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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숙주조정치사율 100% (로마 7.13-8.2)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9-06 조회수1,855 추천수0 반대(0) 신고

비진리라는 독소포자충의 숙주조정치사율 100%

(로마 7.13-8.2)

13 그러면 그 좋은 것이 나에게 죽음을 가져 왔다는 말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죄가 그 좋은 것을 매개로 해서 나에게 죽음을 가져 왔습니다. 그래서 죄는 죄로서 드러나게 되고 계명으로 말미암아 그 죄가 얼마나 악독한 것인지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14 우리가 아는 대로 율법 자체는 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육정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서 죄의 종으로 팔린 몸입니다. 15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16 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좋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17 그렇다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입니다. 18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19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20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결국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들어 있는 죄입니다. 21 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는 내 마음 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23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25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나는 과연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결코 단죄 받는 일이 없습니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기생충은 숙주 안에서 숙주의 영양분으로 살아가는 불한당 같은 벌레를 말하죠? 땀 안 흘리고 남의 거 빨아먹고 사는 게 불한당이잖아요? 기생충입니다. 그러니까 기생충은 단순히 숙주 안에 기생하면서 그 숙주의 영양분만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숙주의 유전자까지 조작을 하는 거 아세요? 기생충이? 눈에 보이지 않는, 보이지도 않는 그런 것들이요. 그렇게 해서 숙주의 삶 전체를 조종하기도 해요. 대표적인 게 톡소포자충이란 거죠. 그런 기생충이 숙주의 몸에 들어가서 자신이 유리하게 그 숙주의 행동양상을 바꾸는 걸 숙주조정이라고 그러죠.

예를 들어서 뎅기열 바이러스에 감염된 모기의 유전자를 조작해서 모기의 후각을 더 강하게 만들어서 자신의 번식을 꾀하는 기생충이 있는가 하면, 능력도 주는 거예요. 톡소포자충이라는 기생충은 감염된 쥐의 뇌를 조종을 해서 죄의 두려움을 없애줌으로 해서 고양이에게 쉽게 잡혀먹게 하는 거예요. 학자들은 그 톡소포자충을 fatal attraction 치명적인 유혹이라고 해요. 창형흡충 이라는 기생충은요 소()라는 종숙 주에 들어가기 위해서 개미의 뇌를 조종해서 개미로 하여금 하루 종일 풀잎에 머물게 해요.

개미들이 일렬로 줄을 서가지고 열심히 일을 하는데 어떤 개미들은 풀 위에서 왔다 갔다 하는 애들 있죠? 걔네들이 감염된 애들이에요. 보세요. 기생충이 자기가 들어갈 숙주가 무얼 먹는지도 알고 있어요. 그 개미를 거기에서 왔다 갔다 하게 해서 소가 먹으면 그리로 들어가는 거예요. 양의 심장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중간 숙주인 달팽이를 양의 먹이인 풀 위로 몰고 와서 거기에서 양을 기다리게 하는 기생충도 있어요. 달팽이가 풀 위에서 간당간당하게 거기서 멍하니 있는 거 보셨죠?

그게 기생충에게 감염이 돼서 기생충이 시키는 거예요. 그런데 기가 막히게 해가 뜨면 걔가 제정신이 돌아옵니다. 그런데요. 그 기생충이 달팽이의 뇌 속으로 들어간 하나의 기생충은 그 뇌를 조종하고 나머지 기생충은 양의 심장으로 들어가서 영원한 양식을 얻어요. 그런데 그 뇌 속에 있는 기생충은 죽습니다. 진리를 담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기생충도? 곱등이 안에서 유충으로 살다가 맑은 물로 곱등이를 유인해서그 귀뚜라미 같이 생긴 거 있잖아요, 그거.

 

그 톡소포자충은 요 사람을 극한의 공포 앞에서 당당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요. 고양이 앞에 당당한 쥐처럼. 그러니까 사람의 행위나 성품이나 성향이나 업적은 꼭 그 사람 고유의 것이 아닐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러니 너무 믿지 마세요. 뭔가에 지배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찮은 기생충에 의해 지배가 되어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니까요. 타는 풀무불 앞에서, 사자 굴에서 그런 거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기생충에 감염 되도 그렇게 된다니까요,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종이라는 단어로 표현을 해요. ‘둘로스’. 모든 인간은 죄의 종이거나 의의 종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거예요. 그렇게 숙주를 조종하며 숙주 안에 기생하는 게 기생충만 있나요? 임신한 어머니의 배 안에서 열 달 동안 기생하면서 어머니의 식성과 성격까지 바꾸어내는 아기도 마찬가지에요. 기생이지 뭐예요? 애들이 안에서 뭐 합니까? 일 해서 먹고 사나요? 기생하는 거예요. 어머니 것 뺏어 먹고 사는 거죠. 그런데 기생하는 게 어머니 숙주를 먹고 사는 거예요. 그래서 입덧을 하는 거예요. 그 아이가 먹고 싶은 걸 먹는 거예요. 그런데 숙주를 조종하는 정말 무서운 게 그게 바로 말이에요. 말씀.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숙주는 멸망의 벼랑에 서서 그 멸망을 기다릴 수도 있고 은혜의 길에 서서 은혜를 기다릴 수도 있어요. 그 숙주 안의 말이 그들을 멸망의 먹이로 세우기도 하고 은혜의 수혜자로 세우기도 하는 겁니다. 우리가 가진 말이라는 건 우리가 가진 세계관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느님은 천지 만물에 충만하시죠? 성경이 반복하여 말한다고요. 나는 천지 만물에 충만하다. 하느님이 직접 말씀하세요. 그 말은 모든 천지 만물이 하느님의 말씀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 몸까지도.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바로 어떤 말을 가졌는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걸 그냥 표피적으로 껍데기로만 보느냐 그 껍데기에 가치를 두느냐 아니면 내용을 보느냐. 이거에 따라서 세계관이 바뀐다니까요. 가치관도 바뀌고. 그걸 내가 어떤 말을 가졌는가. 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 그 하느님,. 천지 만물에 충만하신 하느님이 말씀이니까.

내가 어떤 말을 가졌는가? 물론 그 안에서 성경과 예수, 인생과 역사, 모든 게 다 포함이 됩니다. 이렇게 어떤 말을 가졌느냐에 의해서 그 존재의 결국이 결정돼요. 존재는 그 말에 종속되어 끌려가게 되어 있어요. 당연히, 그리고 끌려가게 되어 있어요. 그게 그의 세계관이기 때문에.

그런데 바른 복음, 바른 말씀,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기실 멸망의 벼랑에 서 있다는 비극인 거예요. 그들이 가진 말이 그들을 멸망의 벼랑에 세워놓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는 영원한 멸망이 그들을 삼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죠.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선 모든 건 다 선과 악의 두 부류로 분석이 되고 구별이 됩니다. 그래서 율법도 나쁜 게 되고 계명도 나쁜 게 되고, 죄도 나쁜 게 되고 어둠도 나쁜 것이 되고 성전도 나쁜 게 되고 이러는 거예요. 바오로가 7장에서 그걸 깨고 있는 거예요. 그 나쁜 말. 푸뉴마 다이모니온, 악한 영이라고도 번역이 되고 귀신이라고도 번역이 되는데 그건 말 그대로 악한 말이라는 뜻이에요. 푸뉴마 다이모니온. 그걸 깨는 거예요.

 

너희들이 나쁘다고 알고 있는 그것이 너희들 안에서 해 놓은 일을 한번 보라는 거예요. 그 나쁘다고 생각한 그것이 어떤 일을 해 놨는지 한번 보라는 거예요. 너희가 그것의 진의를 알지 못하고 계속해서 표피적으로만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한다면 그 말씀이 너희를 죽일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진짜 죽음으로 멸망으로 떨어지는 자는 성경 때문에 죽어요. 말씀으로 죽는다니까요. 거기엔 약이 없어요. 치사율 100%입니다. 제발 거기서 벗어나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7장에서. 차라리 예수 안 믿는다고 하는 무신론자들이나 타종교인들이나 불가지론자들이 구원에 이를 가능성이 높아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엉뚱한 율법주의를 붙들고 있는 사람들은 방법이 없어요. 전도가 안 됩니다. 물론 하느님의 은혜로 거기에서 탈출해 오는 사람들도 있긴 있지만 그 저주의 기생충, 비진리라는 기생충을 토해내지 못하면 그 기생충은요 반드시 성충으로 완성이 되는 날에 중간숙주를 죽여 버려요.

바오로는 12절 까지에서 율법과 죄와 계명이 우리 안에서 행한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을 했어요. 그리고는 율법도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라고 선언을 했죠? 12절입니다. 그것이. 율법도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그랬어요. 그 앞에서는 죄다! 그래놓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대요. 그래서 오늘 본문인 13절부터 본격적으로 그 죄의 실체와 효용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본문 13절을 보시면 사도 바오로가 율법이라는 선한 것이 나로 하여금 다나투스의 그 거룩한 죽음, 완성의 죽음. 무트의 죽음. 그 죽음을 죽게 만드는 건 나를 창피하게 만들고 괴롭히고 가치 없는 자로 폭로해 내기 위함을 목적으로 하는게 아니라 죄를 다른 차원의 것으로 보게 만들어 주어서 그 죄의 대가로 주어진 나쁜 사망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라고 설명을 한단 말이에요.

 

13절 보세요. 13 그러면 그 좋은 것이 나에게 죽음을 가져 왔다는 말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죄가 그 좋은 것을 매개로 해서 나에게 죽음을 가져 왔습니다. 그래서 죄는 죄로서 드러나게 되고 계명으로 말미암아 그 죄가 얼마나 악독한 것인지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 선한 게 단지 나를 사망으로 끝장을 내버리려고 나에게 왔겠냐는 거예요. 그 다나투스의 사망은 좋은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세상 속에서, 이 역사 속에서, 인생 속에서 그 사망을 감지하게 될 때는요 진짜 세상으로부터 죽는 고통으로 감지하게 돼요. 나는 아무것도 아님, 없음으로 폭로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자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거는 쉬운 일이 아니란 말에요. ‘가 부정되고 가 삭제되며 나의 세상 적 꿈들이 폭격을 당해서 풍비박산이 되는 그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러나 율법의 최종 목적지는 그러한 거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게 죽여서 뭐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거기가 끝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 죽음은 어떤 목적지로 향하는 것이다, 라는 말이죠.

13절이 밝히는 그 죽음의 목적지가 뭡니까? 두 가지로 나오는데.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그리고 죄로 심히 죄 되게 하기 위하여. 라고 그래요. 그게 목적지래요. 그래야 생명이 온대요. 죄를 죄로 밝게 드러나게 해서 파이노빛을 비추다, 예요. 그게 뭔지 확 비추어서 그 죄가 진짜 뭘 이야기하는 지를 확, ‘파이노드러나게 해서 라는 존재를 다른 차원의 죄인, ‘휘페르볼레하마르톨러스’, 다른 차원의 죄인. 그 죄인으로 기모마이트되게 하기 위해서 그 율법이 나를 죽인 거라는 거예요. 다나투스의 죽음은 그런 의미라는 것입니다. 다른 차원의 죄. 다른 차원의 죄인. ‘하마르티아’ ‘하마느톨러스’. 세상 속 아담들이 죄라고, 죄인이라고 합의하고 정의하고 규정한 그 죄와 죄인을 다른 차원의 것으로 보게 해주는 것. 그게, 그 회개라는 단어가 그 단어라고 했죠? 다른 차원의 것으로 보게 해주는 거. 그게 율법과 사망의 최종 목적지라는 말이에요. 그러면 그게 생명이다, 라는 거예요.

죄가, 진짜 그 죄가 뭔지를, 죄가 심히 죄 되게 하는 거. 그게 진짜 죄가 그 내용이 뭔지를 알게 해주는 거 그게 목적지라는 거예요. 다나투스의 죽음의 그 목적지가 거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차원의 그 죄, 그리고 다른 차원의 죄인이라는 게 뭘까요? 어떻게 보는 게 다른 차원의 죄로 보는 거고 어떻게 보는 게 다른 차원의 죄인으로 보게 되는 걸까요?

 

요한일서 5장에 잘 나옵니다. 보세요. 16-18. 16 어떤 사람이 자기 형제가 죄짓는 것을 볼 때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라면 하느님께 간구하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 죄인을 살려 주실 것입니다. 사실 죽을죄가 있습니다. 이런 죄를 지은 사람을 위해서 간구 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17 옳지 못한 일은 모두 죄입니다. 그러나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지 않는 죄가 있습니다. 18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그를 지켜 주시기 때문에 악마가 그를 다치지 못합니다.

양심에 찔리지 않으세요? 하느님께 로서 난 자는 죄를 안 짓는대요. 범죄치 않는대요. 아예. 그럼 우리는 전부 다 하느님께 로서 난 자가 아닌 거예요. 여러분 죄 짓잖아요? 그리고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한다는데 왜 인생이 이렇게 고단합니까? ? 악한 자가 만지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지금? 인생이? 여기 보면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나와요. 죄는 죄지 무슨? 종류가 다르대요. 그런데. 그런데 죄는 한 가지 죄라니까요. 그런데 그 죄가 어떤 이에게 있어서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고 어떤 이에게 있어서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된대요. 그런데 여기서의 사망이 다나투스예요. 좋은 사망입니다.

 

그럼 보세요. 사망에 이르게 하지 않는 죄가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그게 진짜 죄예요. 죄는 우리를 다나투스의 죽음, 완전한 자기 부정의 자리. 처음자리 인식의 자리로 끌고 내려가야 사망에 이르는 죄가 되는 거예요.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 그 죄가 좋은 죄라니까요. 그런데 사망에 이르지 않는 그 죄를 짓는 자는? 그 자가 진짜 멸망에 이르게 되는 자에요. 그게 뭐죠? 말씀을 보고 율법주의와 인본주의 안에서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게 사망에 이르지 않게 하는 죄예요. ? 펄펄 뛰면서 희생제사 드린다, 그러고 율법 지킨다고 그러고 착하게 산다고 그러고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그들은 사망에 이르지 못해요. 그런데 하느님은 그걸 죄라고 그랬단 말에요. 그게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예요. 그러면 뭐하라 그래요? 그걸 보면?

구하래요. 구하라, 라는 말이 아이테오예요. ‘아이테오가 무슨 뜻이라고 했어요? 빚 갚으세요. 라는 말이라고 했죠? 아이테오. 빚 갚으세요. 왜 빚을 갚으라고 그러죠? 구하라, 찾으라, 아이테오, 제테오, 이게 뭐예요? 왜 하느님을 빚쟁이로 만들어요? 성경이? 우리가 아직 생기기도 전에 하느님이 스스로 언약을 하셨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할 거야. 라고 했기 때문에 그분이 갚을 게 있다고 표현을 하는 거예요. 당신이 우리가 요구하기도 전에 한다고 했으니까 반드시 하셔야 할 일이 있잖아요. 나는 말씀에서 그렇게 배웠거든요. 그거 주세요, 가 아이테오예요.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않게 하는 그 죄를 짓는 자들은 진짜 사망으로 떨어질 거니까 어떻게 하라고요? 구하래요. 그러면 그들이 뭘 받는대요? 생명을 얻는대요.

그런데 사망에 이르는 죄, 그 죄를 짓는 자들은? 우리도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율법적으로 행하는 우리를 발견하잖아요. 죄 안 짓습니까? 짓는다니까요. 그들을 위해서는 뭐라 해요? 구하지 말래요. ? 그 죄가 그를 결국 죽여 낼 거니까.

 

이미 그는 하느님의 은혜의 라인에 서서 그 죄를 통하여 하느님의 생명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는 그런 뜻이에요. 그 사망에 이르는 그 죄의, 그 과정 속에 있는 자들은 결국 완성이 될 거니까. 그걸 죄라 그래요? 나중에? 아니죠? 그래서 그러는 거예요. 18절에서. 그렇게 하느님께 로서 난 자들은 그게 사망에 이르는 죄이기 때문에 그걸 죄로 여기지 않아, 그래서 그들은 범죄치 않는다. 그러는 거예요. 이해가 가세요? 그들에겐 죄가, 죄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를 다른 차원으로 보게 되는 거잖아요. 이것이. 그래서 죄인을 다른 차원의 죄인으로 본다니까요. 결국 생명에 이를 죄인. 거룩한 죄인이 되는 거예요. 도덕적, 윤리적 파렴치한 것을 옹호하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잘 새겨들으셔야 돼요.

여기보시면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하는 자를 성경이 범죄자라고 그런다고요. 16절 보세요. 그지요? 그들을 범죄자라고 부른다니까요. 생명이 필요한 자. 그들을 위해서 구하라는 거예요. 아이테오! 생명을 준다는 거예요.

이렇게 우리 인간들이 하느님 앞에서 행하는 모든 게 다 죄인데 그 중에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도 있고 사망에 이르는 죄도 있는 거예요. 따라서 그 죄로 생명을 알게 되면 그에게 그 죄가 무슨 해를 끼치겠느냐? 그런 말이에요. 자 이렇게 그 죄가 그들을 다나투스의 죽음으로 이끌어서 생명에 이르게 해 두어 죄가, 죄가 아닌 게 되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그 원리를 이제 14절 이하에서 이제 설명하는 거예요.

 

본문 14절 보세요. 14 우리가 아는 대로 율법 자체는 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육정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서 죄의 종으로 팔린 몸입니다. 그런데 나는 육신이네요. 그러니까 그 신령한 율법을 나에게 줘 봐야 이 육신이 그걸 항상 죄로 바꾸어 내요. 죄로 생산해내는 거예요. 희생제사 드리지 마, 그랬더니 희생제사 드려! 로 듣고 계속 희생제사를 지내네. 율법은 신령한 거예요. 그런데 육신이 그걸 죄로 바꾸어내어 그걸 죄 아래 팔렸다, 라고 하는 거예요. 팔리는 건 종 밖에 없어요. 내가 죄의 종이에요. 그래서 신령한 것을 줘도 이걸 죄로 바꿔 내는데 선수들이라는 거예요. 15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 율법 지켰습니다. 그렇죠? 나는 하느님의 기쁨이 될 거야. 나는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거야. 그래서 율법 지켰어요. 희생제사 지냈다고요.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하느님이 그걸 악이라고 그러네. 뭐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래서 그러는 거예요. 내가 나의 행하는 것을 나도 모른다는 (나는 내가 하느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게 하느님이 원하시는 건 줄 알고 그리고 그게 내가 원하는 거니까,) 하느님처럼 된 인간들의 이 기특한, 이 정성이 그래서 했는데 아니 그 행하는 그게 하느님이 미워하는 것이라네. 나는 그렇게 듣고 했는데 그걸 하느님이 미워하는 거라고 해.

 

16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좋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바오로가 이상한 소리를 하죠? 내가 원치 아니하는 것을 하면 내가 반성을 해야 되는데 갑자기 사도 바오로가 그거 당연한 거야. 라고 해요. 그거 당연한 거야. ? 율법의 목적이 그거거든요. 너희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주었겠니? 못 지키는 거 당연히 알아요. 하느님이. 그러면? 그걸로 죄 생산해서 어, 이게 그거 아니구나! 알아서 생명으로 가라고 준 거잖아? 그러면 율법으로 너희들이 죄만 생산해 내는 게 율법이 선한 역할을 다 한 거네? 이런 말이에요. 당연한 거라는 거예요.

어두움은 빛이라는 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거고. 빛은 그 어두움을 나타내서 드러나게 하는 거죠? 이게 창세기 1장에 나옵니다. 어둠은 빛, 진짜 빛을 내용으로 담고 있어요. 그리고 빛은 그 어둠을, 어둠이 뭔지를 설명하고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요. 그러면 빛과 어둠은? 같은 거예요. 진리가 된 사람에게 있어서는. 마찬가지에요. 율법은 우리를 더욱 죄인 되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준 거라고 그래요. 분명히 바오로가. 율법은 죄를 죄 되게 하기 위애 우리에게 준 거다, 그러잖아요. 그러나 율법으로 그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면 그게 생명이야 그러잖아요. 그런데 율법과 죄가 왜 그렇게 나빠? 그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 죄를 잘 가르쳐서, 그게 뭔지를 잘 가르쳐서 그게 아닌 거, 생명과 선과 의를 알게 해주는 거. 이게 율법의 기능과 효용이잖아요. 역할이란 말에요. 그것이.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죄를 짓는게 아니라, 성경이 그냥 죄, ‘하마르티아라고 이야기를 해 놨으니까 자꾸 죄, 죄 하는데 죄를 짓는 게 아니라 피조물의 한계를 폭로시키는 거예요. 드러내는 거예요. 너희들 하느님 아니라니까! 이거. 왜 하느님처럼 되어서 하느님이라고 생각하고 살아? , 내가 하느님이다! 하느님이 준 율법을 너희들이 지키면 너희들이 하느님일 거 아냐? 그런 나는 뭐니? 그 얘기 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못 지켜야 너희들이 피조물 아냐? 그걸 죄라고 이야기를 해요. 성경이.

 

그렇게 율법을 통해서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하느님 앞에서의 자신의 무용함과 무력함을 알게 되는 것. 그게 내 육이 죽는 거잖아요? 나 하느님 아니네? 그걸 다나투스의 죽음이라 그래요. 그런데 세상 속에서는 그게 쪽 팔린다니까요. 아주. 부끄러워요. 아파요. 고통스럽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게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이에요. 그런데 그 완성의 죽음 자체도 스스로 하는 게 아니더라는 거예요.

 

그게 17절입니다. 17그렇다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입니다.

이거 보세요. 우리는 죄보다도 못한 먼지들이네요. 너희들이 그거 못해서 너희들 안에서 죄가 해주고 있다는 거예요. 그거를요. 하도 이게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이 욕망이, 피조물들의 이 죄 성이 너무 집요하여 하느님이 죄를 시켜서 도와주라 그러는 거예요. 너희들이 그거 못하니까 네 속에 있는 죄가 그거 행하고 있다, ? 다나토스의 죽음. 너희들 아니라는 거. 악역은 자기가 할 테니까 너희는 나를 밟고 생명으로 가라는 거예요. 그 죄인님께서. 그게 죄인 중의 괴수로 오신 예수님이 한 일이잖아요.

멀쩡하게 율법 잘 지키고 희생제사 잘 드리며 지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오십니까? 그들이 하느님을 죽이는 자들로 폭로가 되었어요. 죄인이 돼 버렸어요. 원래 죄인이지만. 율법이 그일 한 거 아닙니까? 너희들 죄인이야. 예수님이 오셔서 그랬어요. 그들을 하나님 살해범으로 만들어버렸다니까요. 온 세상을. 그리고는 뭐라 그래요? 나를 밟고 생명으로 가. 죄가 그 일 한 거예요. 우리를 하느님 살해범으로 몰아내 세운 게 다나투스의 죽음으로 만든 거라니까요. 우리를. 너희는 먼지야. 쓰레기야. 이렇게. 그러니까 나를 밟고 가. 그게 십자가입니다. 왜 그렇죠? 왜 우리는 그렇게 죄에게 까지 도움을 받아야 돼요?

 

18절에 이유가 나와요. 보세요. 18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19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내 속에서 죄가 일을 해서 나를 다나투스의 죽음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는 건 내 안에 선이 없기 때문이라 그래요. 그걸 행할 능력이 없다는 거예요. 내가 스스로 죽을 수가 없다니까요. 인간은. 그래서 죄를 시켜서 야, 가서 좀 도와줘라. 그런 거예요. 율법을 시켜서. 예수를 시켜서. 마음은 하느님을 위한 일을 하고 싶어 하는데 그 거룩한 일을 행할 능력이 피조물에게는 없어요. 그래서 마음이 원하는 일을 했더니 전부 악이야. 그게. 하느님이 미워하시는 일만 했어요. 희생제사 죽어라고 드리고 열심히 간음하고 열심히 거짓 말, 하고. 나는 선한 일을 하려고 열심히 율법 지키고 제사지내고 하는데 하느님은 그걸 전부 싸잡아 악이라고 그런단 말에요. 그렇게 나의 최선이 악인데 어떻게 나에게서 선한 것이 나옵니까? 이사야서 64장 이야기처럼. 우리의 최고의 의는 더러운 똥 걸레다. 그러잖아요. 더러운 옷이다.

잘 들어보세요. 18절에 쓰인 선이라는 단어가 앞의 것과 뒤의 것이 달라요. 앞에서는 아가투스의 선이고요. 뒤에서는 칼로스의 선이에요. 헬라어는 의미가 달라요. 선이라는 똑같은 단어인데도 그게 가진 의미가 달라요. ‘아가토스는 진짜 참 선, 있죠? 하늘의 그것. 진리. 내용인 그거. ‘칼로스는 그것이 오게 되면 선하다 인정받는 그 선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 저거 참 선하네. 선하게 이루어졌네. 하고 인식이 가능하면 그게 칼로스이고,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진짜 그 선은 아가토스라 그래요. 그러니까 그 진짜가 없으니까 율법이 이루려고 한 그 선한 칼로스가 당연히 안 이루어진다는 뜻이에요. 그 진짜 선이 없는데 어떻게 칼로스’, 율법이 이루고자 하는 그게 어떻게 이루어지니? 너희들이 어떻게 율법을 지켜?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아? 아가토스가 없으니.

 

네오스라는 게 진짜 새 것이라는 거거든요. new, 그게 네오스예요. new, 진짜 새 것이 있으면 카이노스’. 새 것이 돼요. 둘 다 새(new) 거든 요. 새 것. 마찬가지에요. 그 진짜 새것이 나에게 주어지면 내가 새로운 피조물, ‘카이토스의 피조물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반드시 거기에는 진리, 그 새 것, 아가토스가 전제 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 말 하는 거예요. 그 아가토스, 그 선이 없음으로 너희들은 선을 이룰 수가 없어. 그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 안에 아가토스의 선이 없어요. 그 아가토스의 선이 없으니 칼로스의 선도 요원 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죄가 도와주는 거예요. 선이 있으면 그것으로 선에 이르면 되는데 선이 없으니 죄의 도움을 받는 거예요. 율법의 도움을 받는 거예요. 예수의 도움을 받는 거예요. 그리고 나는 그렇게 밖에 살아날 수 없는 존재로구나, 를 아는 걸 그리스도의 영, 진리를 알았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 예수를 통하여, 율법을 통하여. 그렇게 해서 바오로가 깨달아 안 것이 있어요. 율법의 선한 것을 자기는 악한 것으로 갖고 있었다, 라는 것을 알았다는 거예요. 그게 이제 피조물의 한계. 이제 나의 처음자리구나!

그게 21절에요. 보세요. 21.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에요. 그 선을 행하려고 나는 열심히, 그 율법, 말씀 그걸 갖고 지키려고 했는데 그게 바로 내 안에 있는 악으로 인해 죄만 짓더라는 거예요. 선을 행하려고 하는 나에게 그게 악으로 존재하더라. 이게 피조물이다. 그 말이에요. 오히려 그 율법으로 자기자신의 연락을 추구하더래요.

 

그게 그 다음 절이에요. 22절 보세요. 22.나는 내 마음 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이걸 무슨 뭐, 속사람, 겉 사람의 그 속사람으로 생각해서 그래,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 이렇게 이해들 하시는데 진짜 여러분의 속사람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십니까? 아니, 속사람은 뭐예요? 뭔지는 아세요? 그 속사람 아니에요. ‘안트로푸스’, 아이구 저 인간, 저거. 그럴 때 있죠? 그럴 때 쓰는 인간 안트로푸스에요. 그 인간 안에서 내가 그 법을 연락, 쾌락으로 쓰고 있더라는 거예요.

인간들은요 자기들이 뭔가 하느님이 시킨 어떤 것을 내가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거기서 대단한 희열을 느끼죠? 그게 즐거워하는, 이에요. 그 단어라니까요. 이것이. 좋은 말이 아니라고요, 이게. 구약성경에도 나오잖아요. 너는 재를 뒤집어쓰고 금식을 하며 그것으로 연락하는구나? 그러죠? 고거 재밌니? 즐겁지? 너희들 가치가 올라가니까 얼마나 기뻐? 연락한다고요. 안트로포스인간 안에서 내가 그 법을 오히려 내 쾌락의 도구로 쓰는 거예요. 경건을 이익의 자료로 삼더라는 것입니다. 그 말 하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의 육신은, 다른 말로 육을 가진 피조물의 한계는 하느님의 법을 그 진의대로 수용할 수 있는 여백이 없어요. 자기 자신의 선악관으로 꽉 차있습니다. 그래서 그 하느님 기뻐하시는 선을 도저히 행할 수가 없어요. 내 안에서는 그 선이 항상 져요. 악이 승리를 해요. 아니, 그건 당연한 피조물의 한계 에요. 피조물의 현실입니다. 그것이. 우리는 언제나 아무리 경건한 이유를 갖다 붙여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아닙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기가 막히게 잰다니까요. 여기서. 내가 이겨요. 항상. 그런데 그 가 선악과를 입에 문 아담이라는 게 문제예요.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는 그런 아담이라는 게 문제란 말입니다.

 

본문 23절 보세요. 23.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

내 지체 속에 한 법이 있어요. 그런데 이게 둘이서 율법과 진리로 싸우네? 그런데 이건 하나예요. 그런데 늘 우리는 어디로 가느냐 하면 진리가 아니라 율법으로 간다는 거예요. 항상 지더라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이거든요. 내 가치를 높여 주려고. 그럼 어떻게 하죠? 인제?

방법이 없어요. 아울러 이러한 존재를 하느님께서 구원하시는 게 옳습니까? 아니, 우리의 이성으로 판단해도 이런 존재는 하느님이 구원하시면 안 되는 거죠. 뭐 하러 이런 존재를 살려두느냐고요? 무슨 가치가 있다고. 능력도 없어, 자격도 없어.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준 게 정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겠어요?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정말 우리의 실체와 한계를 올바로 깨닫고, 하느님의 말씀의 진의를 올바로 이해하게 되면 아, 하느님이 나 구원 안 하시는 게 맞구나, 라고 먼저 인정을 하게 돼요. 그리고 내가 왜 구원을 받아야 돼? 이런 쓰레기가? 여기로 먼저 가야 된다니까요. 여러분이 말씀을 올바로 들었으면. 그렇잖아요? 아무런 능력도 없고 자격도 없고, 그리고 자기만 위해서 살아요. 자기만 하느님 되고 싶어 하는 게 이 피조물이며 인간이란 말입니다.

하느님이 그를 왜 구원하셔야 되느냐고요? , 하느님은 이러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율법을 준 게 아니라 모조리 멸망시키기 위해 주신 것이구나. 이리로 여러분 먼저 가셔야 돼요. 오해하지 마세요. 그래서 주셨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진리를 올바로 인식하게 되면 일차적 반응이 그렇게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나는 구원받을 자격도 없고 하느님이 나를 구원 안 하시는 게 옳아. 그게 정의야. 그게 공의야. 그렇잖아요? 바오로가 지금 그리로 몰고 가는 거예요. , 죄가 다 도와줘야 될 만큼 너희들은 쓰레기다. 그러면 너희들은 죽어 마땅하잖아? 절망이죠? 절망. 그렇게 완전한 절망이 되었을 때, 내 옛 하늘과 옛 땅이 완전히 무너져버려야, 율법 아래에서 내가 완전히 무너져버려야 그 때 비로소 은혜가 일을 시작하실 수 있어요.

 

은혜가 뭡니까? ‘캐리스? 받을 자격도 없고, 갚을 능력도 없는 자들에게 무상으로 쑤셔 박아 주는 거. 그걸 은혜라고 해요. 갚을 능력이 요만큼이라도 있다거나, 갚을 자격이, 받을 자격이 요만큼이라도 있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은혜라는 개념이 성립이 안 돼요. 은혜는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은혜는 완전한 절망 속에서 비로소 싹을 틔울 수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바오로가 완전한 절망 속으로 우리를 몰고 가는 거예요. 아니, 완전한 절망으로 떨어지지 않은 자가 어떻게 은혜를 감사하겠어요? 그런 자들은 자꾸 자기 안에 있었던 고 작은 것을 점, 점 침소봉대해서 이것 때문이었구나! 로 간다니까요. 100% 그래요. 100%. 인간은. 지금 완전한 절망으로 몰고 가세요. , 아니구나. 여러분 진리를 알고 난 이후에도 이 과정은 계속 겪게 돼요.

나 라는 존재와 그 수많은 불가능한 들이 모여서 만든 게 세상이잖아요. 호 코스모스. 그 세상이라는 게 정말 구원받을만한 가치도 없고 자격도 없고 멸망 받아 마땅한 먼지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이렇게 숨 쉬고 있는 자체도 하느님의 은혜로 감사하게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그 사람을 비로소 살았다고 하느님이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그게 산거예요. 그러니까 절망 = 은혜에요. 사망 = 부활인 거예요. 절망이 은혜라니까요. 그 절망을 모르는 이가 어떻게 은혜를 알아요? 그러니까 절망이 은혜라고요. 그 절망 한 번 안 해본 사람이 무슨 은혜를 논하고 진리를 논합니까? 여러분. 그게 그리스도교의 역설이에요.

 

바오로가 어떻게 절망하는지 보세요. 본문 24.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그래, 나는 이 다나투스, 이렇게 완벽하게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 무용한 자구나. 말씀은 전부이고. 하느님이 전부이고 나는 공이며 허구나. 이 사망의 몸. 여기서 어떻게 내가 나가? 못 나가는 게 맞아. 못 나가는 게 맞아. 누가 날 구원해내랴? 없어! 이 세상에는 없어! 그런 말이에요. 누가 날 구원해? 없어. 그런데 갑자기)

 

25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나는 과연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

마음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긴다고 열심히 열심을 부리는데 내가 이 육신이, 육신을 갖고 있으므로 말미암아 그걸 곧 죄의 법으로 바꾸어 내는 것이에요. , 이게 하느님의 법이라고 열심히 하는데 자꾸 죄의 법이 돼. 같은 거예요. 이거는요. 같은 법이에요. 말씀을 받으면 그래, 이것이 정말 성도다운, 말씀을 받은 성도의 삶이지, 하고 하는데 자꾸 그게 죄의 법이 되는 거예요. 육이 살아있는 한.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나에게 감사의 선물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7장 마지막 절이 이렇게 끝나는 거죠.

 

어떤 선물을 주셨는지 81-2절을 가볼게요.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결코 단죄 받는 일이 없습니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뭐예요? 그 율법이 그 진리의 말씀으로 해석이 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에요. 그걸로 생명에 이르게 되는 거니까. 그죠? 그런데 여전히 예수에 머물고 율법에 머물면 그게 죄와 사망의 법이에요. 그런데 생명이 성령의 법이 내 안에서 나를 죄와 사망의 법으로 해방시켜 버렸네요? 어떻게?

1절을 보면 예수를, 그 율법을, 그리스도, 진리로 마음으로 받고 있게 된 자들에게는 결코 단죄함이 없대요. 죄를 안 묻는다고 그러죠? ‘카타크리마죄를 안 물어요. 물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되죠? 개정성경은 그 뒤의 이유를 쏙 빼 먹어버렸어요. 번역을 안 해버렸어요. 그래서 어정쩡하게 됐죠? 본문에 보면 그 뒤에 이렇게 붙어있어요. 이런 어구가. ‘네카타 싸륵스 페리파테오 알라카타 푸뉴마이걸 다 빼먹으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모르는 거죠. 그 어구를 직역하면 육신 안에서 살지 않게 된 자들은 이제 영원에서 사는 것이기 때문에 라는 말이에요. 무슨 말이겠어요? 그래서 단죄하지 않는다, 그래요.

너희들의 육신은, 율법은, 율법의 종인 너희는 이 세상에서 죽었어. 그런 뜻이에요. 육신이 없어졌다는 뜻이에요. 이게요. 네카타 싸륵스 페리파테요. 육신 안에서 이제 안살아. 원리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육신이 있지만 우리의 육신은 하느님이 안 본다는 거예요. 이제요. 영 안에서, 말씀 안에 있는 나로만 보신다는 거예요. 하느님이. 그러면 이 육신이 없는데 율법은 나를 어떻게 종삼을 것이며 이 육신이 없는데 무슨 죄를 물어요? 누구한테 물어? 진리한테 물어요? 영인 나에게? 그 말 하는 거예요. 너희들의 육신은 그렇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도저히 절망이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가 너희들을 어떻게 살려낼 것인지를 보여줬잖아. 그러면 너희들의 육신은 이제 삭제 된 거야. 없어. 그런데 어떻게 카타크리마’, 죄를 어디에다가 갖다가 물어? 그 말이에요. 죄를 어디에 갖다 물어? 죄를 물을 육신이 없어졌는데. 너희들은 영이잖아. 진리잖아. 그래서 묵시록에서 우리를 말씀이라고 불러요. 우리 이름이 진리래요. 내가 영이란 뜻이에요.

 

무슨 혼령이 따로 있고 혼이 따로 있고 육신이, 그런 말 하는 게 아니라. 그래서 바오로가 82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해방했다. 그러는 거예요. 죄와 사망의 법. 율법이죠? 율법을 그리스도 안에서 올바로 깨닫고 나니까 그게 생명의 성령의 법이더라는 거예요. , 이렇게 해서 우리는 살아나는 거로구나. 이 죄와 사망의 법. 도저히 이걸로는 내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걸 내가 알고 나니까 그래서 하느님이 다 하실 수밖에 없는 거구나, 를 알게 됐어요. 이게 생명의 성령의 법이 되는 거예요. 그것이. 다른 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법은 하나인 거예요. 하느님의 말씀은 하나인 거예요. 그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죄와 사망의 법으로 작용하게 되는 거고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 되는 거예요. 율법은 그런 거예요. 죄는 그런 거예요. 성도에게 있어서. 그런데 그게 왜 나쁘냐? 그러는 거예요. 그걸 깨닫지 못하고 육신에, 율법에, 죄에만 머무는 그게 나쁜 거지. 그것으로 생명을 알고 선을 알고 의를 배웠다면 그걸로 된 거야. 그러는 거예요.

이렇게 이해를 해보세요. 흙에 불과한 피조물이, 성경이 왜 우리를 흙으로 지었다고 자꾸 그러는지, 흙에 불과한 피조물이, 땅이 하늘이 되기 위해서는 승천이라는 과정이 필요해요. 그렇죠? 그걸 승천이라는 말로 해요. 다른 말로 풀면 천국 간다, 라고 하는 말이 그 말이에요. 승천이에요. 그것이. 예수님이 승천하시죠? 율법으로 오시잖아요. 이 땅에. 흙으로 오시는 거예요. 율법으로 오셔서 하늘로 간다니까요. 승천이에요. 그리고 어떻게 오세요? 진리의 영으로 오세요.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세요. 말씀으로 오신다는 뜻이에요. 이건 여러분 안에서 정확하게 일어나는 일이에요. 고걸 파루지아라고 해요. 진리의 영으로 다시 오는 걸. 나타나다는 뜻이거든요. 그걸 개정성경이 재림이라는 말로 번역을 해 놔갖고 먼 미래의 어느 날 그렇게 그 모습으로 다시 오실 거라고. 그런 모습으로 안 오세요.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면서요? 그건 뭐고 그건 뭐냐고요? 제발 그 관념으로만 갖고 있는 그 그리스도교를 깨시라니까요.

 

주님이 부활하셔서 천국 가셨어요. 하늘이 되셨다, 라는 말이에요. 정확히 이야기 하면. 하늘로 가셨어요. 하늘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그 승천을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되는 게 뭐예요? 테텔레스 타이’. 다 이루었다. 다나투스의 죽음이에요. 그 죽음의 과정을 통과하니까 그가 하늘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파루지아’, 밝히 감춰진 것을 나타내는 거예요. 감추어진 게 나타나다, 가 재림이라는 말이에요. 파루지아라는 말이란 말에요. 그게 바로 흙에서 출발한 성도의 이 세상살이에요. 흙에 불과한 피조물이 말씀을 받습니다. 말씀이라는 건 뭐죠? 그 위에 물이 있다가 하늘이란 단어에요. ‘샤마임. 그 위에. 거기에 물이 있다. 거기에 말씀이 있다. 거기에 진리가 있다, 라는 뜻이라고요. 그래서 아랫물과 위의 물을 항상 나누어서 이야기하죠? 그래서 말씀을 은혜의 비라고 하고 율법을 사막, 모래 물이 없는 광야. 이렇게 표현을 하는 거예요. 부스러기 이렇게.

, 흙이 하늘이 되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필요한 거예요. 말씀을 받아요. 말씀은 온 세상에 충만한 그 하느님을 이야기해요. 진리를 이야기한단 말에요. 대부분의 아담들, 흙들은 그 말씀을 피조물의 수준의 것으로 받죠? , 이런 거야~. 물리적으로는 이런 시간 속에서 계절이 바뀌고, 봄여름 가을 겨울이 오고 꽃이 피고 꽃이 떨어지고 그냥 그거로만 인식하는 거예요. 그걸 크로노스의 시간이라고 하는데 아무 의미 없는 시간이에요. 그건 시간에 끌려가는 거죠? 그런데 그런 시간이 의미가 있게 되는 사람이 있는데 그걸 카이로스, 성경에 나오는 때가 차서, 때가 되어서, 때가 이르러, 그 때는 전부 카이로스에요. 의미가 있는 시간이 되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다. 이게 그런 의미가 있었구나, 라고 우리에게 깨달아지게 되면 그거는 능동적인 내가 그 시간을 능동적으로 갖게 되는 거예요.

 

대부분의 인간들. 아담들이 피조물의 수준의 것으로 이 말씀이라는 걸 받아요. 성경도 마찬가지에요. 세상을 그렇게만 보는 것처럼 말씀도 그렇게만 봐요. 그러니까 나타난 현상에만 목매여서 일희일비하게 되는 거예요. 절망하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쪽팔려하고 부끄러워하고 수줍어하고 그러는 거예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거. 그러나 알고 하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껍데기, 현상으로 밖에 이해를 못하니까 거기에 묶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현상을, 자꾸 나타난 현상을 계발하려고 하고 이걸 어떻게 발전시키려고 자꾸 하는 거예요. 나부터 시작해서. 그들은 그 말씀을 갖고 그 흙들의 가치를 놓이는데 에 매진을 해요. 그래서 결국은 훌륭한 흙이 되어 마치죠? 그 훌륭한 흙들이 모여 있는 곳을 지옥이라고 해요.

그런데 어떤 구별된 흙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똑같이 말씀을 받아요. 은혜의 비를 맞습니다. 세상으로 주어진 그 말씀을 받고 성경으로 주어진 그 말씀을 받고, 역사로 주어진 그 말씀을 받고, 원리와 원칙으로 주어진 그 말씀을 받고 그들이 흙으로 폭로가 돼요. , 나 하느님 아니네? 이렇게. 내가 흙이네 진짜? 상황과 사건과 교훈과 깨달음 등 모든 것들이 나라는 존재를 철저하게 흙으로 폭로하고 해체시켜 버리죠. 그걸 무트의 죽음이라 그래요. 말씀의 완성. 무트, , 타우의 조합이니까. 말씀의 완성. 물의 완성. 말씀의 표. 무트, 죽음이에요. 그것이.

, 말씀이 다고 나는 아니네? 이런 거예요. 그게 죽음인 거예요. 말씀이 실체고 너는 이다. 너는 먼지야. 아파트야. 그게 뭐죠? 절망이죠? 처절한 절망의 자리에요. 그런데 거기에 부활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 죽음이 절망이 곧 생명이요, 부활인 거예요. 그 하늘이 무너졌더니 비로소 솟아날 구멍이 생겨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생기는 게 아니라 하늘이 무너져야 솟아날 구멍이 생겨요. 하늘이 안 무너지면 거기에 갇혀버려요. 하늘인척 하는 땅에. 예수께서 내가 생명이고 내가 부활이라고 말씀 하신 게 바로 그런 의미예요. 그렇게 십자가 지고 죽은 그 다나투스의 그 예수가 생명이고 부활이라는 거예요. 그게. 죽음이 부활이고 죽음이 생명이란 뜻이에요. 그래서 내가 부활이고 내가 생명이야, 그런 거예요. 곧 죽을 거면서. 그때 그를 가리켜 내가 땅, 흙 맞네요. 하느님, 하느님이 나에게 은혜를 붓지 않으면 나는 그렇게 영원히 흙일 수밖에 없네요, 를 고백하는 걸 호 오라노스.’ ‘하늘이라 그래요. 그거요. 하늘. 성경이 말하는 하늘은 그 하늘을 이야기 하는 거라고요.

그래서 일층 천, 이층 천, 삼층 천이 뭐라 그랬어요? 일층 천은 옛 성전. 하늘을 설명하는데 눈에 보이는 걸로 줬잖아요. 세워서. 둘째 하늘? 예수! 그 성전으로 오셨죠? 그런데 또 못 알아먹네? 삼층 천이 뭐예요? 진리! 진리의 영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알려 주니까 바오로가 삼층 천. 세번째 하늘을 갔다 왔다 그러고 뭐라 그러느냐 하면 그 하늘이 된 거예요. 거기 갔다는 건. 사람의 말로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말! 그래요. 하늘을. 그게 하늘이에요. 천국 갔다 왔더니 뭐 거기는 어떻게 만들어져 있고 거기 무슨 멘션이 있고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정신분열증 환자던가. 아님 사기꾼이던가.

 

자 보세요. 그렇게 하늘이 되면 아, 이게 하늘입니다. 이게 진리입니다, 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지요? 그러면 그 감추어졌던 하늘이 나타나잖아요? 이걸 파루지아! 재림이라 그래요. 무슨 동화책처럼 무협소설처럼 그렇게 상상하시면 안돼요. 성경을. 올라갔다가, 내려 왔다가 사라졌다가. 뭐 이런 걸로. 여러분 안에서 일어나는 거라니까요. 그게 여러분과 관계가 없으면 성경은 여러분 밖의 법의 책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십자가, 승천, 재림 같은 것들을 언젠가 일어날, 현재의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면 여러분은 크게 잘못 알고 게시는 거란 말에요.

그 거룩한 주님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도래하게 하는 게 뭐예요? 죽음이 먼저니까. 율법이잖아요. 율법이 뭘 도구로 쓴다?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했으니까 죄를 도구로 써요. 그럼 그 율법과 죄가 뭐 그렇게 대단히 나쁜 거냐고요? 그때 그에게서 죄가 삭제되는 거예요. 아니, 죄와 원래 상관없음의 상태가 되는 거예요. 그럼 그게 용서라고 하는 거고 구원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정의해 놓고 합의해 놓은 국어사전의 개념들로 자꾸 그걸 이해하려고 하니까 여러분이 자꾸 추측하여 소설을 쓰게 되는 거란 말에요. 그건 올바른 그리스도교가 아니란 말에요. 오히려 그게 감사한 거잖아요? 나를 도와준 그 죄가.

함부로 남들 단죄할 필요도 없고. 아니, 그런 마음도 안 생겨요. 뭐가 나쁜 거예요? 그냥 말씀을 갖고 성경을 갖고 그 율법과 죄에만 묶여서 그런 것만 금하고 그런 것만 목표삼아 열심히 행하고 그렇게 하면 그게 흙의 행사라는 거예요. 넌 여전히 물을 못 받은 흙이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너희는 흙의 나라, 지옥으로 간다. 성경에 계속 해서 그거 경고하는 겁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넌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라고 말씀 하신 건, 흙에 진리의 영이 부어지지 않으면 넌 그냥 흙으로 돌아가게 돼. 그러한 경책임과 동시에 네가 흙이라는 것을 알아 너에게는 물, 진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 그게 생명이야. 그런데 왜 하느님 흉내 내고 그래? 흙으로 돌아 가! 이런 말도 돼요. 언약을 담은 하느님의 은혜의 언약이기도 한 거예요. 그것이요.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 율법에 머물러 버리면 그게 먼지에요. 그게 흙이에요. 그걸 아파르라 그래요. 창세기를 보면 인간을 아담이라 그러죠? 최초의 인간이 아담이기도 하지만 그 아담이란 이름 자체가 인간이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얘기 하는 거예요. 우리 얘기. 인간의 이야기. 그런데 아담이란 단어를 파자하면 뭐냐 하면, 하느님이 원래 어떤 뜻으로 줬냐 하면 하느님의 구별된 말씀.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 이란 뜻이에요. 아담이란 단어 자체가. 너희들이 진리야, 라고 이야기하는 거. 그게 아담이에요. 그게 우리 창조의 목적이기도 해요.

, 내가 진리를 알아 그 진리로 사는 구나. 하느님은 하느님이고 나는 내 자리가 있구나! 그게 아담이 해야 할 바이고 삶으로 살아야 할 바 예요. 그걸 찬송이라고도 하고 영광을 돌린다고도 하는 거예요. 그거를. 아담이에요. 그런데 그 아담이 어디서 나와요? 흙으로 지었다고 그러죠? 그 단어는 아다마예요. 아다마가 뭐냐 하면 하느님의 구별된 말씀을 말하다’, 예요. 아담에 하나가 더 붙어 있는 거죠.

그 아다마를 그냥 흙, 땅 이렇게 번역을 했는데 그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 구별된 말씀을 말하다. 그걸 흙이라고 했어요. . 여기에서 아담이 나오죠? 그러면 이 진리의 말씀에서 비로소 하느님의 완성품인 진리인 아담이 나오는 거죠? 그런데 성경을 잘 보면, 개정성경은 그냥 땅, , 티끌 이렇게 번역을 해놓았는데 아다마로 만드는 게 아니라 이 아다마에서 나온 먼지, 아파르로 아담을 만든다. 그래요. 원어를 보면. 히브리 원어를 보면. 그런데 아파르가 뭐예요? 먼지죠? 한번 보세요.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을 말하는 것으로 진리를 전하는 걸로 (행위가 아니네요). 아담, 하느님의 구별된 진리, 말씀인 아담을 만드는데;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사람을 만드는데 거기에 도구로 쓰인 게 뭐냐 하면 아파르에요. 이걸 사람들이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땅, 흙에서, 흙으로 하느님이 사람을 만들어야 되는데 이걸 만들려면 반죽을 해야 되니까 이걸 이렇게 모아서 이걸 아파르라 그러고 이 아파르로 아담을 만든다. 그것도 열심히 공부한 주석가들만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안 그러고 딴 사람들은 그냥 다 혼용해서 써버려요. 아다마, 아파르, 아담 다 똑같이. 아니에요. 다 다른 단어에요. 하느님의 말씀을 말하여 아담을 만들어야 되는데 그 하느님의 말씀을 흙이 처음 받을 때는 그 진리가 무엇으로 주어지게 됩니까? 율법으로 먼저 주어지게 된다니까요. 아니, 율법으로밖에 인식이 안 돼요. 피조물은 그 진리를 못 담는다니까요. 고걸 아파르라 그래요. 그걸 먼지라고 그래요. 그런데 율법으로 하느님의 진리를 말하는 아담을 만들려고 진리를 줘야 되는데 얘네들이 그 진리를 못 담아. 그래서 아파르를 줘요. 이걸로 이제 만들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율법을 진리로 깨달아 알아, 하느님의 구별된 진리, 말씀. 아담이 되었어요. 이게 목적이란 말에요.

그러면 아담이 된 자들은 하느님의 그 말씀을 말하는 그것을 아파르로 들어서 내가 진리로 아담이 됐으니까 중간에 이 율법으로 받았던 그거는 이제 지워야죠? 그게 잘 안 지워진단 말에요. 그런데. 율법주의라는 게. 그래서 주님이 열둘을 제자로 보내면서 너희들 율법주의, 이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에게 가서 그 율법주의, 먼지라는 거를, 그들이 받지 않으면 그들이 먼지니까 그들을 박박 문질러 지워버려. 이런 뜻이에요. 이런 말을 준 거예요, 그래서. 한 번 보세요.

 

마태복음 105. 5 예수께서 이 열 두 사람을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분부하셨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라.( 상징적인 거라 그랬어요. 열둘은? 칠십도 마찬가지예요. 칠십 명, 열두 명,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냈을 거예요. 그러나 의미가 있는 거예요.) 6 다만 (꼭 반드시에요.)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 가라. 14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을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 말을 듣지 않으면 그들은 뭐예요? 아파르에 머무는 거네? 아파르가 뭐? 먼지, 그럼 그들은 먼지야. 율법, 먼지에 속한 먼지니까 어떻게 하라 그래요? 떨어버리래요. 이 말을 히브리어에서는 노아의 여덟 식구 이외의 기식하는 걸 다 죽여 버렸다, 라는 말이 있죠? 이게 그 단어에요. 사포로 박박 밀어서 아주 흔적도 없이 없애버리는 거. 먼지로 떨어버려라. 이런 말이에요. 말 안 받으면 먼지로 떨어버려. 아파르. 그러니까 우리는 그게 잘 안 지워지죠? 안 떨어지죠? 그러니까 여기서 평생에 듣던 말씀, 나 항상 듣던 말씀이라고 바꾸었던가? 아까 보니까. 그 평생에 듣던 말씀 또 들려주세요. 또 들려주세요. 하면서 그거 떨어버리는 거예요. 율법주의, 인본주의의 그 선악체계 속의 아담의 근성. 그 먼지 떨어버리는 거예요. 빡빡 밀어서. 잘 안되죠? 그 때 또 하느님께 감사하는 거예요. 어떻게 이런 자를 하느님 당신의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건져내셨습니까? 그럼 되는 거예요. 그러면 또 한 번 떨어져 나가는 거예요. 먼지로 떨어져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 하느님의 그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는 거 그러려면 나의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되는 거잖아요? 그 감격, 찬송 우리가 살 수 있는 방법은 그거 밖에 없어요. 우리가 이 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그거 밖에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하느님이 나에게 무엇을 하셨는가를 알아야지 내가 자꾸 하느님께 뭘 하려고 하면 안 돼요.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라니까. 자꾸 하느님을 사랑한대. 하느님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사랑할 거냐고요? 자꾸 섬기겠대. 드리겠대. 그러니까 예언서가 그러는 거예요. 너희들이 드림으로 망한다. 그래요. 드리는 건 좋은 거 아니에요? 그런데 너희는 드림으로 망한다. 자꾸 드려 뭘.

 

여러분,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거라니까요. 그런 여러분의 감정적, 어떤 그런 애정, 이런 거를 여러분 안에 가지라는 게 아니에요. , 그 하느님을 어떻게 감정적인 애정으로 사랑하느냐고요? 보이지도 않고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건 허상이에요. 헛 거라니까요. 모든 종교가 하느님을 사랑해. 하느님을 섬깁니다. 이슬람교의 알라, 힌두교의 소 다 하느님이에요. 동양학에서는 환인. 제왕이나 삼국유사 같은데 보면 桓因이 하느님을 번역한 말이라고 해요. 하느님이에요. 다 하느님이라고 불러. 그리고 그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그 하느님이 시키는 어떤 것을 하는 걸 올바르게 사는 인간들의 삶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모든 종교가 다.

그런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그 하느님이 진짜 하느님이에요? 아니죠? 그런데 그들이 애정을 갖고 진짜 사랑한다니까요. 그럼 그 사랑이 뭐냐고요? 가짜에요. 그건요. 조작한. 만들어 낸 가짜. 성경이 여러분에게 그런 사랑하라 그러겠느냐고요. 그런 가짜 사랑. 다른 이들도 얼마든지 감정으로 조작해 낼 수 있는 그런 거. 그 사랑 하라그러겠느냐고. 아 있지도 않은 걸 사랑한다는데? 진짜 애정을 갖고 있다니까요. 아니라니까요. 하느님이 여러분을 사랑하는 걸 잘 받아서 그래요, 하느님. 제가 하느님 사랑 안 받으면 저는 존재도 아니네요. 흙이네요. 아파르네요. 하고 알면, 그래! 네가 나를 알아주는구나, 하느님이 네가 날 사랑하는구나! 라고 이야기해 주는 거예요. 여러분이 뭘로 그 하느님을 섬길 거냐고요? 우린 그걸 너무 몰라요. 오죽하면 무당들 삼진제속 거리의 그 제속도 하느님이에요. 무당들이 섬기는 것도 하느님이라니까요.

, 지금 여러분은 어떤 말을 여러분 안에 갖고 계십니까? 어떤 말이 여러분을 조종하고 있습니까? 그 말의 숙주조종에 의해서 여러분은 치사율 100%의 저주의 길로 갈 수도 있고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갈 수도 있어요. 여러분을 이끌고 가는 법이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까? 죄와 사망의 법입니까? 생명의 성령의 법이 돼야 돼요. 그들에겐 자유가 있다니까요. 방종이 아니라. 자유가.

그걸 말씀 속에서 확인하시란 말에요. 아니 여러분, 기생충도 중간숙주 안에 있다가 아, 여기는 내가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니구나. 그러고 그 중간숙주를 죽이고 종숙 주에게로 간다니까요. 목숨 걸고. 아니 기생충만도 못하냐고요? 왜 이 호 코스모스에 갇혀서 여기가 좋사오니 이러고 있느냐고요? 다들? 율법에, 호 코스모스에 갇혀 있으면 안 돼요. 그럼 기생충으로 사는 거예요. 어떻게? 하느님 당신이 갖고 있는 능력이나 주시고 당신이 준비한 천국이나 주시고 내가 알아서 당신 섭섭지 않게 해드릴게. 이게 기생충이라니까요. 이게.

 

진리는 반드시 여러분을 품고 있는 과정으로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중간숙주를 죽이게 되어 있어요. 율법을. 거기에 묶여 있으면 안 돼요. 오늘날 교회, 그리스도교가 여기에 다 묶여 있다니까요. 그런데. 기생충처럼. 그리고 그걸로 가진 기행이나 능력이나 이런 것만 빼먹으려고 하고 앉아 있으니,, 아닌 거예요. 그걸 종교라 그래요. 치사율 100%. 톡소, 그거 보다 더. 무서운 거. 연가시보다 무서운 거. 비 진리란 말입니다. 너무 뭐 하려고 그러지 마시고 진리가 이끄는 대로 그냥 사시면 돼요. , 그 율법을 뚫고 나와서 진리라는 영원한 종숙주 안에서 영원한 안식으로 사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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