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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육신의 생각으로 죽어야 (로마서 8 : 6-7.)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9-08 조회수2,607 추천수0 반대(0) 신고

육신의 생각으로 죽어야 영의 생각으로 산다.

로마서 8 : 6-7.

6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 7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은 하느님의 율법에 복종하지도 않고 또 복종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원수가 되고 맙니다. 아멘.

 

마귀가 숨어있는 누각, 마귀가 숨어있는 성전, 나쁜 일이나 음모가 끊임없이 행해지고 펼쳐지고 있는 그 악의 근거지. 겉으로는 근사하게 아주 냉정하게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아주 나쁜 일이나 음모가 끊임없이 들끓고 있는, 행해지고 있는 악의 근거지. 그게 복마전입니다. 요즘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아주 다방면에서 아주 친근하게 쓰이고 있는 그런 단어죠?.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 만들어 놓은 것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그건 망하는 거예요. 곧이요. 그렇다고 공산주의가 좋다는 것도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인내 천, 사람이 곧 하늘이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하늘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렇게 인간이 중심이 되어 인간들만을 위한 인간의 세상 그것을 구현하느라 여념이 없어요. 그러한 옛 성전, 그것이 지금 이 세상의 실체죠? 그리고 그러한 선악과 하에 그 율법주의의 이 세상, 인본주의의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인간들. 그 아담 무리들을 성경이 뭐라 그럽니까? 마귀라고 그래요.

이 율법주의 세상 속에서 인간이 주인이 되는 이 세상 속에서 그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존재를 성경이 마귀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사회 각 분야에서 복마전이라는 그런 평가가 자가 평가가 안 나오면 이상한 거예요. 마귀가 사는 곳, 마귀들의 세상 이렇게 자가 평가하는 거예요. 서로 나는 아니고 상대는 그렇다, 라고 이야기하지만 서로를 향하여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건 인간들의 이 세상의 자가 평가인 거죠. 복마전. 마귀의 성전입니다.

 

모두가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해요. 겉으로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나 말고 모든 이들이 평등하고 공평한 세상을 사는 것, 이런 것을 구현하고 추구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내가 왕이 되고 싶다, 내가 하느님이 되고 싶다, 라는 꼼수를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곳이 어찌 복마전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마귀들이 자기들이 중심이 되어 자기들이 하느님마저도, 신마저도 부리려고 하는 그런 복마전의 총화가 어디겠어요? 말 그래도 마귀가 숨어있는 성전, 교회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비 진리, 곧 거짓말, 대적하는 말 이걸 거짓말이라고 해요. 성경이. 성경에서는 가짜, 진짜 어두움, 빛 이런 것들을 나쁘게 갈라놓지 않습니다. 진짜를 설명하기 위해 진짜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모형으로 이렇게 갖다 놓으면 그걸 가짜라 그래요. 완전히 다른 게 아니라. 그렇지 않아요? 그게 가짜, 그거 나쁜 거는 아니에요. 그걸로 진짜를 알아먹으면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를 비슷하게 흉내 내어 놓은 것을, 그 모형을 그리스도로 오해해버리면 이걸 엔 타이 크라이스트라 그래요. 엔타이 크라이스트는 하느님을 대적하는 뿔 달린, 삼지창 든 어떤 마귀새끼가 아니라 그냥 그 하느님을 흉내 내는데 그거는 아닌 거. 그걸 엔타이 크라이스트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여러분이 엉뚱한 하느님을 배우면 여러분은 적그리스도를 믿는 게 되는 거고 그의 한 부분이 되는 거예요. 적그리스도는 딴 데 있는 게 아닙니다.

 

, 그렇게 비 진리, 거짓말, 대적하는 말이 회자되는 율법주의의 그리스도교가 바로 복마전의 총화인 거죠. 성경은 그러한 비 진리를 설교하는 자들을 거짓 예언자라고 그래요. 거짓말만 하는 게 아니에요. 다 하느님을 이야기하고 성경을 이야기한다니까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거짓 예언자가 왜 절에 가 있겠어요? 그건 중이지. 거짓 예언자는 여기에 와 있다니까요. 엔타이 크라이스트는 (anti christ)교회에 와 있다고요. 밖에서 나도는 그런 무리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걸 거짓 예언자라 그래요. 그 거짓 예언자는 요한묵시록에 보면 짐승과 용의 라인으로 이어지죠? 그 전체를 총칭하여 사탄이라 그래요.

saran이라는 단어 자체가 뱀의 말, 아래의 말로 분석하여 주면 satan 이에요. 그러니까 그건 의미 값이고, 그 사전적 의미는 대적자에요. satan, 머리에 뿔 달리고 그냥 이상한 영화에 나오는 그 입이 확 벌어졌다가 닫히기도 하고 이런 거가 사탄이 아니라. 그런 만화 같은 걸로 성경을 읽으려고 하시면 안 돼요.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에 대적 자를 성경 전체가 그냥 사탄이라고 말해요. 그거 고유명사 아닙니다. 어떤 존재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에요. 그래서 반드시 해석해줘야 됩니다.

오늘날은 어때요? 성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아빠라고 부르더라고요. 친한 척하는 거예요. 자기 아버지도 아빠라고 안 부르면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면서 친한 척하는 거예요. 그렇게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 아버지는 분명 천지의 주재이신 하느님일 거라고 굳게 믿어요. 이스라엘이 굳게 믿고 그 하느님 아버지를 만들었는데 소였죠? 그 금소는 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뱀 풀어서 그들을 다 물어버린 거예요. 네 하느님 만들어 봐, 그랬더니 마귀를 만들어 놨다니까요. 그게 사탄이에요. 대적 자란 말입니다

 

오늘날도 교회에서 전해지는 하느님은 진리의 하느님이 아니라 비 진리 속의 가짜 하느님. 즉 마귀에 불과한 거예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가인들도 자기들이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 그분이 하느님이 아니라 마귀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주님이 그랬잖아요. 너희들이 믿고 있는, 아니, 목숨 걸고 하느님 섬기던 사람들 아닙니까? 그 사람들이. 로마 사람들이 로마 황제의 그 구조된 상을 성전에다가 붙이려고 했더니 바리새인들 전체가 전부 무릎 꿇고 성전 마당에 앉아서 우리 목 다 치고 넘어가라고 그랬다니까요. 하느님 아버지를 위해서요. 뭐 다른 신 섬겼어요? 그들이? 그런데 예수님이 와서 너희들의 아버지는 마귀야! 라고 한 건 너희들이 믿는 그 하느님은 사실은 비 진리야. 마귀야. 율법은 마귀야, 라고 이야기 한 거예요.

, 마귀, 너희 아비는 마귀다, 라고 했을 때. 그들을 또 누구의 자식이라고 하느님이 불렀죠? 독사의 새끼라고 불렀죠? 그들은 뱀의 새끼이기도 하네요? 그들의 아비는 뱀이기도 하네요? 그리고 그 뱀이 곧 마귀네요? 그 뱀이 곧 사탄이네요. 그럼 그 뱀은 요한묵시록에서는 옛 뱀이라고 그러니까 창세기의 그 뱀이겠죠? 그런데 사실 그 뱀이 틀린 말 한 거 하나도 없습니다. 뱀이 뭐라 그랬어요? 너 이 선악과 먹으면 선악의 하느님을 보게 된다, 그랬어요. 그 하느님은 선악의 하느님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걸 먹으면 너희들은 너희의 하느님을 선악의 하느님으로 보게 될 거야. 그게 죽음이에요. 마귀가 똑바로 얘기했다니까요. 그런데 그걸 곡해하여 그걸 홀랑 먹어버리면 그게 뱀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통하여 그 선악의 하느님을 내가 만나면 죽는 거구나, 그건 심판의 하느님이니까. 그럼 먹으면 안 되는 거네, 라고 알아먹으면 그게 진리라니까요. 아무튼.

그 창세기의 그 뱀이 옛 뱀이에요. 주님이 그랬어요. 너희 아비는 뱀이다. 너희들은 그러니까 독사의 새끼야, 라고 얘기했단 말에요. 그런데 오시더니 내가 뱀이 되어 죽을 거야. 그래요. 그리고 내가 율법이 되어 죽을 거야. 그랬단 말에요. 그럼 율법이 뱀이고 뱀은 예수네요?

,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이 율법으로 곡해되면 그게 바로 선악과 따먹게 만드는 뱀의 말이 되는 거고 주님은 그 뱀의 율법으로 죽어버리시므로 말미암아 진리만을 남기시는 분이에요. 그분이 질그릇 안에 진리를 담고 오신 분이죠? 그런데 십자가에서 육을 삭제당하셨어요. 그러면? 진리는 영원한 거니까, 진리는 남겠네요? 그렇게 육이 진리를 담고 와서 참 생명은 진리입니다, 라고 증명하고 죽게 되면 그걸 부활이라 그래요. ‘아나스타시스그게 영으로 산다, 그래요. 내 안의 진리가 영이니까. 어렵지 않아요.

 

교회 안에서 진리가 진리로 전해지지 못하면 거기가 뱀의 소굴이에요. 복마전, 마귀의 누각이란 말입니다. 마귀, 마귀 그러니까 자꾸 영화나 만화에서 본 그런 존재를 떠올리시는 거 같아서 제가 노파심에서 한 번 다시 강조를 하는데요. 성경은 하느님의 말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거꾸로 사용하는, 아니면 표피적으로만 이해하는 그러한 모든 것들을 다 마귀의 라인으로 몰아넣어 버려요. 구약에서 악령이라고 번역이 된 그런 단어가 히브리 원어로 르와흐 엘로힘 라아예요. 그걸 악령이라 그래요. , 르와흐는 뭐예요? 성령. 엘로힘은 뭡니까? 하느님. 그럼 르와흐 엘로힘은 하느님의 영이네요.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영은 곧 말이고 생명이라 그랬습니다. 그럼 하느님의 말씀이라 그러자고요. 그런데 라아는 뭐예요? 잘못 사용하다, 이런 뜻이에요. 나쁜, 이런 뜻이에요. 그러면 나쁜 하느님의 말, 잘못 사용되는 하느님의 말이 곧 뭐다? 악령이라고 번역을 해요. 그렇게 쓴다니까요. 히브리사람들이. 그럼 헬라어는 어떻게 쓰나 봐요. 악령, 귀신, 마귀를. ‘프뉴마 다이모니오’, 프누마는 뭐예요? 성령. 다이모니오는? 악한. 악한 말. 나쁜 말. 그걸 귀신이라 그래요. 악령이라 그래요. 그걸 뭉뚱그려 사탄, 대적 자라고 쓰는 거예요.

대적 자, 그 사탄이란 단어가 싸탄, ‘씬 테드 는이렇게 쓰거든요. 그걸 그대로 음역하여 넣은 거거든요. 그게 아래 뱀의 말로 분석된 것이런 뜻이에요. ‘테드가 뱀이거든요. 그러니까 아래 뱀의 말로 그냥 알아들어 버리면 그게 곧 사탄이에요. 그러니까 다른 데 가서 찾을 필요 없다니까요. 모든 건 내 안에서 먼저 찾아야 돼요.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며요? 그러면 마귀 중에 제일 나쁜 놈이 나네요? ? 그런데 어디가서 사탄을 찾아요? 그럼 죄인 중의 괴수면 내가 제일 무서운 존재네? 그런데 뭐 무서워하느냐고요. 내 안에서부터 찾아야 된다니까요. 꼭 우리 인간들은 나를 꼭 제외시켜놓고 거기서 하느님도 찾고 예수도 찾고, 마귀도 찾고 이러니까 나와 관계없는 관념이나 개념으로만 복음이 동동 떠다니는 거예요. 그건 복음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요한묵시록을 보면 비 진리의 라인은 용, 짐승, 거짓 예언자. 이렇게 쭉 내려옵니다. , 짐승, 거짓 예언자. 진리 쪽은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내려오죠?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을 그때 당시의 히브리 사람들은 7, 7, 7로 표현했어요. 7은 안식의 수, 완성의 수이고 3은 하늘의 수였으니까. 그들에게. 그래서 7, 7, 7. 그러나 그걸 비슷하게 흉내는 내는데, 능력도 있어요. 힘도 있어. 그러나 그건 아닌 거를 최고까지 올라갔다 그래서 7은 아닌데 그 위에까지 올라갔다고 해서 6, 6, 6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요한묵시록 13장이라고요.

자 그러면 666의 라인의 거짓예언자, 그 안에는 누구도 포함되어 있어요? 거짓예언자가 뭐예요? 거짓으로 그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 그걸 전하거나 살면 그게 거짓예언자죠? 그렇잖아요? 예언자라는 말, ‘라비라는 말 자체가 그 말을 전하는 자니까. 그런데 거짓예언자면 그 진리가 아닌 가짜 비 진리를 듣고 전하는 거.

불경을 전하면 중이고, 거짓예언자는 거짓말을 전하는 교회 안의 어떤 설교자나 그런 성경연구가 이걸 다 거짓예언자라 그래요. 그러면, 성령 안에 속해 있는 자는 누구예요? 성령 안에 누구 있다? 교회 있다. , 내 안에 성령 있고 성령 안에 나 있는 거잖아요. 그러면 보세요. 비 진리의 라인도 어떠한 무리를 담고있고, 그리고 그 전체를 가리켜 사탄이라고 그러고. 요쪽 진리의 라인도 그게 전체로 하나로 연합되어지고 요거를 하느님의 백성, 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비 진리의 라인의 맨 밑에 있는 이들이 맨 위의 그걸 뭐라고 불러요? 아버지라고 불러요. 그럼 여기에서, 이 교회는 그 맨 위의 성부를 뭐라고 불러요? 아버지라고 불러요. 그러면 이 진리에 속해 있는 그 사람들이 이 비 진리에 속해 있는 이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를 뭐라 그래요? 사탄, 마귀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너희는 마귀의 자손이다 그러지요. 그러면 이 비 진리의 사람들이 이 진리의 사람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하느님을 얘기하면 뭐라 그럴까요? 그걸 보고? 대적 자니까. 사탄이라 그래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디 가서 이 진리를 얘기하면 너 이단, 그러죠? 그러니까 이단 소리 한번 안 들어 보면 그건 진리를 제대로 전해보지 않은 사람이에요. 당연히 그 소리 듣게 되어 있다니까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보고 그러는 거예요. 진리의 순전한 실체이신 그분 보고 네 아버지 바알세불이지?’ 그랬다고요. 그랬더니 예수님이 네 아버지 마귀지?’ 그랬다니까요. 서로 사탄이라 그러는 거예요. 그게 사탄이 대적 자란 뜻이란 말에요. 반드시 이런 결과가 우리에게도 나타나야 돼요. 너 뭔가 지금 잘 못된 데에 빠진 것 같아. 이런 말 들어봤죠? 그건 네 아버지 사탄이야, 이런 뜻이에요. 그거요. 너 대적 자야. 그거 진리 아닌 거 같아,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사탄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무슨 뭐 그런 거, 오멘이나 뭐 이런 데 나오는 이상한 어떤 존재 이런 것들이 아니라 그 진리를 진리로 알아듣지 못하고 그것이 진짜 인양 열심히 자기의 몸을 에너지 삼아 불태우는 자들. 이게 사탄의 무리예요. 인간들은 그 뜨거운 거를 좋아해요. 그러니 그들은 반드시 지옥 가게 되어 있어요. 차든지 덥든지 하나 선택해!! 그러면 무조건 뜨거운 거 선택한다니까요. 펄펄 불 때는 거 좋아해요. 열정 내는 거.

 

아니에요. 여러분은 냉정하셔야 돼요. 냉정이 차갑고 나쁜 게 아니라 냉정이라는 말 자체가 순결하고 깨끗한 거라는 뜻이에요. 한문 자체도. 뜨거운 거는? 나중에 그 뜨거운 데로 아예 보내준다니까요. 냉정을 잃고 뜨겁기만 하면.

그게 사도 바오로의 열심이었잖아요. 열심히 했는데 예수님이 오더니 왜 나를 핍박하니?’ 그랬다고요. 엉터리 열심이에요. 예를 하나 들어드리죠. 민수기 2221장 보세요. 21 발람은 아침에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모압 고관들을 따라 나섰다. (발람은 예언자입니다. 가짜죠? 나쁜 말을 전하는 자예요. 그 나쁜 말을 전하는 자, 사탄, 대적 자죠? 그 발람의 이야기에 어떤 이야기가 붙어 있는지 보세요)

22 하느님은 발람이 가는 것을 보시고 몹시 화가 나셨다. 야훼께서 보내신 천사가 (유앙겔리온. 앙겔로스들을 보냈어요. 그거는 하느님의 말을 갖고 전하는 자란 뜻이에요. 날개 달린 어떤 존재가 아니라. 그런 징그러운 거 상상도 하지 마세요. 사람 뒤에 닭 날개 같은 게 달렸다고 생각해보시라고요. 그런 것들과 천국에서 영원히 같이 산단 말에요? 우리가? 그 깃털은 어떻게 할 거예요? 누가 치울 거예요? 그거. 그런 거 아니란 말에요. 야훼의 사자가 하느님이 보내신 어떤 진리의 말을 가진 자가 그를 가로막았다고 하는데, 그 막았다고 하는 단어가 사탄이에요. 그럼 야훼의 사자를 성경이 지금 사탄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나쁜 겁니까? 발람이 좋은 놈인가요?) 의 길을 가로막고 섰다. 마침 발람은 나귀를 타고 두 종을 거느리고 있었다.

시편 1091-5절을 보세요. 1 내 찬미의 하느님, 침묵을 깨고 나오소서. 2 사악한 자들이, 사기치는 자들이 입을 벌리고 달려듭니다. 혀를 놀려 거짓말을 퍼붓습니다.(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하느님의 입을 열어 진리를 토하듯 비 진리도 입을 열어 궤사를 토해냅니다. , 요거는 메시아 시, 예수님의 일을 다윗이 미리 겪고 다윗이 지금 쓴 시거든요. 이건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해요. 비 진리와 진리의 싸움이에요. 악한 말, 비 진리, 저희들이 궤사한 입을 열어 그 말로 나를 치며 너 가짜야, 그거 아니야, 너무 과격해, 너무 편협해 이런 식으로) 3 증오의 말들이 주위에서 들려오고 까닭없이 나를 공격합니다.(나는 진리만 얘기했는데 괜히 나를 미워해. 내가 해코지 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4 그들이 우정을 원수로 갚아도 나는 그들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 푸로슈코마이) 5 그들은 선을 악으로 갚고 사랑을 미움으로 보답합니다. 6 "부랑배를 내세워 그를 치자. 그 오른편에 고발자를 세우자.

저희가 나를 대적한다, 라고 할 때 그 단어도 싸탄이고 그러니 하느님 저희에게 대적을 오른 편에 세우소서. 그 진리의 말씀으로 그들의 대적으로 세우소서도 사탄이에요. 그럼 누가 사탄입니까? 지금? 여기서? 거짓말하는 그들이 사탄이에요?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진리의 오른 편으로 서는 게 사탄이에요? 둘 다 사탄이라고 써 놓았는데 여기에다가.

 

사탄은 그런 거 아니에요. 나와 상관없는 그런 어떤 무시무시하고 악한 존재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비 진리. 그것들이 세력화되면 그것이 대적 자가 되는 거예요. 하느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자. 내가 제일 무서운 자인 거예요. 그렇게 될 수 있다니까요. 내가 제일 더럽고 악한 자라니까요. 죄인 중의 괴수.

그러니까 사탄이나 마귀 같은 걸 너무 동화나 만화처럼 내 밖에서 찾으려고 하지 마시고 내 안에 하느님을 대적하는 비 진리가 들어와 있지 않은가를 먼저 고민해보시란 말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정말 비 진리일 때는 내 아버지는 바알세불이에요. 그게 세상 임금이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세상 임금이 되어 죽었단 말이에요. 그걸 아는 나에게는 그 세상 임금 없단 말입니다.

중요한 건, 모든 인간이 이 세상에 올 때 비 진리의 영역 속에 비 진리적 존재로 와요.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그러죠? 하느님이 일부러 그렇게 보내십니다. 원래 하늘의 의인들이 이 땅에 죄의 모양을 입고 와요. 그래서 죄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묵시의 완료된 하느님 나라 밖의 이 현상계의 모든 건 다 모형이기 때문에 그 자체를 죄라 그래요. 성경이. 그 모형 자체를 죄라 그래요. 그게 나쁜 게 아니에요. 거기서 머물면 나쁘죠. 그게 소돔과 고모라고. 나쁜 거지만 그것으로 하늘의 진리를 알면 그건 나쁜 게 아니란 말입니다.

하여튼 우리는 성경의 표현대로 죄악된 세상 속에 죄인으로 와요.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 그랬어요. 여러분 이 땅에는 의가 있어요? 없어요. 그러면 그 의를 뭐로 설명해줘요? 이 땅이 갖고 있는 거, 창세기 1장에 뭐라고 나와요? 혼돈 공허 어두움, 이거 밖에 없어요. 그리고 이걸 흑암이라 그러고. 전체를 흑암이라 그러고 이걸 아래 물, 바다, 수면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 갖고 있는 건 뭐예요? 어둠, 혼돈은 뭐다? 틀도 없고. 공허는? 콘텐츠가, 내용이 없는 거. 그러니까 없는 거네. 공허네? 그래서 그걸 안 이들이 그러는 거죠. 에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자, 라고 하는 거예요. 허무한 데. 없는 거예요. vanity, 헛 거. 거기에 굴복하면, 거기에 묶여버리면 그게 죽는 거예요 곧. 그러니까 이 세상이 갖고 있는 건 어둠, 혼돈, 공허, 죄밖에 없어요. 하늘의 의를 뭐로 설명해줘요?

 

이 죄된 세상에 온 죄인들에게? 죄를 갖고 설명해줘야 돼요. 그래서 선악과가 먼저 나와야 된다니까요. 그래야 그 선악과가 뭔지를 알고, 아이고 이거군요? 이거 먹으면 안 되는 거였네요? 라고 알면 그걸 생명나무 열매를 먹었다고 쳐주는 거거든요.

마찬가지예요. 이 세상에 그 하늘의 기쁨이 있어요? 그 하늘의 기쁨은 없어요. 이 세상에 있는, 우리가 잠시 잠깐 겪어 볼 수 있는 그런 기쁨은 하늘의 기쁨의 모형이에요. 그 기쁨이 아니라고. 그러면 하늘의 그 기쁨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갖고 있는, 요한묵시록에서, 나중에 그 하늘과 새 땅에는 없을 거라고 한 목록 중에 어떤 거로 그 기쁨을 설명할 수 있어요? 슬픔! 애통, 고통. 그건 있다며요. 그래서 나중에 그거 없어진다면서요? 그럼 그게 뭔지를 알면 아, 이게 아닌 그게 기쁨이겠군요? 라고 알 거 아니에요? 그럼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그 기쁨을 배울 수 있는, 그 기쁨을 깨닫고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뭐다? 슬픔과 애통이 뭔지를 확실히 아는 만큼 그걸 그만큼 희망하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그런 일들이 닥치는 거예요. 왜 나만 미워해? 가 아니라 나를 이토록 사랑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니, 남들은 아프지도 않은데 난 이렇게 아프고 나는 우리 교우들 얘기 들어보면 저런 병도 있나? 이런게 너무 많아요. 살고 싶지 않게 만들어버려요. 그러나 그게 아닌 어떤 것이 있다, 라는 걸 하느님은 이 땅에서 가르쳐주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은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 속에 죄인으로 당신의 백성을 보내는 거예요. ? 그거 아닌 어떤 것이 있다, 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여러분은 이 세상에 와서 그걸 배우고 가는 거란 말입니다.

그들이 육을 입고 이 세상에 와서 그 육의 모든 시도를 다 허락하세요. 그리고는 그게 진짜 너희를 행복하게 해주니? 를 물어요. 그게 진짜 성공일까? 그게 진짜 번영일까? 그게 진짜 문명의 성숙일까? 아니라는 걸 반드시 증명하세요.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이성으로도 이해하게 하신다니까요. 그거. 그러면 그거 아닌 어떤 거, 다른 것이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그걸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희망으로 심어주시는 거예요. 쑤셔 박아 넣으신다니까요.

 

, 그렇게 우리는 이 육을 삭제당하고 부정당하는 그런 삶을 이 역사 속에서 살게 돼요. 그거 아니고, 그걸로 해내는 어떤 업적이나 성공 그런 거 아니고 너희들은 영으로 사는 거야. 이거 가르쳐주는 게 이 세상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게 교회여야 되는 거예요. 너희는 영으로 사는 거야. 그런 거 에너지 삼아서 너희들이 너희 가치 챙기면서 사는 보람 느끼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런데 성당에 와서 전부 보람 있는 일을 찾아요. 살고 싶어 가지고. 그렇게 우리가 육이 죽어야 산다는 걸 깨닫고 아, 맞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은혜로 그 생명을 붓지 않았으면 저는 그냥 죽은 존재죠. 라고 아는 그걸 죽었다. 그래요. 다나토스, 좋게 죽었다. 그러면 그게 바로 생명이고 그걸 평화라 그래. 이게 6절이에요. 본문의 6.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

그러니까 본문 6절은 단순히 육과 영, 사망과 생명의 대조가 아니라 성도는 그걸 하나의 과정으로 볼 수 있어야 돼요. 육의 생각으로 죽고, 그러면 그게 바로 영으로 사는 거고 그게 생명이며 그걸 평화라 그래.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나 너희가 육으로 죽는대. 모든 인간은 다 육으로 죽습니다. 결국 그렇게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래 그럴 줄 알았지. 이렇게 죽는 거지. 나는 이런 존재지. 모든 인간이 숨이 끊어지는 순간 그걸 알아요. 그러나 어떤 존재는 그래, 이렇게 죽어야 사는 거야, 라고 가고. 어떤 존재는 어떡하지? 하며 죽는 거예요. 다 멸망이에요. 결국은. 그런데 그렇게 육의 생각으로 죽으면 영으로 살아요. 살고, 그 영의 경향은 반드시 우리에게 평화란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경향이라는 이 단어로 번역이 된 푸흐오네마는 추적해서 올라가면 푸흐렌, 푸흐레쓰까지 올라가게 되는데 그 단어들은 전부 어떤 거에 이렇게 고착되다. 묶이다, 빠져나가지 못하다, 이런 뜻이에요. 고삐에 묶이다, 울타리 안에 갇히다. 그렇게 정해져서 빠져나갈 수 없는 그런 고정된 지혜, 그런 거요. 그러니까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그러니까 육의 경향은? 뭐라고요? 사망이에요. 육신으로 반드시 다 죽어요. 다 죽어.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렇게 죽어서 살고. 어떤 이들은 그렇게 죽어서 완전히 죽어버리는데 그들을 7절에서 하느님의 원수, 그래요. 대적 자에요. 대적 자. 그걸 성경이 사탄이라고 쓴다니까요. 육의 생각에 머물러버리면. 육의 생각 그러면 뭐 여러 가지를 떠올리시겠는데 다른 거 다 필요 없어요. 그냥 율법, 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육의 생각? 율법. 영의 생각? 진리. 이렇게 바꾸시면 돼요

육으로는 죽고 영으로, 진리로 사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 평화라고. 히브리어로? 샬롬, 샬롬이라는 단어 자체가 진리로 분석하여 가르치는 거, 이게 그 자음 값이거든요. ‘쉰 라메드 멤이니까 분석하여 가르쳐진 진리. 이걸 평화라 그래요. 이거를 헬라 사람들은 어떻게 이 단어를 썼느냐 하면, 헬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멍에라는 개념은 항상 소 두 마리가 함께 끄는 거라, 그랬죠? 그래서 이 소가 다른 방향으로 가면 한 멍에를 못 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한 멍에 메지 말라는 건 그 사람들과 친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다른 방향으로 가는데 어떻게 그 멍에를 함께 매니? 이런 뜻이에요. 그럼 누구랑 같이 멍에를 매야 돼요? 예수님이 내 멍에 같이 메자 그러잖아요. 특히 하느님과 한 멍에 매고 하나로 묶여, 연합되어서 한 방향으로, 진리의 방향으로 걸어가면 그 모양을 에이레네라고 해요. 그게 평화에요. 그것을. 보세요, 그 생명을 얻어 그게 진리군요. 라고 알면 그 사람이 바로 평화에 이르게 되는 거예요. 그게 6절이란 말입니다.

 

뭐 혼은 마음이고 감정이고, 육은 고기 덩어리이고, 성경 어디에 그런 말이 나와요? 그렇지 않아요. 성경은 그렇게 쓰지 않습니다. 이 육을 갖고 있는 인간, 이거 자체로는 죽음입니다. 죽어 있다. 그래요. 그런데 그들 안에 생명의 성령이 들어와서 이 육을 죽은 것으로 이렇게 다나토스로 죽여 내면 육이 죽었으니까 여러분은 부활한 거 아니에요? 영으로 부활했다며요? 그런데 살과 피가 있잖아요. 지금? 그러나 우리의 육은 죽었다, 라는 의미에서 그거는 하느님 앞에 절대로 흠있는 제물이기 때문에 상납될 수 없다는걸 아는 걸 육이 죽었다, 라고 하고 육이 죽었으니까 당연히 뭐만 남았어요? 진리, . 그가 영으로 살았다, 라고 하는 거예요.

은사 체험하는 사람들이 뭐 본 거처럼 이렇게 자기가 죽고 나니까 쑥 뭐가 올라가갖고 아래에 있는 자기를 봤다고 그러는데 무슨 상관이냐고요? 그게. 그게 영이에요? 그건 뭐예요? 그게? 그런 건 궁금해 하지도 마세요. 그렇게 시간이 많으세요? 살고 죽는 문제가 진짜 내 고민이라면 그게 왜 궁금해요? 뭐가 안 믿어지니까. 그런 것들이 궁금한 거예요..

루가복음 2436절 보세요. 36 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나타나 그들 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거는 예수님께서 그 평화라는 그 복음의 내용을 설명해주셨다, 라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여기에다가 또 그걸 설명하려면 처음부터 다시 다 써야 되니까.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랬더니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서 그걸 유령으로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그래요. 38 "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의심을 품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아라. 틀림없이 나다! , 만져 보아라. 유령은 뼈와 살이 없지만 보다시피 나에게는 있지 않느냐?"

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 영이야, 나 부활했어. 나 살과 뼈 있다. 이건 살과 뼈를 갖고 있는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그렇게 영으로 살아날 수 있다는 거예요. ? 그리스도의 영인 그분이 이제 오실 거거든요. 보여주는 거란 말입니다.

이 육은 나와 아무 상관없다, 그러면 철저한 금욕주의나 아니면 완전한 무 율법주의로 빠져버려요. 이 육에 묶이면 은. 그런 거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 몸을 갖고도 영으로 부활할 수 있다니까요. 그 육이 이건 죽어 마땅한 거고, 아니, 죽은 거네요. 하나님. 이 죽은 거가 내놓는 게 하나님 앞에 무슨 그렇게 가치가 있겠습니까? 하고 알면 그 육은 죽었다, 라고 하고 그러니까 영으로 살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몸을 갖고 이걸로 불태워서 이 열정을 갖고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보겠다고 하면 그게 비 진리 아닙니까? 그게 육으로 사는 거예요. 여러분. 다른 거 없어요. 그러면 죽습니다.

에제키엘서 37장 보면 살이 썩어 없어지고 조각 난 뼈로 죽어있는,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이 등장해요. 인간의 몸이 뭐 300몇 개의 뼈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잖아요? 그게 다 관절로 이렇게 연결돼있죠?? 관절은 나중에 묻으면 썩습니다. 그럼 뼈만 흩어진단 말에요. 안 썩으니까. 그 상태를 죽었다, 그래요. 그건 그냥 땅 속에 있는 먼지나 똑같은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하느님이 그래요. 이게 이스라엘이야! 그래요. 이게 원래 내 아들들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하느님이 에제키엘에게 너 가갖고 그들에게 내 말을 전해!’ 그래요. 그런데 에제키엘이 생각하기에 그건 도저히 불가능한 거예요. 그들이 그 말을 들을 리도 없고 그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 리도 없거든요. 그래서 에제키엘이 고개도 안 들고 중얼중얼 했어요. 요나처럼. 사흘 길을 가야 비로소 한 번 쭉 갈 수 있는 그 니느웨 성에서 아이, 그냥 반나절 회개하라, 회개하라 하고 돌아다녔다니까요. 성경에 나오잖아요? 사흘 길을 왔다 갔다 해야 되는 곳에서 반나절 그냥 대충 하고서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었다고요. 마찬가지로 에제키엘이 가갖고 하느님이 시키는 말을 뼈다귀들한테 대언했어요. 그런데 언제 고개를 들었다고 그래요? 에제키엘이? 뭔 소리가 나더라는 거예요. 그때 에제키엘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요. 그건 기대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썩어 문드러진 뼈들이 하느님의 말이 떨어지자 덜그럭덜그럭 맞춰지더니 일어나네요? 요걸 헬라어로 에게이로라 그래요. 헬라어 성경에 아주 많이 나오는 거. 일어서다, 부활하다, 살아나다. 이렇게 번역된 단어요.

그 단어가 무슨 의미이냐 하면 사람이 죽으면 모든 기능을 다 놓죠? 그 기능이 소멸됩니다. 시체가 냄새 맡는 거 보셨어요? 그 기능이 소멸돼요. 들을 수 있는 시체 없습니다. 듣는 기능? 소멸돼요, 먹는 거? 소멸돼요. 들을 수 있는 에너지, 힘 모두 소멸됩니다. 모든 기능이 해체되고 소멸되는 상태를 죽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 기능들이 새로운 것으로 다시 모아져서 이게 살아있는 것이 될 때 이걸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그러고 그렇게 살아나면 그걸 에게이로라고 그래요. 새로운 피조물로 일어나는 거. 지금 그거를 에제키엘서 37장에서 하느님이 그림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뼈들이 맞춰지더니 일어나요. 그러더니 팔이 붙네, 그리고는 피가 돌더니 생기가 마지막으로 팍 들어가니까 군대가 되어버리는 거죠.

 

여러분이 주님의 군대라며요? 전신갑주 입고 있다면서요? 그러면 여러분은 영으로 산거죠?? ‘에게이로한 거예요. 그래서 바오로가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야. 그런 거예요. 새로 살았어. 그게 에게이로예요. 부활이에요. 그것이. 그렇게 여러분이 이 육신 속에서도 영으로 살면, 진리를 깨닫게 되면 그 육은 죽은 거라니까요. 그러면 그걸 생명이라 그래요. ? 이 육이 죽을 때 그 생명은 안 죽어요. 그래서 영생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그리고 그걸 평화라고 하는 거고, 진리를 가졌으니까. 그리고 그는 영원히 하느님 하고 한 방향으로 갈 거라니까요. 그게 샬롬입니다. 그들을 성도라 그래요.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나는 죽은 자 맞구나, 하느님의 생기가 내게 거저 임하지 않으면 나는 절대 산 자일 수 없는 거구나, 하느님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이렇게 자신의 처음 자리, 이게 원래 자리를 올바로 인식한 사람들은 다나투스의 죽음을 올바로 죽은 거예요. 숨이 끊어지는 순간 진짜 맞네요. 하느님! 이거 경험할 거예요. 여러분. 진짜네요!

우리가 뭐 죽는다, 죽었다, 죽음 이야기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는 죽음과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산다니까요. . 그래요 심지어 말기 암 환자도 자기는 안 죽을 줄 알아요. 그런 기대를 갖고 산다고요.

전에 그 호랑이 선생님, 그 수사반장의 조 형사님 돌아가셨다고 그러던데 몸이 얼마나 좋아요? 술을 그냥 짝으로 드신다고 만날 나와서 자랑하시더니 간암으로 두 달 만에 한 번에 가셨더라고요. 가시면서 그랬을 거예요. , 내가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 나와 갖고 내 간은 스님 간이라고 얘기를 하고 했었는데 이렇게 갈 줄이야. 그분이 그랬거든요. 술을 그렇게 짝으로 먹는다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걱정해서 간은 괜찮으세요? 그랬더니 병원에 갔더니 그냥 스님 간 같대요. 스님 같은 뭐 건강해요? 채소만 먹어서 그런가? 한방에 가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그렇게 가요. 아무리 기골이 장대한 그런 천하장사도 그렇게 가면서 아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처음자리, 원래 자리는 여기구나, 라고 알아요.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래 그러니까 하느님이 생명을 부어주어야 사는 거지. 할렐루야! 하고 가는 거고 어떤 이들은 어떡하지? 그러는 거예요. , 이제 어떡하지?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통하여 그거 배우면 돼요. 그거 확인하면 됩니다.

그렇게 육신의 생각으로 죽고 영으로 살아 생명에 이르면 그들이 바로 구원받은 성도가 되는 거예요. 그들의 나라가 샬롬의 나라, 평화의 나가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 성경은 우리가 하느님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마른 뼈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먹으라고 준 거예요. 그런데 그 말씀을 갖고 내가 산 자라는 걸 증명하는데 사용해버리면, 나는 그 말씀을 받아서 그걸 내 삶에 적용한답니다, 라고 내가 산 자임을 증명하려고 써먹어버리면 그걸 잘못 쓴다고 하는 거예요. 잘못 쓴다, 하느님의 말을 잘못 쓰면 그게 뭐라고요? 악령이라 그래요. ‘르와흐 엘로힘 라아’. ‘푸뉴마 다이모니오’. 귀신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악력을 품고서는 , 성령 받았다.’ 이런 사람들이 태반이에요. 태반. 정작 그 무서운, 자기를 멸망으로 끌고 가는 그 악령이 여기 있는데 밖에서 영화 보고 그거 무서워하고 앉아있어요. 저 오멘 저거 어떡하나 저거? 엑소시스 저거 어떡하나? 그건 그냥 미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미련해요. 그냥 비 진리 쪽에서 이리 끌고 가고, 저리 끌고 가고, 그냥 질질 끌고 다녀요. 진리를 배워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 잘 못들은 말씀을 그대로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면 그걸 거짓 예언자라고 하고 그 무리를 마귀라고 하고 그걸 옛 뱀, 용이라고 하고 전체를 그냥 사탄, 싸탄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하느님의 진리를 대적하는 말이고. 하느님은 진리로만 이 땅에 오실 수 있으니까. 호 코스모스의 세상, 인간의 이성에 갇히면 이미 하느님 아니에요. 그런 하느님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그 진리에 대적하면 하느님을 대적하는 거예요. 그걸 사탄이라 그래요. 사탄이라 그래요. 진리의 대적. 그래서 7절이 육신의 생각, 그 육신의 경향은 하느님의 원수로 행하는 거야. 그 율법에 머물러버리면 그게 하느님의 원수야 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성경을 그렇게 오해하고 있도록 써놓으셨어요. 잘 설명해서 이해하고 예수 믿으라고 써놓은 게 아니라 오해하고 멸망하라고 써놓으셨다니까요. 주님도 그러잖아요. 왜 자꾸 비유로 얘기하세요? 알아듣게 설명해주세요. 그랬더니 저들에게는 이게 알도록 허락되지 않아서. 너희들이 이거 듣고 귀 열리면 절대 안 돼. 이사야 보내면서도 그러죠? 너 가서 복음 전해. 복음 전해서 저들의 귀를 막아라. 열어야지 왜 막으라고 그래요? 그게 하느님의 뜻이라니까요. 막아라! 그 말은 못 알아듣는다는 말이에요. 안 막아도 못 알아들어요. 성경은 그렇게 피조물의 수준에서 그냥 보면 은 전부 명령이고 법이고 율법으로 읽게 되어있어요. 어떤게 착한 거, 어떤 게 나쁜 거, 권선징악. 이렇게 밖에 안 보여요. 성경은. 그러니까 그렇게 읽으면 죽는다니까요. 그게 뱀의 말이기 때문에.

여러분, 하느님은 이 세상을 멸하시기 위해 창조하셨다는 거 아세요? 구원하기 위해 창조한 거 아닙니다. 물론 성경에 하느님은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원한다고 그러고 하느님은 모든 백성이 구원받기 원한다고 그래요. 그건 하느님의 마음, 아가페의 실체. 그게 뭔지를 설명해주는 거예요. 그러나 하느님의 그 관심의 대상은 창세전에 택한 당신의 백성 밖에 없다니까요. 맞아요. 그들은 전부 구원받아야 돼요. 당연해요. 한 사람도 낙오가 되면 안 돼요. 그러나 이들에게 그 하느님의 사랑과 그 하느님 나라의 그 현실을 설명해주기 위해 필요한 교보 재들이 있어요. 군대 갔다 온 사람만 아시겠지만. 그 교보 재들로 만들어진 엑스트라들도 있다니까요. 그래서 어떤 이들은 가서 야, 아기까지 가서 싹 죽여라! 그런다고요. 하느님이. 그러면, 인본주의에 빠진 공평, 평등, 정의를 주장하는 이들이 그러죠? 무슨 그런 하느님이 다 있냐? 구약의 하느님은 악한 하느님, 신약의 하느님은 은혜의 하느님 이렇게 또 신학이 하나 또 생겨요. 아니라니까요.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만 쳐다보세요. 그렇게 수많은 인간들이 있었던 아브라함의 시대에 하느님은 아브라함만 졸졸 쫓아왔다니까요. 그리고는 아브라함 이외에 왕이고 나발이고 그냥 무조건 쳐버렸다고요. 내 백성만 바라보고 있다니까요. 반드시 구해야 되기 때문에. 아니, 반드시 가르쳐야 할 교훈이 있기 때문에. 역사와 인생과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의 목적은 요 모든 이 존재의 원래 자리, 그 원래 자리로 그 존재들을 돌려보내는 거예요. 그리고는 어떤 존재들은 그렇죠. 이게 맞아요. 우리 원래의 자리가 여기죠. 그러나 하느님이 그 큰 사랑으로 나를 이런 존재 만들어 주신 거로군요, 를 깨닫게 하시고 어떤 존재는 그 처음 자리에서, 그 원래의 자리, 어디에요? 티끌, , . 그들이 갇혀 있는 곳. 지옥. 그 자리에서 이들이 얼마나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과 복을 받은 자인지를 증명해내기 위해 거기서 영원히 그렇게 살아야 돼요. 그러니 주님이 그러는 거예요. 너는 나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했다. 네 제일 좋은 건 안 나는 거예요.

가끔 물어요. 우리 집사람이. 다음 인생에 태어나도 나랑 결혼할 거냐고. 나는 그러죠. 난 안 태어날 거야. 싫어서가 아니라. 왜 태어나요? 이 세상에? 아니, 그런 거 물어봐서 남편들 곤란하게 만들지 마세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 처음자리, 티끌의 자리로 되돌려짐을 당해요. 그걸 멸망이라고, 모든 존재는 다 멸망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존재는 그걸 다나투스로 죽고 어떤 존재는 그 죽음을 네크로스고 죽어버려요. 그래서 다나투스로 죽으면 거기서 사는 거예요. 멸망 받아 산다니까요. 그래서 주님이 그러잖아요. 너는 죽어서 살겠고, 죽어야 살겠고, 가 아니에요. 죽어서 살겠고. 그래요. 하느님이. 죽어서 살아야 된다 그래요. 그 역설을 이해할 수 있어야 진리를 아는 사람이에요. 넌 죽어서 살겠고.

로마서 920-24절 보세요. 20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기에 감히 하느님께 따지고 드는 것입니까? 만들어진 물건이 만든 사람한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21옹기장이가 같은 진흙덩이를 가지고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어낼 권리가 없겠습니까? (예레미야 18:6) 22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진노와 권능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면서도 당장 부수어 버려야 할 진노의 그릇을 부수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참아 주셨습니다. 23 그것은 하느님께서 자비의 그릇에 베푸실 당신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여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비의 그릇은 후에 영광을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미리 만드신 것인데 24 그 자비의 그릇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느님께서 불러 주신 우리들 가운데는 유다인뿐 아니라 이방인도 있습니다.

22절 보세요. 하느님이 그 진노가 뭔지, 무엇에 대하여 진노하는지 보이시고 멸망이 뭔지를 하느님의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목적하시고 멸하기로 준비한 그릇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또 다른 그릇이 있다는 게 아니라 모든 그릇은 그렇게 그런 목적으로 지어졌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중에 하느님의 오래 참음 안에, 그 자비의 은혜 안에 들어있는 자들이 있다는 뜻이 22절이에요.

모든 그릇을 멸하기로 준비한 그릇 중에 어떤 이들에게 오래 참아 그들에게 자비를 부어 그들을 통하여 하느님이 영광의 풍성을 나타내. 그들을 구원하는 게 목적도 아니에요. . 하느님의 영광의 그 풍성.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기 위해 그들을 살려낸다 할지라도 몇 개의 그릇을 건져낸다 할지라도 너희들이 무슨 할 말이 있냐? 이런 말이에요.

하느님은 이 그릇들을 멸하려고 만든 거예요. 아니, 멸해져야 돼요. 이 그릇들은. 아니, 그게 당연해요. 그게 이 피조세계의 수준인 거예요. 완성이 될 수가 없는 거라.

그런데 하느님이 관심을 갖고 오래오래 긍휼을 부어서 지켜보는 어떤 그릇이 있으니 그는 하나님의 풍성을, 풍요를 드러내는 그릇이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그릇은 그렇게 하느님의 영광과 풍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되느냐 하면 그릇, 그릇 역시 그 안에 들어있는 보배를 드러내야 되기 때문에 깨져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질그릇 안에 보배를 담은 자라고 성도를 가리키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모든 게 다 깨지는데 어떤 것은 깨지면서 하느님을 드러내고 살고, 어떤 거는 그냥 깨지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그렇게 하느님에 의해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구원 받는 거는 홀리고스‘, 거의 없다. 그러고 그렇게 멸망 받아 깨지는 그릇은 메가스대부분이다. 그래요. 그런데 그런 도덕, 윤리 수준도 안 되는 그따위 설교를 듣고. 무슨 대선 때만 되면 왜 그렇게 무슨 대선 얘기는 설교시간에 하는지 몰라. 그런 걸 듣고 수만 명이 모이는 게 맞아요? 전부 가짜인 거예요. 다 깨진 그릇인데 아닌 척하고 있는 거예요. 깨졌는데 안에 든 것도 없네. 큰일 나는 겁니다. 그 안에 보배 있어야 돼요. 그 진리의 말씀이 없으면 안 된다니까요.

아무튼 이 세상 모든 그릇들은 그렇게 깨져 모두 멸망 받기로 작정되어 지어졌어요. 그래서 다 깨져야 돼요. 그래서 다 죽는 거예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죽는 거예요. 엘리야, 에녹? 죽었어요. 그 의미는 이 세상에서 엘로힘에 연합된 자는 세상이, 세상 밖의 사람으로 취급하더라는 의미지, 다 죽는 거예요. 하느님 아니면 다 죽어요. 다 죽는데.. 그렇게 세상처럼 죽지 않는 그 죽음 그걸 죽어야 돼요. 그래서 온 세상은 고해라고 하는 거예요. 슬픔의 바다. 다 슬퍼. 가난해도 슬프고 돈 많아도 슬프고.

 

인생 뭐 있어? 자꾸 물어보는데 없어요. 아무것도. 그냥 하느님의 영광 드러내고 가는 거예요. 우리 성도들은 그런 하느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받아서 열심히 행해보다가 반드시 자기들은 그러한 하느님의 요구를 성취해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일차적으로 깨닫게 돼요.

, 하느님은 이 세상에 호 코스모스의 세상, 눈에 보이는 걸 준다고 그랬어요. 모형을 준다고 그랬어요. 이건 곧, 모형은? 죕니다. 죄를 주고 그게 뭔지 깨달으면 구하고 그걸 행해버리면 죽여요. 잘 이해하세요. 그게 뭔지 깨달으면 살리는데 그걸 그대로 행해버리면 죽입니다. 계속 희생제사 드려? 그래 드려. 열심히 해. 그리고 그걸 근거로 죽여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그 호 코스모의 세상의 대표, 육 그걸 삭제당하고 이게 죽어야, 이건 아니고 요게 내용이지, 라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거예요. 마찬가지예요. 여러분도 이 세상에서 나가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come out! 바벨론에서 나와라, 그러지 거기에서 가장 훌륭한 위인이 되어라, 라고 안 그런다니까요. 거기서 제일 착한 사람 돼야 돼. 그럼 내가 구해줄게. 안 그래요. 나와라 그러세요.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소리로 들으면 멸망을 받아요. 그런데 그 진리의 말씀, 그것은 성경이죠? 그것은. 성경은 곧, 예수를 적고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이들에게는 예수가 살리는 산돌이 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던져서 죽는 거치는 돌이 돼요. 그래서 율법에 돌로 쳐서 죽이라는 말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 거예요. 그 돌은 딴 돌 아니에요. 율법, 예수라는 돌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나중에. 간음한 여자 데리고 왔을 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이렇게 개정성경은 번역해 놓았지만 그 말은 이미 돌이 던져졌는데’, 라는 말이라고 그랬죠? 시나이산에서도 던져졌고, 예수라는 돌이 세상에 던져졌잖아요. 그 돌에 맞으면 죽어요. 그러나 그 돌이 뭔지를 알아 마음에, 심비에 새기면 사는 거라니까요.

 

베드로전서 26-8절 보세요. 6 성서에 이런 말씀이 있읍니다. " 내가 귀중한 돌 하나를 골라 머릿돌로서 시온에 두었다. 그를 믿는 사람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 28:16) 7 그러므로 이 돌이 믿는 여러분에게는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 집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다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이며 (시편 118:22) 8 " 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요 장애물이 된 바위" 입니다. 그들이 걸려 넘어진 것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탓이며 또한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기도 했읍니다.(이사야 8:14)

여기, 부딪치는 돌, 거치는 반석 스칸달론프로스코마인데요. ‘스칸달론스칸달리조’, 스캔들, 죄 짓게 하다, 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프로스코마도 죄를 짓게 하다, 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예수가 어떤 이들에게는 죄를 짓게 하는 돌. 돌비가 돼, 율법이 되네요. 그 말이잖아요. 지금.

하느님이 돌을 줬어요. 그런데 그 돌로 떡을 먹고 그 떡이 진리라는 것을 아는 이는 사는데 마귀는 돌로 떡까지만 말하고 진리까지는 얘기 안 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거기에다 붙여 주죠? 그게 진리잖아. 하느님의 말씀이잖아. 이렇게. 그 돌이 떡이 되고 진리가 되면 사는데 그 돌에 맞아버리면? 그 돌로 죄를 짓고 그 돌에 맞아 죽는다니까요.

살인하지 마, 간음하지 마, 안식일 어기지 마. 안 그러면 돌로 쳐 죽인다 그랬죠? 살인, 간음이 뭐라 그랬어요? 우리 산상수훈에서 배웠잖아요? 성부 아버지께 자꾸 그 제사, 희생제사, 도륙해서 드리는 그런 행위로 구원받겠다고 하는 게 살인이었고. 간음이 뭐였어요? 성자이신 그 신랑을 오해하여 율법이라는 남편에게 가서 그 남편과 같이 연합해버리면 그걸 간음이라고 한다. 그랬잖아요. 그럼 살인하고 간음하면 어떻게 돼야 돼요? 율법으로 오신, 성경인 그 예수, 그 돌에 맞아 죽는 거라니까요. 그게. 그래서 그러는 거예요. 어떤 이들에게는 예수가 죄짓게 하는 돌이야. 그래요. 죄짓게 하는 돌. 그냥 우리가 도덕과 윤리와 사회법상으로 우리가 정의해 놓은 그런 어떤 지저분한 일 정도가 아니라 진짜 죽음에 이르는 그 죄짓게 한다고요.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흉내 내는 그 죄. 성경을 소리로 보면. 그럼 성경을 어떻게 읽으면 그렇게 소리로 읽어서 멸망에 이르게 되는지 바오로의 이야기를 빌려서 한 번 설명해보자고요.

 

고린도전서 144-13절보세요. 4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도울 뿐이지만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사람은 교회에 도움을 줍니다.

방언, 그건 랄랄라 하는 못 알아듣는 말이 아니라 그거는 다른 종교에도 다 있는 방언이니까. 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글로싸, 그냥 혀라는 뜻이에요. . 그런데 그 혀는 그냥 말이라고 바꿔도 돼요. 하느님의 성령이 불의 혀처럼 임했다라고 했을 때 그 혀가 글로싸에요. 방언이란 단어에요. 그게. 그런데 그 말. 그 말이 소리로만 들려지고 전해지면 그건 그 진의 가 전해지는 게 아니잖아요. 그건 못 듣는 거죠? 그건? 내용은? 그때 그걸 방언이라고 그래요. 그냥. 그럼 한 번 보세요. 그게 통역되면? 내용으로 통역되면? 그걸 예언이라 그래요. 그리고 그걸 그 방언을 그렇게 예언으로 통역하는 그걸 통변, 통역이라 그래요.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 여기서는 중얼중얼 대고 여기서는 아무도 모르니까 대충, 이거는 그런 거래요. 이런 거가 아닌, 이런 쑈가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방언과 통역은, 그리고 예언이라는 건... 알아듣지 못하는, 그 소리로서의 그 말을 누군가가 열심히 통역하는, 그 연구, 열심을 통하여 예언으로 번역해서 들려주는 거예요. 그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5절 보세요. 5. 나는 여러분이 모두 이상한 언어로 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한다, 이러죠? 그래서 이걸 갖고 신비주의 교회나 오순절파 교회에서는, 거 봐라, 전부 방언해야 되는 거야. 안 하면 안 되는 거야. second blessing을 또 이야기하잖아요? 그 말이 아니라. 예언, 그걸 통역해서 하느님의 진의를 진리로 전해주려면 성경을 갖고 설명해야 될 거 아니에요? 제가 성경으로 설교하지 뭐로 설교합니까? 그런데 그 성경, 그것이 진의로 전해지지 않으면 그게 방언이라니까요. 그러나 그게 필요 없는 게 아니죠? 그게 있어야 내용을 설명해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일단은 그러는 거예요. 다 그 방언 해. 딴 얘기, 헛소리하지 마, 제발. 신문본 거 이따위 얘기하지 말고, 말 춤이니 개소리 같은 거 하지 말고 방언해.. 율법 해. 율법 가지고 성경말씀 갖고 얘기 해. 다 그 얘기했으면 좋겠다.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통역을 같이 해. 내용이 뭔지도 같이 전해줘. 그래야 그게 예언이지. 그러는 거예요.

그러나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만일 이상한 언어를 해석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것이 교회의 이익이 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이 더 위대합니다. (성경말씀만 줄줄 읽어주면 뭐 해?? 그거 갖고 다 곡해하는데, 전부 오해하는데)

6.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가서 이상한 언어로 말한다고 하더라도 만일 어떤 계시나 지식이나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나 가르침을 전해 드리지 못한다면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보세요. 또 그 예언을 뭐라고 얘기하느냐 하면 계시, 라고 해요. 지식, 이라고. 가르치는 것, 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내용으로 얘기 안 해주고 그냥 줄줄이 그 방언만 읽어주면 어떻게 돼요?

7. 피리나 거문고 같은 생명없는 (피리와 거문고처럼, 그건 그냥 생명 없는 것들이 소리로 내는 것뿐이야. 생명이 있으면? 내용으로 얘기하지. 이런 말이에요. 생명 없는 피리소리, 생명 없는 거문고 소리가 어떻게 교회에게 유익이 되겠니?) 악기도 소리는 납니다. 그러나 악보대로 분명하게 연주하지 않으면 무슨 곡이 연주되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8.또 나팔 부는 사람이 분명한 소리를 내지 않으면 누가 전투준비를 하겠습니까? (어떻게 군사가 그 말씀을, 그 진리를 갖고 나가서 전쟁을 해?)

9. 이와 같이 여러분도 이상한 언어로 (이게 글로싸거든요. 그런데 여기서는 또 혀라고 번역을 했어요. 방언이라고 안 하고, 혀로써)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면 (그 방언으로 알아듣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결국 여러분은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셈입니다.

10. 세상에는 갖가지 말이 있지만 뜻없는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 말씀 이렇게 두껍지? 73권이야. 수만 절이다. 이거 다 뜻이 있어. 소리로만 읽지 마. 그러는 거예요. 뜻 없는 소리가 어디 있어? 그러잖아요? 다 뜻이 있다는 거예요. 소리로 읽지 마.)

11. 그런데 내가 어떤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과 나는 서로 외국인입니다. (이거는 야만, 무례한 말을 하는 자란 뜻이에요, 거짓말하는 자.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거짓말하는 자지.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12. 성령의 선물은 여러분이 갈망하는 것이니 되도록 풍성하게 받으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교회를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13 그러므로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은 그것을 해석하는 능력까지 얻으려고 기도하십시오.

그게 뭔지 알려 달라고 기도해. 그런데 그냥 소리로, 생명 없는 피리소리, 거문고소리로 들으면? 그거 듣고 죽어요. 다른 말 아니라니까요. 교회에서 불경을 읽어주겠어요? 힌두교 경전을 읽어주겠어요? 성경 읽어줄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 성경 읽어주면 그 성경으로 죽는다니까요. 그게 소리, 방언이 되어버리면.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는 이 웬수들이 관심이 없어, 그렇게 그냥 생명 없는 피리소리가 여기에서 이렇게 불어지잖아요? 그러면 그것으로 진짜 기쁨의 춤을 추는 이는 없어요.

 

전부 쇼하는 거예요. 감동받은 척, 기쁜 척. 다윗처럼 그게 뭔지 알고 바지가 흘러내리도록 춤추는 이가 없어요. 그 춤은 우리가 추는 그런 춤 아니에요. 하늘의 춤, 그 진리가 뭔지를 알았을 때, 그 하늘의 그 피리소리에 장단, 그 장단에 맞춰 추는 춤. 그걸 하느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거예요. 엉뚱한, 그냥 세상 소리로서의 그 피리소리 거기에 장단 맞춰서 들썩들썩 하는 거 그런 거 말고요. 루가복음 731절 보세요. 3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도대체 무엇과 같을까? 32 마치 장터에서 편 갈라 앉아 서로 소리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하는 아이들과도 같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외쳤어요. 그의 별명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광야는 성경에서 항상 성전 마당을 의미해요. 그럴 거 아니에요? 하느님이 세례자 요한을 불러 갖고 아무도 없는 저 광야에 가서 혼자 병신처럼 중얼중얼 대라고 그러겠어요? 그게 광야에 외치는 소리에요? 아무도 안 듣는데 가갖고 혼자 중얼중얼 대라고 불렀겠느냐 고요? 성전마당에서, 예수님도 성전마당 아니면 회당에서만 복음 전했어요. 딴 곳에서는 기적 같은 거행했어요.

복음은 항상 성전마당과 회당에서 전했어요. ? 너희들이 지금 여기서 말씀이라고 나누는 게 진의는 이거다! 라고 설명해주기 위해서. 세례자요한이 그런 역할을 부여받아 엘리야로 온 거예요. 이 세상에. 그래 갖고 성전마당,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 이거는 떡과 포도주를 의미하는 건데 나중에 설명해드릴게요. 그 옷도 마찬가지예요..

그러한 역할로, 참 예언자의 모형으로 온 거예요. 세례자요한이. 그 왔는데 바리새인들이 쟤 저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누구의 종 된 적도 없고 그런데 자꾸 회개하라 그러고 물세례 받으라고 그러고 뭔 소리 하는 거야?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그 바리새인들이 세례자요한에게 그랬어요. , 그거 아니잖아. 너 뭔 얘기하는 거야? 세례자요한이, , 너희들이 무슨 말인지 모르지. 그들이 아무리 피리소리를 내도 세례자요한이 꿈쩍을 하지 않았어요. 그 얘기하는 거예요. 피리를 불어도 움직이지 않고 애곡을 해요. 인간들이 종교를 통하여 해결하려고 하는 게 뭐예요? 이 세상의 슬픔, 이 세상의 아픔, 이 세상의 고통, 이 세상에서의 성공. 이게 아픈 거야. 이거 해결해주세요! 라고 애걸을 하고 울부짖는데 세례자요한이 그러는 거예요. 그거 아니야~~ 하느님은 그거 해결해주려고 하는 거 아니야. 하고 안 울어주네 같이?

 

뒤집어서, 세례자요한이 하늘의 피리소리로 진리를 불었더니 아무도 그 장단에 춤을 안 춰요. 세례자요한이, 얘들아 여기가 무덤이고 이게 죽은 거야, 이게 진짜 슬픔이야, 라고 애통해하며 울부짖었더니 아무도 같이 안 울어. 내가 시퍼렇게 살았는데 왜 나보고 죽었다고 그래? 살만한데 뭐.

보세요. 성경이 소리로 읽혀지고 소리로 들리면 하느님이 진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그 장단에 찬양도 못하고 그 장단에 춤도 못 추고 하느님의 그 애통에 참여도 못해요. 그런데 그 피리소리 같은 그 소리 듣고 전부 연극들 하는 거예요. 감동받았어.. 은혜 받았어. 내 몸을 불사를 거야. 여러분, 이렇게 우리는 비 진리를 반드시 분별할 수 있어야 돼요. 그 비 진리는 우리가 품고 가야 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잘라 내야 할 거예요. 걷어내야 할 거라니까요.

 

바오로의 얘기를 다시 들어볼게요. 고린도전서 51. 여러분 가운데 음행하는 자들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 음행, 우리 간음 배웠죠? 산상수훈에서? 간음이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어린 양, 그 참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를 진리로 이해하지 못하고 비 진리로 이해하여 율법의 남편으로 받아버리면, 내가 섬겨버리고 내 밖의 예수로 갖게 되면 그걸 간음이라고 한다. 그랬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내 밖의 대상으로 놓으면 그걸 카파투라고 하고 그 단어에서 케리투투이혼증서라는 단어가 나왔다고 그랬죠? 그게 이혼증서에요. 그러니까 성경이 법으로 읽혀지면 그 성경이 그 사람에게는 하느님과 이혼한 이혼증서가 되는 거예요. 확실하게 이혼 했어요. 그 성경을 통해서. 그 음행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고린도교회가 특히 음란했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 음행이 있다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심지어는 제 아비의 처와 동거하는 자까지도 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은 이교도들 사이에서도 볼 수 없는 일입니다. (뭐예요? 근친상간이 일어난 겁니까? 그런 말 아니에요. 우리 이제 배웠잖아요? 아비가 누구고 아내가 뭔지. 배웠으니까 이제 그 정도 수준에서는 벗어나야죠? 그죠? 바오로가 자기를 중매쟁이라고 소개하죠? 누구에게 누구를 소개하는 중매쟁이입니까? 하느님 아버지에게 우리, 교회, 나를 아내로 소개하는 거죠? 그럼, 아비의 아내는 누구예요?? 진리를 알았다면, 그가. 나예요. 교회, 그 아비의 아내를, 진리로 아비의 아내가 된 그 아내를 누군가가 엉뚱한 말로 취하러 왔더라는 거예요. 근친상간했다는 말이 아니라. 근친상간은 제정신인 사람은, 평범한 사람은 그냥 하래도 안 하는 거예요. 그런 걸 성경이 굳이 들어다가, 무슨 이게 19금 도색잡지도 아니고 이런 얘기를 하겠느냐고요? 여기서? 그 아비의 아내를 어떤 놈이 그거 남편 아니야, 라고 속여서 가짜 남편에게로 끌고 가는 걸 음행이라고 하잖아요. 간음이라고 하잖아요. 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누군가가. 내가 너희들에게 진리를 전해서 너희들을 아비의 아내로 만들어 놨는데 누군가가 너희를 취하러 들어왔다는 소식을 내가 들었다) 2 그런 자들은 여러분의 모임에서 제거되어야 할 터인데도 그것을 슬퍼하기는커녕 오히려 잘난 체하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3. 나는 몸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으로는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과 다름없이 그런 짓을 한 자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미 단죄하였습니다. (내가 지금 너희들을 몸으로는 떠나있어. 나 지금 여기 있어. 그래서 내가 지금 너희들에게 편지 쓰거든? 그런데 내가 너희에게 그 진리는 전해주고 왔잖아. 그 말은 내가 너희들에게 남겨 두고 왔잖아. 너희들과 함께 나는 공부하고 왔잖아. 그 진리에 대해서. 그 영, 그 말, 그거 두고 왔잖아.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그 말, 그 진리가 영이요 생명이다, 그랬으니까. 내 영, 내 안에 있는 그 진리는 너희들에게 주고 왔잖아. 그러면 그 진리가 그게 비 진리라는 걸 분명히 판단하고 심판할 텐데 어떻게 너희들이 그 아비의 아내인 너희들을 미혹하는 그 말을 물리치지 않고 갖고, 붙들고 있어? 이 말이에요.)

 

4 그 때에 한 자리에 모인 여러분과 나의 마음이 우리와 함께 계신 우리 주 예수의 권능으로 5 그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 주어 (이거 그렇게 교회에서 음행하는 자 교회에서 쫓아내라는 말 아니에요. 아니, 사도바오로가 지금 딴 데에서 어떻게 그 사람을 쫓아냈다는 얘기예요? 이거를 무슨 뭐, 목사들이 그냥 출교시키고 막 그냥 자기 맘에 안 드는 장로들 자르고 이러는 데에 사용하는데 그런 말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과 함께 영으로 진리를 나눌 때, 그건 비 진리라고 그 율법주의, 인본주의는 비 진리라고 그건 하느님의 말씀에 대적 자라고 우리가 이미 그건 사탄의 말이라고 사단에게 내어줬다. 사탄의 거라고 규정했잖아. 사탄에게 우리가 함께 내줬잖아. 그거는. 그런데 그들이 와서 다시 아비의 아내가 된 너희에게 그걸 이야기해서 너희들을 취케 하려고 하는데 그걸 안 물리쳐? 우리 사탄에게 내줬었잖아? 그거. 대적자라고 했잖아요. 그거. 교회에서 잠깐 쫓아냈다가 다시 불러들이고 이런 거 아닙니다. 사탄에게 내어 줬노라) 그 육체를 멸망시키도록 판결한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날에 그의 영혼은 구원을 받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명쾌하게 이해가가시죠? 우리가 그렇게 진리를 공부하고 그건 사탄의 말이라고 그러니까 하느님께 우리가 열심히 희생제사 드려서 구원받는 거 아니라고 우리가 함께 그렇게 합의한 건, 우리의 육은 멸하여 죽이고, 몸은 멸하여 죽이고 영으로 살아나기 위함이었잖아. 그래서 우리 합의해서 그 반대쪽 거는 사탄에게 내어 줬었잖아. 그런데 그들이 와서 다시 미혹하는데 그걸 안 쫓아내? 이런 말이에요. 그런데 그게 뭔지도 몰라, 오늘날에는.

여러분, 우리의 남편은 하느님 아버지예요. 은혜의 아버지. 율법의 남편은 십자가에서 죽었다니까요. 로마서 7장에서 제가 그냥 목에 핏대를 세우며 설명해드린 거 아닙니까? 그런데 왜 또 그 남편을 그리워하세요? 뭐가 그렇게 불안하십니까? 도대체가. 근친상간 이런 거 그런 거보다 더 무서운 건 하느님의 말씀을 비 진리로 곡해하여 그걸 열심히 행하는 거예요. 성경이 경고하는 건 그런 거란 말입니다. 우리가 혹시 잘 못 알아 그 아비의 아내들을 엉뚱하게 취할 수 있다니까요. 그게 진짜 무서운 거예요. 그러니까 모르면 함부로 말도 하지 말아요.

동성애?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모두 다 하느님의 아내, 신부라 며요? ‘레케바’, ‘자칼을 담아야 하는 자칼, 레케바에서 레케바 잖아요. 그래서 우리를 어린 양의 혼인잔치의 신부들이라고 하는 거지요? 그럼 여자네요? 그들은 반드시 하느님인 그 남자, 그 남편을 사랑해야 돼요. 그게 순리로 쓰는 거예요. 그런데 순리로 써야하는 그 말씀을 갖고 우리가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을 사랑하고 여기서 대장 되고 싶어 하고 여기에서의 나, 그 나를 사랑하고 나의 가치와 나의 만족을 위하여 사용하면 그게 동성애에요.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거라니까요. 그 말씀을 갖고. 그래서 하느님의 사자들이 심판을 행하러 갈 때는 항상 남자들이 그 사자를 끌어내어 동성애, 상관하려고 한다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거예요.

하느님의 말씀을 가진 자. 안겔로스, 사자들이 가는데 그 사자들의 말, 그들은 하느님의 말을 갖고 왔을 거 아니에요? 그 말을 갖고 나의 가치, 나의 만족, 이 세상에서의 나의 재미, 나의 위상, 이런 거위해 사용해버리면 그게 그 하느님의 사자와 상관하는 동성애인 거예요. 그것이. 순리로 써야 할 걸 역리로 쓰는 거라니까요. 그게. 그런데 성경에 나와 있다고 동성애자들은 완전히 무슨 뭐 마귀새끼처럼 이러고들 앉아있다니까요. 진짜 무서운 동성애들은 자기들인데.

이 세상에 떨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갖고 세상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데 쓰는 그들이 진짜 멸망 받을 동성애자인데, 순리로 써야 할 걸 역리로 쓰는 자들인데 진짜 그 자기들 안에 그 어려움, 더러움, 추악함이 있으면 인간들은 항상 밖에다가 모형을 만들어 놓고 그걸 공격함으로써 자기를 감춰요. projection

아니에요. 오히려 우리는 그분들을 격려해줘야 돼요. ?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그런 역할을 맡았으니 참 미안하다, 라는 마음을 가져야지 나는 아닌데 넌 왜 그 모양이야? 아니, 나면서부터 그런 걸 어떡해요? 안 바꿔지는 걸. 그것 때문에, 성 정체성 때문에 자살 시도를 몇 번씩 하고 한, 그런데도 안 바꿔지는 걸 어떡해 하느냐고요?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그런 노력이나 한번 해 봤어요? 그런데 자기를 바라보지를 않고 이 악마 같은 인간들은 항상 그렇게 어떤 작은 어려움, 더러움 이런 걸 만들어 놓고 그걸 때려 부수므로 말미암아 나를 감추려고 한다니까요.

그렇게 우리는 반드시 이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갖고 나의 원래의 처음 자리, 그리로 돌아가서 하느님 전부, 나는 낫싱 이 고백을 해야 돼요. 나는 죄인 중의 괴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사랑을 쏟아부으신 은혜의 하느님. 여러분 이거는 반드시 우리 성도가 맺어야 하는 열매에요. 십자가, , 보혈, 이따위 얘기하면서 그런 거 아무 상관없이 그냥 맘대로 살다가 가면 된다, 그래요? 반드시 열매 맺어야 돼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얘기하는 도덕과 윤리의 그런 열매 아니고, 이 자기부인의 열매, 자기부정의 열매, 심지어 자기삭제의 이 열매. 이걸 맺어야 돼요. 안 맺으면 천국 못 들어가요. 반드시 진리로 이 열매 맺어야 돼요.

 

루가복음 136~9절 보세요.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 나무에 열매가 열렸나 하고 가 보았지만 열매가 하나도 없었다. 7 그래서 포도원지기에게 '네가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따 볼까하고 벌써 삼 년째나 여기 왔으나 열매가 달린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으니 아예 잘라 버려라. 쓸데 없이 땅만 썩일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하였다. 그러자 8 포도원지기는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9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 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 버리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이거 보세요. 여기 정신 나간 사람 하나 또 나오죠?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포도원에는 포도나무를 심어야죠. 그런데 왜 무화과나무를 심어요? 포도원은 성경에서 일관성 있게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의 집. 그 성전에서 하느님은 뭐를 요구하시느냐 하면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요구하세요. 그런데 그 포도원에서 열리는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포도예요. 포도라 그래요. 성경은.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없는 나무입니다. 꽃이 없는 나무, 열매, 그 꽃도 없는 게 열매인 척하는 거예요. 그 씨,. 수술의 머리죠? 그 씨. 사각 사각 씹히는 거. 그런데 열매도 아닌 것이 열매인 척하는 거. 고게 이스라엘의 율법주의였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때려 부수고 그 나무를 포도원에 심어서 포도를 수확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돼요?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분명히 무화과를 요구하세요. 열매도 아닌 걸......

하느님이 일을 해야 돼요. 무화과나무는 스스로 절대 못 맺어요. 그래서 하느님이 삼의 숫자로 삼의 열심으로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 삼년이라고 그러는데, 세 번째. 하느님이 율법, 성전, 예수, 그리고 세 번째 성전, 진리 이렇게 하느님이 일을 하셔서 그율법을 완료하시죠? 말씀을 완료하세요. 그러면 에스칼테로스 코드란테스’, 네 번째 것으로 우리에게서 열매가 맺혀야 돼요. 그 네 번째 것이 뭐였어요? 사랑이었잖아요. 그 사랑이 뭐예요? 하느님의 사랑. 그걸 알고 우리가 그걸 흘리면 그걸 사랑한다, 라고 하고 그 상태를 온전한 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그 열매가 반드시 우리에게 맺혀져야 되는데 어떻게 맺혀져야 되느냐 하면 하느님이 삼3으로 열심히 일을 하셔야 돼요. 그러면 우리에게서 그 사4 라는 열매가 맺히면 그 지성소, 정사각형이 우리가 되어서 하늘의 삼이 땅의 사가 되어, 이게 연합이 되면 칠7이 되고 이건 안식이야. 이게 완전함이야, 가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하느님의 일, 그 열심에도 불구하고 사로, ‘에스칼테로스 코드란테스이걸 못 갚으면, 호리라도 못 갚으면 감옥에서 못 나온다고 그랬으니까. 애굽에서 못 나오는 거니까. 이걸로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하느님이 아무리 이 땅에서 그 일을, 십자가를 피를 우리를 위해 쏟아 부으셨다 할지라도 그건 그 사람에게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그건 열매로 맺히지가 않아요. 그래서 그걸 꺾어버려라, 그래요. 일 년만 기다려보고...... 다죠.

그게 여러분의 인생이에요. 교회생활이란 말입니다. 거기에서 포도송이를 맺어야 돼요. 포도송이가 뭡니까? 여러 개가 붙었는데 하나야. 그걸 헬라어로 바꾸면? ‘스테파노스‘ ’스테반, 면류관이에요. 면류관. 그러니까 여러분은 반드시 이 땅에서 그 자기부인, 자기부정, 자기삭제의 그 열매를 맺으셔야 돼요.

그래서 하느님이 그러는 거예요. 너희들 애굽에서 나올 거야. 아브라함에게 그러잖아요. 그러면서 사대 만에 나올 거야. 그랬어요. 아니, 430년이 어떻게 4대 밖에 안돼요? 백년에 아들 하나밖에 안 낳나? 넷으로 나올 거야.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여기서도 넷의 때에 열매를 기다려봅시다. 아버지. 그러는 거예요. 그래도 안 맺히면 아버지의 일이 그들에겐 헛일이 되는 거네요? 그럼 밀어버립시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반드시 그 자리로 내려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힘들어요. 어렵습니다.

, 나는 스스로 열매 맺지 못하는 저주받은 선악과나무였구나? 그런데 하느님께서 거기에다가 그 샤론의 꽃을 붙여서 씨방을 만들어 열매를 포도송이로 만들어 내시는 거로구나, 하고 깨달으면 그게 내 죽음이고 그게 곧 나의 삶이에요. 내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영을 쫓아 생명의 삶을 사는 건 다른 게 아니에요. 육신의 생각, 율법으로 죽으면 그게 사는 거예요. 그게 자유가 있는 거고, 그게 안식과 평화가 있는 겁니다.

절대 성경을 소리로 보지 마시고 그것을 여러분 마음으로 가지셔야 돼요. 거기서 진짜 하늘의 춤, 하늘의 춤사위가, 하느님 나라의 그 찬양이 진짜 터져 나와야 돼요. 그 기쁨, 그 평안, 그 행복, 그것을 이 땅에서는 그 슬픔, 그 고통, 그 애통, 그 눈물로 설명해주실 수밖에 없다는 것, 그걸 명심하시고 그때에 절망하지 마세요. 이 세상은 그냥 허무한 것이에요. vanity 예요. 텅 빈 거예요. 그것으로 일희, 일비 하지 마세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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