것입니다. 에제키엘서에서는 그 상태를 이미 죽어 먼지가 풀풀 나는 마른 뼈로 묘사를 하고 신약은 그 상태를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라 표현을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아담들이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 자신들의 주체성과 존재성을 챙겨 보겠다고 선악과를 따먹고 분연히 일어선 상태, 즉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상태를 죽었다고 하고 난 하느님 앞에서 없는 자, 죽은 자여야 하는 것이 맞네요.’ 하고 자신을 부인하는 자를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건 다른 말로 난 하느님으로부터 성령, 즉 생기를 선물 받지 못하면 존재일 수도 없는 자라는 것을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이 성도의 본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성도를 가리켜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말은 율법지킴, 즉 인간의 행함과 됨됨이와 열심과 노력과 자격과 조건이 인간의 결국을 좌지우지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게 되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임을 확증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이 세상 아담 무리들의 실상을 낱낱이 폭로한 뒤에 이렇게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로마3:19~20) 19 우리가 알다시피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은 그 율법이 명령하는 모든 것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사람은 말문이 막히게 되고 온 세상은 하느님의 심판에 복종하게 된 것입니다. 20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아무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 줄 따름입니다.

하느님께서 율법을 왜 주셨다고 해요? 모든 자들이 다 죽어 있는 자들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모든 인간은 에덴동산의 아담 안에서부터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맞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죽은 자들은 생기, 즉 성령이 임할 때에만 산 자가 됩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교회에게만 내려 왔습니다. 그리고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예수에 대하여 교훈을 하신답니다. 그러면 생기를 다시 부여받고 산 자가 된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 어떠한 것이겠습니까?

나를 포함한 이 모든 세상이 다 죄의 상태, 죽은 상태이며, 그들이 합의하여 만드는 의는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이며, 하느님이 당신 아들을 죽여 만들어 내신 하느님의 의만이 우리의 살 길이며, 그들만이 하느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를 산 자라합니다.

그렇다면 그들 이외에 모든 사람은 여전히 죽은 상태가 맞지요? 그들은 단 한 번도 산 자인 적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나면서부터 죽은 자로 태어나 죽은 자로 이 세상을 떠납니다. 중요한 것은 단 한 번도 산 자인 적이 없었던 자들이 도덕이나 윤리나 선행이나 구제 등의 일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령에 의해 산 자가 되었다는 하느님의 백성들보다 더 훌륭한 모습으로 인생을 그려내는 이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창세전에 선택이 된 하느님의 백성들에게만 성령이 찾아오세요. 그리고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확실하게 가르쳐 주세요. 그리고는 그들의 골수와 관절까지 후벼 파서 뼛속까지 죄인인, 다른 말로 뼛속까지 죽어있는 그들의 실체를 보게 해 주세요. 화장을, 무화과나무 잎사귀 치마를 확 벗겨 버리신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어떤 고백이 나올까요? ‘하느님 살려 주세요. 하느님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하느님의 의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이 만드신 그 의의 옷 입혀주세요.’라는 고백이 나오겠지요?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어줍지 않게 떡칠을 해 놓은 그들의 화장을 낱낱이 벗겨 버리신단 말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교회라는 집단이 죽은 자들이 합의하고, 정의하고, 추구하는 시체 화장놀이를 하면서 성숙이니 성화니 하며 꼴값을 떨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도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정말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하늘의 성숙일까요? 우리는 지금 성숙과 성화를 그렇게 정의하고 있잖아요? 어려운 일이 와도 참고, 원수도 용서하고, 이웃을 섬기고, 착한 일을 많이 하고, 도덕과 윤리를 잘 지키고, 술 담배도 끊고, 뭐 그런 걸 성화라 하지 않습니까? 그건 시체들이 더 잘하는 거잖아요? 적어도 믿음에 의한 성화는 그러한 시체 화장놀이와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 안 드세요? 아니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일어나는 성숙이 아내에게 폭력 휘두르지 않고, 술 담배 안하고, 구제에 힘쓰며, 사회법이 금하는 나쁜 일 안하는 정도라면 예수 믿기 전에 이미 그렇게 살고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변해야 하지요?

 

성화라는 말은 성경에 없어요. 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인데, 굳이 그 단어의 의미를 풀어보면 그것은 말 그대로 거룩한 이와 방불한 자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화는 지금의 상태에서 조금 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예수가 되는 것을 성화라 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죽은 시체에 불과한 인간이 예수가 될 수 있지요? 그가 죽은 자가 될 때, 질그릇이 될 때, 비워진 그릇이 될 때, 쉬운 말로 죽을 때, 보배이신 예수가 담겨 연합의 상태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화했다라고 해요. 그러니까 성화는 저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예수님의 의가 아니면 저는 죽은 흙에 불과 하오니 예수의 의를 제게 베풀어 주옵소서.’하고 믿음을 의지하는 것을 말하고 그러한 고백을 하는 이를 성화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화는 내가 얼마나 예수의 의를 덜 의지해도 되는 훌륭하고 기특한 사람이 되어 가느냐로 설명되고 있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친구와 다투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고, 어른을 공경하며, 사회 규범을 잘 지키고, 남의 것을 탐내지 않으며, 질서를 지키고, 몸에 해로운 것을 금하라는 것은 온 세상 초등학교 도덕책에 공통적으로 다 들어가 있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성도에게 있어서 성화는 분명히 있습니다. 성도는 복음과 무관하게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복음에 참여되는, 말씀을 맡은 자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시체들도 살아낼 수 있는 그런 시체 화장놀이의 차원에서의 변화가 아니라 얼마만큼 예수의 의를 의지하느냐로, 자기가 부인되어지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모범생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아니면 살 수 없는 자로 밀려 내려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자신의 행위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자기 인식과 올바른 하느님 인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있으면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몸이 움직이는 겁니다. 그런데 입만 열면 성화, 입만 열면 변화, 입만 열면 성숙, 하는 이들을 보면 말만 해요.아니 때론 멋지게 하는 흉내도 냅니다. 원수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준 다윗이 무색할 만큼 번드르르한 선행도 하고 열심도 부리는데 결정적으로 자기를 무시하거나 자기를 부정하는 일이 발생하면 우리야가 아니라 우리야 할아버지라도 다 죽여 버려요. 그게 시체 화장놀이인 겁니다.

 

여러분, 자신의 실존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인간이 가장 견디지 못하는 게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부정당하는 거예요. 율법을 받고 전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착하게 살던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을 죽였지요? 메시아라는 사람이 그렇게 착하게 살고 있던 자기들을 착한 사람,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소위 성숙한 모습으로 하느님을 죽였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그 성숙한 모습을 회칠한 무덤, 시체들의 화장놀이라고 무시를 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신들이 무시를 당하면 시체들은 참지를 못합니다. 좀비처럼 다 일어나 하나님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아 살아난 자들은 어때요? ‘맞습니다. 제가 죄인 중의 괴수 맞습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고 그동안 제가 내어 놓은 모든 일들이 다 배설물입니다. 그래서 저에게 예수님의 의가 필요합니다.’하고 자기부정의 고백이 나온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산 자들은 난 죽은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고 죽은 자들은 난 산 자인데 왜 죽었다고 하느냐?’고 하느님을 향해 돌을 드는 것입니다. 그걸 바오로가 이렇게 그려냅니다.

(로마7:9)9 나는 전에 율법이 없을 때에는 살았었는데 계명이 들어오자 죄는 살아나고

율법의 진의가 무엇인지 몰랐을 때에는 바오로라는 인간이 살아있었습니다. 그리고 죄가 죽어 있었습니다. 그 말은 바오로 자신이 자신을 산 자로 여기며 죄를 스스로 제어하고 컨트롤 할 수 있는 자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의 진의가 깨달아지자 자신이 죄를 어거할 수 있는 산 자가 아니라 죄에 의해 끌려 다니는 죽은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걸 살았다라고 하는 겁니다. 난 예수의 의가 아니면 도저히 산 자일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산 자의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이 율법으로 인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율법 속에서 하느님을 보는 자들은 어떤 고백을 하겠습니까?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제가 도저히 살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은혜를 부어 주셔야 저는 겨우 산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와야 지요? 그게 오늘 본문 말미의 결론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야훼 하느님이 인간들의 세상에 육신을 입고 내려 오셨습니다. 율법이 사람의 모습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신 하느님을 알아보는 인간이 없었습니다. 원래 그 말씀이신 하느님을 알아보는 자가 그 말씀이신 예수 앞에 섰을 때 어떤 반응이 나와야 합니까?

 

 

(마태5:17~18)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지키려거든 다 지키라는 것입니다. 꾸어준 것도 받을 생각 말고, 그 누가 네 이웃이 되던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되냐고요?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지가 없어질 때 그 율법의 일점일획이 다 이루어진다고요. 18절이 그런 말입니다. 그건 이 천지가 존재하는 한, 이 첫 창조의 영역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 그 하느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켜낼 자는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마태5:19) 19 그러므로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천국에는 작은 자 큰 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는 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건 천국에는 없는, 천국에 어울리지 않는, 천국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다 지켜내지 않고 하나라도 어기는 자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못 들어가겠네요? 맞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른 의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마태5:21~24) 21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을 받아야 한다' 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또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24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 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 와 예물을 드려라.

여러분은 살인, 도둑질, 간음, 이런 것들이 십계명에 율법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안하세요? 오늘 아침에 살인하고 오신 분? 왜 안하셨어요? 율법 지키려고 안 하셨나요? 그럼 저 우간다나 아마존에서 문명과 전혀 상관없이 사는 이들은 살인을 밥 먹듯 할까요? 아니요. 그들은 성경이라는 것을 보지도 못했고 율법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듣지도 못했는데 살인을 하지 않아요.

 

생각해 보세요. 카인이 아벨을 때려 죽였을 때는 아직 율법이라는 것이 주어지기 전이었어요. 그런데 하느님은 카인을 저주하셨단 말입니다. 왜요? 율법을 어겨서인가요? 아니에요. 그로부터 수천 년 후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율법에 적혀있는 살인이라는 것 속에 들어 있는 진짜 하느님을 화나게 했던 것이 그 상황 속에서 펼쳐져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카인은 자신의 행위가 비교당하고 상대적으로 부정 당하자 화가 난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상대적 비교 대상인 아벨을 죽인 것으로 나타났지만 사실 카인은 자신을 그렇게 대우하시는 하느님을 죽인 것입니다. 죽은 자는 하느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에 동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살아있다고 여기는 자는 하느님의 행사가 못 마땅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모든 행사는 자신을 중심으로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살인은 바로 하느님과의 불화에서 비롯된 형제를 향한 미움을 모두 총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를 보고 라가(밥통, 멍충이)라 하고, 미련한 놈(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자)이라고 하고, 형제에게 노하는 것은 다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살인이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가 하면 하느님을 하느님 대접하지 않는 인간의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처사가 수긍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앞에서 죽은 흙으로 폭로되고 고백되지 못한 자들이 하느님과 화목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형제에게 노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살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물을 들고 하느님을 예배하러 오는 것입니다. 예물을 들고 하느님께 예배를 하러 온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화목이 전제가 되는 것이고, 그 화목 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예물을 근거로 복을 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게 유대인들의 예물 관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형제들과 불화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건 하느님과의 불화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 했지요? 그런데 이 인간들이 예물이라는 인간 측에서의 행위를 근거로 화목 되지도 않은 하느님께 제사를 드림으로 하느님과의 관계에 뇌물 칠을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진짜 하느님께 예물을 드리고 제사를 지내려거든 형제와 화목하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받아준다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과 화목하지 못한데 어떻게 형제들과 진심으로 화목할 수 있겠느냐는 그런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올바른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하느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비뚤어져 쓸모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의 진의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모든 율법을 딱 두 마디로 정의해 버리신 것입니다.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해라. 그런데 그건 우리의 열심과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의를 믿고 그 분의 긍휼을 구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이 땅에서 하느님과 화목한 자가 되어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지 우리의 업적을 쌓고 행위를 성숙시켜 하느님 나라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상황과 사건과 정황을 맞게 되어도 그 전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며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주가 아니라, 내가 하느님이 아니라 예수가 주요, 예수가 구원자 그리스도라는 것을(우리의 행위가 아닌) 인정하며 더 낮아지고 겸손한 자리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역사의 종착역은 모든 만물이 예수를 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래서 골고다에 선 것이고 이 역사는 그래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행전2:36) 36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온 백성은 분명히 알아 두시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왜 하느님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어야 했나요? 이 세상에 다른 주, 다른 그리스도가 너무 많아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은 다른 주, 다른 그리스도가 다 부정되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는 이 세상 모든 엉터리 하느님들과 그들이 내어 놓은 행복에 이르려는 시도, 자존심을 챙기려는 열심 등이 다 부정당해야 할 것들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신들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행위를 내어 놓은 인간들을 여전히 성자의 반열에 올려놓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법정이라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자신을 믿지 않는다 하여 자신의 자식이라 하는 인간들을 지옥 불에 던져버리는 당신네들의 신을 난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차라리 난 지옥에 가서 당신네 신에게 버림받은 그 억울한 영혼들을 구제하겠다.’ 멋지지요? 지옥에 들어가서라도 하느님에게 버림받은 이들을 섬겨서 구제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게 마귀입니다.

죽은 흙이 죽은 흙들의 집인 지옥에 들어가서 무슨 일을 해요? 그냥 거기서 영원히 멸망당하는 것이 죽은 흙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죽은 흙들이 산 자인 척, 멋있는 척을 한다니까요.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가 산 자의 인생이라고 하는데 모든 인간들이 살겠다고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산 자의 증거를 인간들의 행위로 제시한단 말입니다.

 

여러분,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든 즉각적인 결과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풍랑아 멈추어라 하면 그 즉시 멈춥니다. 나자로야 나와라 하면 그 즉시 무덤이 열립니다. 앉은뱅이야 일어나라 하면 그 즉시 앉은뱅이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 백성만 이러한 역사라는 과정을 통과해야 하지요? 하느님의 능력이 부족해서입니까? 아닙니다. 그것도 이미 완성이 되고 성취가 된 것입니다.

그 완료된 하느님 나라를 역사가 잠시 펼쳐서 설명을 하는 것이지 이 역사의 열심과 노력에 의해 그 결과가 번복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생과 역사가 내어 놓는 행위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모두 하느님의 캔버스로 사용되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나 이사야 같은 예언자들도 인생의 걸음까지도 자기가 걷는 것이 아니라(예레10:23)는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걸음걸이도 자기의 것이 아니라면 그 무엇을 내 것을 내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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