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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보이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다 (로마서 8:19-25)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9-08 조회수2,870 추천수0 반대(0) 신고

 

보이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다

(로마서 8:19-25)

19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0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것은 제 본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21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22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3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24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25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

 

피조물들은 그 어느 것 하나 말씀으로 지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고 성경은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과 그 만물을 붙들고 있는 법칙과 원리 이 모든 게 전부 말씀이신 하느님을 증거하도록 지어졌다는 것이죠. 그냥 우연히 우발적으로 나타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 그냥 하느님의 뜻과 상관없이 그 하느님의 그 능력의 장중 밖에서 함부로, 우발적으로 나타나거나 생겨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리고 하느님의 그 뜻을 담지도 않고 제 맘대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 하느님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 하느님은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안 된단 말입니다. 자기들의 덮개도 벗어버리고 피조물들의 그 진의, 그 피조물들의 존재의 목적과 그 역할도 그 진의대로 밝혀주고 나타내주기를 간절히 열망하고 있다고 바오로가 기록하고 있는 거죠.

22절에 보시면 바오로는 그 상태를 시노디노’, 해산의 고통이라 그래요. 그냥 그 존재하는 것, 하느님의 아들들이 자기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았어. 알고서 그 존재에 여전히 그 아래에 이 나타난 현상에 여전히 갇혀있는 그 상태를 시노디노’, 고통이라고 그래요. 모든 피조물들과 같이 받는 함께 받는 고통. ‘시노디노’. 피조물들과 하느님의 아들들이 함께 당하는 고통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타난 현상. 즉 몸속에 갇혀 있는 거라고 해요.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 속에 갇혀서 살아야만 하는 이 크로노스의 시간이 해산의 고통과 같은 처절한 시간이 된다는 거예요.

 

1장부터 8장까지 전부가 다. 그런데 24절에 보이는 희망과 보이지 않는 희망이라는 게 나오는데 우리가 갖고 있는 국어사전의 개념의 그 희망이라는 건 보이지 않은 거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서 바오로는 보이는 희망, 보이지 않는 희망으로 이렇게 나누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고요. 우리가 희망으로 구원을 얻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희망으로 구원 얻으셨어요? 믿음으로 구원 얻었죠? 그럼 희망으로 구원 얻었다는 말은 무슨 말이에요?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이 구원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8절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었잖아요? 그런데 왜 바오로는 희망이란 단어를 여기에다 써놓고 우리가 희망으로 구원 얻었지? 그런데 보이는 희망이 희망이냐? 보이지 않는 희망이 희망이지.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알듯 모를 듯. 성경이 말하는 그 희망은요 미래에 있을 것에 대한 막연한 어떤 기대를 희망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분명히 닥치게 될 어떤 것. 혹은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것. 그러나 묵시 속에 있어요. 그건. 차원이 다른 어떤 세계에 완료 되어 있는 것이에요. 그것을 현재의 시간 속에서 그것을 모형으로 내가 간직하고 있거나 문득문득 인식할 때 그걸 희망이라 그래요. ‘엘피스라 그래요. 국어사전에 나오는 희망과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에겐 희망이 있지, 무슨 희망? 하느님이 우리 천국 보내주신다는 그런 희망요? 확실해요? 확실해야 희망이라니까요. 확실해야. 한 번이라도 흔들리면 안 돼요. 그런데 계속 흔들리잖아요? 그 희망 아니란 말에요. 그래서 헬라어 스트롱 사전을 찾아보면 그 엘피스희망이란 단어를 딱 찍어보면 확신이란 뜻도 들어 있어요. 그러니까 반드시 있어야 될 거예요. 그런데 내가 그걸 이 땅에서 모형으로 갖고 있어. 아 이게 그거지? 라고 이걸 내가 보고 그걸 봤으면 요거, 내가 갖고 있는 요걸 희망이라고 해요.

믿음이 뭐예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며요? 바라는 것들. 저기 있는 그것들. 내가 진리를 통하여 아, 그거? 그것을 내가 바라야 되는 거지. 그게 희망이죠? 그걸 알았어요. 그런데 그것이 내 눈앞에 이 땅에 실상으로 와 있는 걸 믿음이라고 그런다니까요. 내가 이를 악물고 믿어주는 게 믿음이 아니라.

히브리서 111절 보세요.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보세요. 믿음이라는 거. ‘피스티스라는 건요. 바라는 것들, 그것들의 실체, 실상으로 이 땅에 나타난 실상.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이 표적이나 어떤 것으로, 표로 증거로 와 있는 걸 믿음이라 그런다고 그래요. 그러면 그 믿음을 갖고 내가 그렇지! 이거지. 이것들이 이야기하는 거. 이 믿음들. ‘피스티스가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거 이야기하는 거지, 라고 알고 내 마음으로 가지면 그걸 피스토스오미크론 시그마를 붙여서 내가 된 존재를 이야기하거든요. 헬라어에서 오미크론 시그마가 뒤에 붙으면? 그걸 믿음이라 그래요.

, 이게 뭐냐 하면. ‘피스티스라는 건 믿음의 구원의 차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느님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설명해주기 위해 우리 눈에 보이는 어떤 것들로 이렇게 차서 있게 딱 딱 딱 딱 세워주시면 고걸 피스티스라 그래요. 그래놓고 믿음이라고 읽어요. 그러면 이거를 갖고, 이 피스티스를 가지고 아, 그게 그거군요. 라고 알아버리면 이것도 역시 믿음이란 뜻인데 여기에 오미크론 시그마가 붙으면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거지! 라고 내가 마음을 갖게 되면 내 안에 믿음이 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진 나를 또 믿음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믿음, 믿어지지도 않는 걸 그냥 억지로 그냥 믿는 거야! 믿고야 말거야!’ 이게 믿음이 아니라니 까요 자 이렇게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늘의 것을 보이는 것 속에서 깨닫고 인식하는 거예요.

보이는 이 세상 만물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진리로 읽어 내게 되면 이 세상이 다 믿음인 거죠. 로마서 1장에서 하느님이 그렇게 얘기했으니까. 그러니까 그걸 통하여 내가 믿음을 갖게 됐으면 온 세상이 또 믿음이네요. 호 코스모스가.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라는 말은 내 안에 믿음을 어떻게 해서든지 만들어서 난 구원을 얻는다가 아니라 나타난 이 증거들, 실상, 믿음으로 그걸 깨달아 내가 믿음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다는 뜻이지 억지로 믿어야 돼! 이게 아니란 말에요. 그래서 그냥 믿어지지 않으니까 산에 가서 내려오지도 않고 4050, 남편하고 애들은 집에서 굶어 죽는지 마는지도 모르고 그러고들 앉아 있다니까. 그렇게 해서 생기는 게 믿음이 아니고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건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실상. 증거. . 이런 것들. 거기엔 예수도 있고 성경도 있고 성전도 있고 세상도 있고. 다 아래 것으로 준 거잖아요. 그것을 통하여 내가 이게 믿음이지, 이게 구원이지, 알았으면 내가 믿음으로 믿음이 되어 구원받는 거란 말에요.

 

, 그렇게 하늘의 진리를 차서대로, 차례차례, 이렇게 티데미’, 진열해 놓은 게 티데미? 횡으로 진열해서 세워 놓은 거 티데미’. 그렇게 해 놓은 게 성전이라고 그랬습니다. 성막이라 그랬어요. 그래서 고걸로 그렇게 진열되어 있는 걸로, 그 성전으로 내가 아, 이게 그거구나. 이 희생제사는 예수의 그 희생이요. 그 영단번에 드려지는 어린 양의 제물이요. 유월절이요. 이걸 깨달아 알았어요.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의 자기희생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는 거지. 우리의 노력과 열심으로 얻는게 아니구나를 알았어요. 그러면 그 티데미된 걸로 위로 요렇게 똑바로 서게 되면 이스테미라고 그랬죠? 그러면 그게 믿음으로 믿음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똑바로 위로 서게 되네! 그게. 이스테미, 그런데 그 이스테미에서 스타오로스’. 십자가. 기둥이라는 단어가 나왔단 말에요.

그러면 그렇게 이 세상에 나에게 주어진 믿음과 희망이라는 실상들로 말미암아 내가 그걸 믿음으로 가져 위로 똑바로 딱 서게 되면 그 자리에 내 십자가가 서는 거예요. 나와 관계없이 2천 년 전에 예수님 한 어떤 일이 나를 구원하셨을 거야라는 이런 전설로 우리가 구원받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하늘의 진리를 담아서 질서대로 차서대로 나타난 형상으로 우리에게 주신게 호 코스모스. 우주라는 거예요. 천지만물. 그래서 그 코스모스라는 단어를 우주를 가리키는 단어로 차용해다가 쓴 거예요. 질서 있게 움직이잖아요. 우주는요. 그게 각도가 조금만 빗나가거나 아니면 거리가 조금이라도 좁혀지거나, 아니면 어떤 법칙, 만유인력이라든지 인력이라든지 어떤 것들이 싹 빠져버리면 이 우주는 단번에 무너집니다. 그러니까 그 질서, 그 차서 그것을 가지고 뭔가를 설명하고 있는게 우주니까. 그렇게 알게 된단 말입니다.

 

그건 하느님은 성실하셔! 가 아니라, ‘호 피스토스’. 호 피스티스‘ ,’호 테오스‘. 하느님은 믿음이다! 라는 뜻이에요. 직역을 하면. 하느님은 믿음이다. 라고 써 놓고 하느님은 미쁘시지. 이렇게 써 놨단 말에요. 그러니까 그 믿음의 실체는 하느님이란 말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셨어요. 뭐로? 육을 입고. 아래 모양을 갖고. 그래서 죄의 모양이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위의 그분이, 진리이신 그분이 아래의 형상으로 내려와 버리셨네? 그럼 뭐예요? 믿음이라며요. 그게. 히브리서 111절에서. 그럼 예수님도 그분을 통하여 진리를 알았으면 그분도 믿음이죠? 그럼 그분에 대하여 적혀있는 책 성경은? 믿음이죠. 역시. 아래 것은 다 믿음이란 말입니다.

디모데 후서 315. 그대도 기억하다시피 그대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익혀 왔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어디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니까요. 그걸로 구원을 얻는대요. 얻으면? 그 믿음이 내 믿음 되는 거라니까요. 그리고 그 성경 안에 그 믿음이 적혀 있다네요? 그러니까 주님이 오셔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라고 말씀하신 거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에요. 믿음인 내가 와서 너에게 구원을 주기로 작정했어. 왜냐하면 구원은 선물이니까. 그런데 그걸 깨달아 알아요. 그렇지. 구원은 저분의 치맛자락, 옷깃만 잡아도 나에게 오는 거지. 생명은 저기서 나오니까. 라고 알았을 때 그게 그의 믿음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먼저 찾아가셔서 이야기하신다니까요. 항상. 그래 네 믿음이 내가 그렇다는 걸 네가 알았으니까 믿음인 내가 네게 됐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는 거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항상 그런 기적을 행할 때마다 집으로 들어가든가 집에서 누가 나오든가 이런 글들이 꼭 적혀있어요. 여러분 예수님은 복음을 아무데서나 막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막 길 가다가 막간을 이용해서 너 잠깐 들어봐, 이렇게 안 했어요. 항상 거기에는 성전이라는 모형들이 등장해요. 성전과 회당에서만 복음을 전하세요. 왜냐하면 그게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게 복음이거든요.

그런데 그 전에 그런 성막, 성전이 아예 없었던 아브라함 때에는 아브라함의 집을 갖고 그 성전을 설명하셨단 말에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오이코스, ‘오이키아’. 이렇게 집, 그 집 앞에 관사가 붙으면 그건 반드시 성전을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어떤 집에서 누가 나오고 그 집으로 뭐 들어가고 하는 게 전부 성전의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조상들의 그 삶의 주어가 전부 믿음인 거예요. 믿음이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다. 그러는 거예요. 그들이 믿어서 그들이 이렇게 되었다, 라고 안 써요. 성경이요. 믿음이 주어라니까요. 믿음이 침공해 들어오는 거예요. 믿음은 기필코 그들을 아들로 출산해내더라. 라고 이야기한단 말에요. 그런데 그 출산을 오늘 본문이 시노디노’, 해산의 고통. ? 아들로 낳아지는 거. 그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해산의 고통.

마찬가지예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희망, ‘엘피스라는 이 단어가 똑같은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에요. 하느님께서 하늘의 묵시를 나타낸 형상과 인식 가능한 법칙과 원리 속에 넣어서 이 크로노스의 세상 속에 넣어두세요. 세워두십니다. '그걸 믿음이라고도 하고 희망이라고도 해요.

히브11:3 우리는 믿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곧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압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게 아니지. 여기서 나타나다, 라는 화이노란 단어가 나타내다, 밝게 빛나다. 히브리어로 바꾸면 오르라는 뜻이에요. . 빛이 있으라. 에서 빛. 있죠? 그 단어에요. 그런데 보이는 것은 그 빛이 아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보이는 건 하느님의 진리, 즉 보이지 않는 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거야. 라는 히브리서 기자의 그 말만 심어두시란 말에요.

요한1:3 모든 것은 (그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말씀. 말씀이 계셨다, 하고 이야기하잖아요?)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기노마이’, 말씀이 없이는 그 말씀을 담지 않고 존재하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더라. 이런 말이에요.)

역시 이 구절도 만물의 목적과 역할이 말씀, 즉 하느님의 뜻이라, 라는 걸 밝히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은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들인 거고 그들은 보이는 것을 믿음으로, 희망으로 받아, 마음으로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될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바오로는 우리가 희망으로 구원받았잖아.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그건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잖아 라는 말과 똑같은 거예요.

엘피스라는 단어에 정확한 용례를 찾기 위해서 제가 그 헬라어 신약성경을 아람어로 바꾸어 놓은 아람어 신약성경을 어렵게 찾았는데 그런 책들은 전부 절판이 돼갖고 찾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희망이란 단어가 티크바라는 단어에서 나왔더라고요. 보니까. 항상 헬라어는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유추해 올라가서 해석을 찾아내야 됩니다. ‘티크바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그 단어는 구약성경에서도 아주 많이 등장하는 단어에요.

티크바라는 단어를 추적해서 올라가면 카바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 단어가 묶다, 모으다, 대망하다, 희망하다, 참으며 기다림이런 뜻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희망이란 단어 안에 인내라는 의미와 꽁꽁 묶다, 라는 의미, 그리고 열망, 희망이라는 의미가 다 들어가 있어요.

그 희망이라는 단어의 어근은 카바에서 파생된 단어와, ‘티크바와 같이 쓰이는, 희망이라는 의미로 같이 쓰이는 단어가 미크베라는 단어거든요. 역시 희망이라는 단어로 쓰이는데 그 단어가 최초로 쓰인 곳을 제가 찾아드릴게요. 창세기 19절 보세요. 창세 1:9 하느님께서 "하늘 아래 있는 물이 한 곳으로 모여, 마른 땅이 드러나거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0 하느님께서는 마른 땅을 뭍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하느님께서 빛과 어두움을 나누시고, 궁창 위의 몰과 아래의 물을 나누시고 ,그 아래의 물을 미크베 마임이라고 이름을 붙이세요. ‘미크바 마임’. 개정성경에서는 모인 물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우리가 그 단어들의 의미를 고려해서 다시 의역을 하면 '희망의 물'이란 뜻이에요. 하느님은 아래의 물을 그 바다를 희망이라는 것을 담아 주셨다는 거예요. 우리에게요. 거기에 빠지면 죽지만 그게 뭔지를 알아 딛고 일어서면 물위에 뜬 자가 되는 거예요. 그게 노아의 방주 사건이에요 그 아래의 물에 묶이지 않고 그 아래의 것을 통하여 위의 것을 깨달아 문을 열고, 감옥 문을 열어 이 땅, 애굽에서 빠져나와 구원에 이르라, 라는 거예요. 그래서 아래 물의 이름이 미크베 마임이에요. 희망의 물.

이런 거예요. 첫째 날에 하느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세요. 둘 째 날에 위의 물과 아랫물을 나누십니다. 그런데 이 위의 물이라는 건 사실 없는 거예요. 그냥 진리에요. 하느님 나라, 하느님이란 거죠. 그런데 그걸 아래의 물, 바다로 설명해주기 위해서 이 위의 물이라는 단어를 쓰는 거고 나중에 요한묵시록에서도 유리바다라는 말을 쓰는 거예요. 그래놓고는 다시 바다도 있지 않겠고, 라는 이상한 말을 또 쓰고 그런단 말입니다. 모형이란 말이죠. 그러면 이 아래의 물로 위의 물을 깨달아 알았어요. 그러면 셋 째 날에 보면 여기에 드디어 씨의 얘기가 나오는데 그 제라’, 그 자손 그 씨를 품은 어떤 자들은 바로 그 위의 물, 아래의 물로 위의 물을 알고 이 어두움으로 빛을 안 그들이 되는 어떤 존재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여섯 째 날과 연결시킨단 말입니다. ‘자칼네네케바. ‘사람이라는 말로. 내가 원하는 거는 그거야. 그러면 안식이라, 라는 말로 설명해준단 말이에요.

그런데 여기서는 물과 뭍으로 나누지요? 이 물과 뭍이 뭐냐 하면은 원래 이 물은 저주의 물이라는 의미에서 이 물은 다 물러가고 하느님의 그 나라, 그 나라만 오로지 있게 하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이 담겨져 있는 것이지만 그러한 아래의 물이라는 의미, 그거를 그렇게만 보지 말고 이 뭍이라는 게 바꾸어 말하면 물이 없는 곳이라는 뜻도 되거든요.

그 물이 없는 곳을 이 저주의 물이 아니라 이 위의 물로 물을 대면, 그래서 성경에 너 나에게 물 좀 대봐라고 이야기해요. 이사악의 아내에게도 그리고 수가성, 사마리아의 여인에게도 그러고 물 좀 줘봐아니에요. ‘물 좀 대봐라고 이야기한단 말에요. 그래서 물 댄 동산이란 말이 나오는 거예요. 물을 대서 그 물이 내려오면 사막, 광야가 푸른 초원이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 물이, 이 물이 되어. 이 물로 이해가 되어, 둘째 날에서, 되어 여기를 적셔버리면 이게 하느님 나라가 된다는 그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그냥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이건 괴물이 사는 바다지만 이게 위의 물로 이해되면 이게 희망의 바다죠? 그래서 미크베 마임이라고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희망이라는 단어는 그런 거라니까요. 그래서 창세기에 희망이라는 단어가 제일 처음 나오는 거라는 말입니다.

 

, 따라서 우리는 믿음과 희망으로 진리를 깨달아서 사랑으로 완성하면 되는 거예요. 그렇죠? 믿음, 희망이 다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나타난 것으로 준 거니까. 그걸 내 마음으로 가지면 그게 진짜 믿음, 희망이 되는 거고요. 여기 까지 이제 이해가 가시죠? 그러니까 그걸 사랑으로 깨달아 알면 믿음과 희망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거죠?

고린도 전서 138-13절 보세요. 8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는 특권도 사라지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도 끊어지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9 우리가 아는 것도 불완전하고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도 불완전하지만 10 완전한 것이 오면 불완전한 것은 사라집니다.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읍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읍니다.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믿음 희망 이건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반드시 있어야죠? 그래야 마지막 진리가 되는 그 사람이 이 믿음과 희망으로 사랑이 될 거 아닙니까? 그러나 정말 중요한 건 뭐예요? 믿음과 희망으로 사랑이 되는 거야. 라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에요. 그런데 여기 보면 대조되고 있는 게 부분적인 것, ‘메로스와 온전한 것, ‘텔레이오스’. 여기서 테텔레스 타이’, 다 이루었다, 가 나오는 거죠? 부분적인 것은 반쪽이에요. 나의 반 부분. 분깃 이런 거에 쓰죠?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 남자가 여자를 만들 때, 하느님이 남자를 통하여 여자를 만들 때 그의 갈비뼈를 이렇게 빼잖아요? 그 갈비뼈라는 단어가 이 분깃. ‘메로스라는 단어에요. 반쪽, 다른 한 부분. 이런 말이죠. 갈비뼈가 이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 한 부분. 그게 그냥 반쪽으로 있으면 안 되죠? 온전한 것이 돼야죠. 그렇죠? 부분적인 것, 온전한 것. 그런 뜻이에요.  

그리고 어린아이, 네피오스라는 단어는 파이디온’. 그러니까 성경에는 어린아이라는 단어가 두 개 나와요. ‘파이디온’, 하고 네피오스’. 그런데 파이디온은 예수님이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못 들어가! 이렇게 말씀하실 때 그걸 쓰곤 했는데 원래 그 어린아이라는 다어가 어디에다 쓰시느냐 하면 노인, 성숙한 자. 진리를 안자와 반대되는 쪽에 그 존재들을 어린아이라고 써요. 그래서 바오로가 그 파이디온이라는 단어를 번역해 줘요. ‘네피오스라고. 네피오스가 뭐냐 하면 말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말이 없다. 말을 갖지 못한 자. 말을 못하는 자. 그 말을 못하는 자. 그게 네피오스에요. 그걸 어린아이라고 써요. 이렇게. 그리고 그 어린아이와 장성한 사람, 이라고 그러죠? 장성한 사람은 아네르예요. ‘’, ‘남편’. 이런 거예요 .어린아이로 있으면 안 되지. 말씀, 진리의 씨를 가져 네가 씨를 간직한 자가 돼야지. 그럼 네가 남편이 되는 거잖아. 그런 얘기죠. 그죠?

그래서 네피오스아네르를 대조하고. 이날, 우리가 이제는, 그러는데 지금은 모르지만 나중에는 알 거야. 이런 말이 아니라. 이날과 그날, ‘알티토테가 대조되고 있어요. 이날, ‘크로노스’. ‘토테’. 그날. 이런 말이에요. 크로노스에서는 우리가 부분적으로밖에 모르지만 그날, 카이로스는 온전한 것을 아는 때잖아. 그러니까 우리는 그날, 카이로스에 속하여 온전한 것을 아는 이가 돼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믿음 희망, 이걸로 우리는 반드시 온전한 그 사랑을 알아야 되는 거예요.

 

? 우리는 크로노스 속에서 카이로스를 사는 사람이라면서요? 그러니까 언젠가 완전히 이루어질 일이기도 하지만 아니, 이미 이루어진 것을 우리는 이 땅에서 조금씩, 조금씩 확인하면서 그렇지, 그거지! 라고 크로노스에서, 이날에서, 그날을 사는 거란 말에요. 그게 고린도전서 13장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 방언, 예언. 이런 얘기 아니에요. 그런 거에 여전히 착념해갖고 그러면 안 되죠.

그리고 여기에서 바오로가 부분적인 것, 온전하지 못한 것에 예로 든 게 뭐냐 하면. 예언, 방언, 지식이에요. 그죠? 그건 다 폐하여진대요. 싹없어진다는 뜻이에요. 불태워져서 없어진다. 예언, 방언, 지식? 온전한 것이 오면 그 부분적인 것이 없어진다. 그러는데 예언은 뭐예요? Fortune telling 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느님의 진리를 내가 깨달아 누군가에게 말로 전했을 때 그걸 예언이라고 그래요. 좋은 거 아닌가요? 그런데 왜 없어진다고 그래요? 이걸. 방언, 이건 뭐 당연히 랄랄라 거리는 게 아니라, 글로싸. 혀예요. . 말이란 뜻이에요. 그냥 말인데 생명 없는그런 이들에게서 나오는 그냥 소리에 불과한 말 있죠? 진리를 담지 못한, 내용으로 담지 못한 그 말을 그냥 성경이 글로싸라고 해요.

그래서 그것이 아닌 깨끗한 말을 사도행전에서 똑같이 글로싸 라고 쓰는 거예요. 불의 혀. 성령이잖아요. 깨끗한 말, 성령이 있는 반면에 더러운 말, 비 진리가 있다니까요. 그걸 똑같은 단어로 써요. 글로싸, 방언 그렇게. 그러니까 그건 당연히 없어져야죠. 소리에 불과한 거니까. 내용이 들어오면. 지식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그 진리를 가르쳐주기 위해 우리에게 쏟아부어주는 정보들 있죠?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가 진리를 담아 전하는 그 설교 있죠? 그게 예언이잖아요? 그걸 미련한 것이라고 해요. 어리석다. 그래요. 그건요. 불합리하다는 단어에요. 그 단어가. 불합리하다. 그걸로는 안 된다는 뜻이거든요. 설교를, 그런 구절을 읽으면, 뭐 인간의 말로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서 또박 또박 해도 그건 불합리한 거라고 성경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한번 보실래요? 고린도전서 121.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지혜로운 경륜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소위 어리석다는 복음을 통해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여기서 전도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설교에요. 설교. ‘케리그마’. ‘케리스에서 나온 거니까. 설교. 뭐 밖에 나가서 막 노방전도하고 이러는 거 얘기하는 게 아니라, 전도는 설교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설교를 할 수 없으면 여러분은 전도를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냥 아무나 가서 종이 나눠주면서 예수 믿으세요, 이거는 전파복음이라고 그러는데 그걸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진짜 전도는 그 길인 예수를 내 말로 전할 수 있을 때 전할 전. 길 도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에서 모리아’, 어리석은 것. 미련한 것. 이라고 번역된 그 모리아라는 단어 있잖아요. 그것이 불합리에요. 절대 안 되는 것. 비밀. 이런 뜻이에요. 심지어.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해도 하느님이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면 그의 귀에는 그건 비밀이에요. 입을 다물다, 라는 뜻도 있어요. 아무리 열심히 얘기를 해도 그건 다문 입술에서 나오는 비명에 불과한 거, 신음에 불과한 거예요. 전도. 그런데 하느님이 그걸로 하래요.

고린도전서 147절 보세요. 7. 피리나 거문고 같은 생명없는 악기도 소리는 납니다. 그러나 악보대로 분명하게 연주하지 않으면 무슨 곡이 연주되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읍니까? (여기서 생명 없는 것은 단순히 피리나 거문고를 예로 드는게 아니라 생명 없는 것의 대표적인 게 누구예요? 사람이에요. 모든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날 때 죄인으로 온다고 그러죠? 그 죄인을 성경에서는 마른 뼈라고 그런단 말에요. 생명 없음이에요. 그들이 어떠한 미사여구 또 어떠한 연구결과를 갖고 소리로 이야기를 해도 그건 전부 생명 없는 소리예요) 8 또 나팔부는 사람이 분명한 소리를 내지 않으면 누가 전투준비를 하겠습니까? 9 이와 같이 여러분도 이상한 언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를 누가 알겠습니까? 결국 여러분은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셈입니다. 10 세상에는 갖가지 말이 있지만 뜻없는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 세상에 이렇게 많은 만물이 있지만 그 안에 내용 없는 만물 없듯 소리에도, 모든 소리에도 전부 뜻이 있어요. 그래서 누가 말을 해도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이 전부 그 진리가 아닌 소리를 하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는 거예요. 그걸 말이라고 해? 헤헤 말 아닌 걸 말하는 거예요. 진리만 말이라니까요. 성경에서는 말씀이라고 해요 그것만. 그러니까 소리에는 전부 뜻이 담겨 있어요. 그걸 엉뚱하게 써서 그렇지.)

 

하느님께서 창조라는 것을 하신 이유가 땅으로 하늘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베레시트 엘로힘 바라 에트 샤마임 에트 에레츠그랬죠 베레시트? 이걸 태초에, 라고 번역했단 말에요. 그런데 이 베레시트이거는 하느님께서 성전으로 그 머리, 그 진리, 그 예수. 예수가 담고 오신 거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보고 머리라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요 로시가 머리라고 그랬죠? 머리를 완성으로 넘겨주시는 게 인제 이 역사에요. ‘베레시트예요. 그게. 태초! 예요. 그 전체가 창세기 1장에 다 기록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게 창조라 그랬습니다. ‘바라’. 그러면 그걸 위해서는 이제 아래에 있는 이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아래 것으로 뭔가 설명을 해줘야 되니까, 뭔가 생겨나야 되죠? 그걸 바라창조라고 그래요. 그거를. 그런데 그거는 뭐를 설명하기 위함이냐 하면 엘로힘이라는 걸 설명하는 거래요. 하느님. 그런데 여기에는 요 진짜 하느님이 생략되어 있는 거라고 그랬지요? 왜냐하면 이 바라라는 단어가 남성 단수인데 요게 쌍수란 말에요. 그러니까 주어가 될 수 없단 말입니다. 그리고 사마임’, 요게 에레츠예요. 그러니까 땅의 것을 갖고 요 하늘을 알게 되면 고것이 하느님을 알게 되는 거고 고것을 위해서 나는 창조를 한 거야. 고 전체를 베레시트라 그래.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이 하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거니까. 그러면 요 땅을 갖고 이제 설명해주기 시작해야 되잖아요? 그러면 2절에 이제 땅은,... 이라고 나오는 거예요.

, 그 땅은 뭐야? ‘하야’... 하야라는 게요. 하야라는 동사에서 야훼라는 단어가 나오고 이건 그냥 같은 단어에요. 이건 뭐냐 하면 그냥 존재하다, 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말소리. 내 말 소리를 줄게. 네 말 소리로. 그러면 보세요. 하느님이 하느님의 말씀 그 진리를 우리에게 말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누군가의 소리가 필요하죠? 그래서 우리가 필요한 거예요. 여러분의 소리가 필요한 거거든요. 그래서 그걸 소리내기 위해선 여러분은 그 씨를 갖고 있어야 되는 거죠 . 그런데 그 씨를 갖지 못해 그 말을, 하느님의 말. 우리의 말로 줄 수 없으면 ,그건 존재도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그 말이 없으면 성경이 죽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둠, , 이런 걸 함부로 그냥 알지도 못하면서 나쁜 거, 도덕 윤리로만 판단해서, 나쁜 거, 이렇게만 이해하시면 안 된단 말에요. 그 흑암이 이게 전치사니까. ‘파님’, 깊음 위에 있다. 그래요. ‘테흠 파님’.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면 테흠이라는 건 이 저주의 아래 바다, 아래 물이에요. 그 저주의 아래 물, 이 아래 것, 세상이죠? 여태까지 이제 다 들었으니까 제가 오늘은 조금 어렵게 얘기를 해도 금방 금방 이해를 하셔야 돼요. 아랫물, 저주의 바다. 이 아래 거. 그것들의 나타난 걸 성경이 파님이라고 그래요. ‘파님은 헬라어 성경에선 프로소폰이라고 번역이 되지만. 그래서 그걸 얼굴이라고 자꾸 다 번역을 하는데 모세가 돌 판을 갖고 내려왔을 때 칠십 원로가 하느님의 얼굴을 뵈었다! 거기에 무슨 하느님의 얼굴이 있어요? 하느님이 기록된 그 나타난 어떤 걸 봤다. 돌 판 본 거예요. 그걸 얼굴이라고 번역하는데 그게 파님이거든요. 그러니까 뭐라 그러느냐 하면, 그 땅이 뭐냐 하면 공허하고 혼돈한 거야. 그건 없는 거야. 그게 실체가 아니야. 그러나 난 그걸로 설명할 거야. 하늘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런데 그 아래의 그걸 흑암이라고 하는데 그 어두움, 흑암이 뭐냐 하면 그 아래 것들 그것들의 껍데기. 나타난 것. ‘파님있죠? 그걸 흑암이라 하자는 말이에요. 그걸 흑암이라 하자. 그리고는 루하 엘로힘이 나오죠. 그러면 그 흑암을, 그 나타난 것의 껍데기를 위의 걸로 알려주려면 어떤 분이 일을 하셔야 된다. 그랬잖아요. 여기 토후 보후의 소리가 나왔으니까 그 소리를 진리로 전해 줄 누군가가 있어야죠. 그게 루하 엘로힘’. 성령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러면 그 성령이 와서 뭘 해준다는 거예요? 지금. 여기 이 물이니까. 그 진리를 진리의 파님그 껍데기를, 진리의 껍데기가 이 아래에 있는 거. 진리를 담고 있는 모형들 이야기하는 거죠? 그거를 라하프’, 어떻게 했다고요? 닭이 알을 품듯 품었다는 거예요.

 

닭이 알을 품듯 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태어난 알이 다시 태어나려고. 병아리로. 알은 살은 거예요? 죽은 거예요? 살았어요. 그것도요. 그런데 알의 생명이에요. 그건요. 그게 진짜 살려면 다시 날개로 품어 병아리로 만들어야 돼요. 이걸 다시 난다, 거듭난다. 그래요. 그래서 주님이 예루살렘아 내가 너희를 암탉이 알을 품듯 품으려고 한 게 몇 번이냐? 그런데 너희들은 원하지 않았다. 그러죠? 나는 율법, 너희들을 그 진리로 풀어 생명으로 탄생케 하려고 했는데 너희들이 원치 않은 거야. 라고 우셨다니까요.

그러면 이제 어두움으로 그 진리를 설명해주기 위해 성령이, 르와흐 엘로힘이 알을 품어요. 그럼 어떤 일이 일어나야죠. 이제 그것이, 어두움, 흑암이라는 것이, 그 토후보후의 그 상태가 그게 뭔지 나타나야 되잖아요. 그렇게 어두웠던 것이 나타나다. 라는 말을 성경이 오르라고 써요. 그걸 빛이라고 해요. . 그러면 바로 밑에 뭐가 나와야 돼요? 인제. 빛이 있으라가 나와야지요. (에이, 알아듣는 거야. 뭐야? 이건. ㅎㅎ 그죠? )

 

빛이 있어야죠. 그럼 하느님이 그 빛을, 하늘의 그 빛, 그 진짜 빛을 설명해주기 위해 이 땅의 어두움들 이 형상들을 이렇게 뭐로 드러내고 나타내주는 거. 그걸 빛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뭐예요? 하느님이 그 진리를 말해주는 거잖아요. 그래서 나오는 거예요. ‘아마르’. 하느님이 말씀하셔. 라고 제일 첫 번째 단어가 나오는 거예요. 말씀하신다! ‘다바르가 아니라 아마르라는 건 진짜 그 하느님의 말씀이야. 이런 말이에요. 그래서 하느님이라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어요. 하느님이 말씀하셔! 뭐로? 엘로힘으로 말씀하셔. 어떻게? ‘하야 오르 하야 오르괜히 반복한 거 아닙니다. ‘빛이 그로 존재하네! 이런 말이에요. 그가 그분이 빛으로 이 땅에 이 나타난 모양으로 그분이 거기에 들어가서 존재하셔. 이런 말이에요.

그래서 한 번 더 반복한 게 뭐냐 하면 네 번째 날에서 나오잖아요. 또 빛이 나오죠? 거기엔 마오르라고 나오는데 그 빛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여기에 와우 접속사가 있거든요. 그러므로 그분이 빛으로 존재해.. 어디에? 이 땅에.

그럼 뭐예요? , 이 땅에 있는 모형들이 어둠이라고 그랬어요. 조금아까. ‘호세크’. 그거를 그게 이거지. 라고 이렇게 나타내 주면 그걸 빛이라고 한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둠 속에 살아요? 빛 속에 살아요? 어둠 속에 사는데, 모형을 입고 있으니까. 크로노스에 살고 있으니까, 그걸 어둠이라 그런다고 했잖아요. 아까 호세크’, 사는데, 그 속에서 그게 뭔지를 말씀으로 알아 빛을 사네? 그래서 그거를 나타내줄 수 있으면 그 사람을 세상의 빛이야! 라고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뭘 어두운데 가서 많이 비춰줘, 구제 많이 해, 선교 많이 해. 이런 말이 아니라. 왜냐하면 네가 빛이지. ? 넌 역시 어둠이야, 몸뚱어리 안에 갇혀 있는데 그걸 말하네? 그러면 그 어둠이 뭔지를 나타내는 게 빛이니까, 그럼 네가 빛이야.

그랬더니 하느님이 어떻게 해요? ‘’, 하느님이 보세요. 뭘 봐요? 그 하느님으로 해석된 그들만 봐요. 그러니까 진리로 드러난 그들만 본다, 라는 거예요. ‘라 엘로힘’. 하느님이 보신다. 가 아니라 그분이 엘로힘으로 보신다. 이거 아니면 안 본다는 거죠. 에츠 오르 토후이건 토부인데, 여러분이 잘 아시는 단어죠? ‘이란 단언데,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런데요, 잘 보세요. 그렇게 하느님이 이 세상에 어두움을 깔아 놓았어요. ? 그걸로 하늘을 설명하기 위해. 그래서 르와흐 엘로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걸 빛으로 드러내세요. 그래서 그 빛이 드러나요. 그래서 빛이 있으라, 하느님이 하셨다, 라고 얘기를 하는데 그래서 그게 빛으로 드러나면 하느님은 그걸 아이, 보기 좋다’. 이게 구원의 이야기예요. 이게 성경 전체의 이야기라니까요. ‘아이 보기 좋다.’ ? 땅 아래와 하늘 위의 것이 하나로 됐잖아요. ‘, 보기 좋다!’

그런데 하느님이 선이라는 단어를 토브라고 쓰시는데 이게 뭐냐 하면 뱀의 성전이에요. . 여러분 이 뱀이 원래 이 단어가, 원래 이집트어로 읽혔습니다. 여기에서 온 단어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밖으로 나오면 요걸 완성이라고 그러죠? 이게 타후예요. 완성. 그런데 그 완성이 요렇게 어딘가에 갇혀서 덮여있는 거예요. 그걸 뱀이라고 그래요. 여러분 이집트 때의 뱀은 나쁜 짐승이 아니라 신이었다니까요. 그래서 이집트 파라오들이 전부 여기에다가 뱀 달로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느님은 그 때 그 뱀을 나쁜 걸로 쓰셨다기 보다는 하늘의 왕을 설명하기 위한 세상의 왕으로 쓴거뿐이지 그걸 나쁘다, 라고 쓴게 아니란 말에요. 그러면 이 뱀의 성전, 이걸로 그 하늘의 성전을 알았으면 이건 진짜 하늘 왕의 성전이 되는 거죠? 그랬을 때 이거를 선하다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바오로 서간문에 보면 하느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그 어느 것도 악한 게 없다. 그래요. 그럼 모든 것이 선하지 당연히, 하느님을 설명하기 위한 거니까. 뱀도 선한데. 그 단어를 선이라고 쓰는데. 그래서 이걸 갖고 이 울타리, 이 율법의 껍데기를 싹 제해버리면 완성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내가 너희만 볼 거고 ’, 그리고 너희는 선하다 칭함을 받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선이야. 아직 선악과 따 먹기 전이고, 그런 건 있기도 전에 하느님이 구원이 무엇인지를 그냥 이렇게 설명한다니까요. 그런데 못 알아먹잖아요. 못 알아먹으니까 그래, 그러면 그 어두움이 뭔지 그 땅이라는 게 뭔지 아래물이라는 게 뭔지 너희들 수준에 맞게 설명해 줄게.

, 선악과 먹어! 여기부터 시작하자. 이렇게 된 거란 말입니다. 아담이 그냥 우발적으로 확 따 먹어버린 게 아니라. 계속 설명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선하다고 그러잖아요. 그러죠? 그러면 하느님이 어떻게 한다고요? 빛과 어둠을 나누세요. 간단하게 하고 마칠게요.

다바르라는 단어가 뭐냐 하면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이, 묵시와 역사가 만날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성경, 예수, 성전입니다. 교집합이에요. 이것이. 요거를 창세기 15장에서 요 부분을 타베크라고 해요. 가운데라고. 그래서 신약성경에도 너희들은 가운데에 서라 그래요. 예수님도 가운데 서신다. 그렇게 얘기하죠? 그런데 요거를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다. 그래요? ‘타베크가운데를 잘랐다. 그런다고요. 그거를 바타르라고 해요. 그러면 하느님이 건너가세요. ‘아라브라고 그래요. 그거를. 건너가면 여기에 아브라함, 여기에 하느님. 제물은 여기. 그리고 이런 금이 그어지죠? 이거를 카라트라 그래요. 그러면 하느님이 뭐라는 거예요? 그래놓고 무슨 얘기를 하느냐 하면 아브라함아 너 출애굽 해야 돼. 그러잖아요. 창세기 15장 보세요.

 

너 지금 그게 애굽에 있는 거야. 너 출애굽 해야 된다. 그게 아모리족속의 죄인 거야. 그러면 출애굽 하면 이리로 넘어와야죠? 그럼 아브라함이 세 번째 제물이 솨라시라는 말이요, 세 번째 제물이라는 말이 아니라, 아니, 삼 년 된 무슨, 삼년 된 뭐라 그러잖아요? 그냥 세 번째 제물이란 뜻이에요. 세 번째 제물이 뭐냐 하면. 첫 번째 제물, 성전 마당의 희생 제물들. 두 번째 제물, 예수. 세 번째 제물, 산 제물.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산 제물. 첫 번째 두 번째 제물로 내가 산 자가 되면 내가 하느님께 바쳐지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자가 되는 거요. 하느님이 그 세 번 째 제물을 취하라. 그랬어요. 네가 그 세 번째 제물이 되어라, 라고 했더니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를 때 아브라함이 율법으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래요? 삼 년 된 거 갖다가 쪼개버렸단 말에요. 뭐로? 율법으로.

이게 율법이란 말에요. 사람의 에피뚜미아, 두 마음으로 하느님께는 항상 선과 악으로 이렇게 드려야 되는 거죠? 라고 쪼갰을 때 하느님이 아니야, 그게 애굽이야. 너는 네 백성과 함께 애굽에서 430년 있다가 다시 와. 어떻게? 유월절 어린 양, 셋 째 제물로 나에게 와!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건너오면 그걸 건너다’, ‘히브리’, ‘아라브’. 건너왔다. 그래요. 그런데 하느님이 먼저 건너가시고 아브라함은 나중에 건너가게 되죠? ? 어떻게 건너가게 돼요? , 이 제물은 나를 이리로 건너가게 하는 그 세 번째 제물이구나. 라고 율법으로 진리를 알았을 때 아랫것으로 위의 것을 알았을 때, 건너갈 수 있어요. 이 제물이 뭔지 알았을 때. 그때 그거를 다바르라 그래요. 그러면 하느님이 어둠과 빛을 나누셨다, 라는 게 무슨 말이에요? 어둠으로 빛을 알게 하셔서 이리로 건너오게 하신다는 언약이 들어가 있는 거란 말입니다.

이 어두움이, 그리고 이 낮이 하느님이 나누어서 이렇게 껌껌하고 밝은 거구나, 가 아니라, 성경은 그런 것에 아무 관심도 없어요. 아무 관심 없어요. 그렇게 되면 자, 밤은, 자 빛은 날이라 칭하고, 자 보세요. 여기 칭하다 는 말이 카라라는 말이거든요. 요거만 잘 알아두시면 여러분은 이제 앞으로 제가 무슨 소리를 해도 다 알아들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비비 꼬지 마시고 5분만 참으세요. ㅎㅎ 그냥 어쩔 줄을 몰라 가지고 그냥 , 지금. 이 카라 라는 단어가 뭐냐 하면 하느님이 우리를 이렇게 이름을 붙여서 불렀다. 이런 말이 아니라 내 쪽으로 하느님이 너, 이리 건너와, 라고 불렀다는 얘기에요. 그걸 그냥 개정성경이 불렀다고 하니까 호칭했다고 우리가 이해할 수밖에 없는데.

하느님이 빛을 날이라고 불렀다고 그랬죠? 그러면 보세요. 요 빛은 뭐라 그랬어요? 아래 것, 어두운 것들이 지금 그게 위의 것이구나, 라고 이렇게 이해되어지는 고것이, 빛이, ‘오르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고건 뭐예요? ‘이라는 게 뭐냐 하면, ‘주다’, ‘진리를’. ‘진리를 주는 그날이란 뜻이에요.

 

그러면 뭐예요? 하느님은 그 빛을 진리를 주는 그날로 부르신 거고. 코세크’, 밤을, 그러니까 흑암이죠, 흑암. 코세크흑암을 밤으로 부르셨어. ? 이 아래에 있는 흑암을 밤으로 불렀어. 그런데 이 밤이란 단어가 가르침을 주기 위해 가르치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여기가 밤이에요. 이 세상이 밤이라니까, 지금. 그러니까 하느님이 이 땅에 오셨더니 어두웠다고 그랬잖아요. 요한복음 1장에.

밤으로 부르셨어요. 우리를. ? 그 진리를 가르쳐서 우리를 살리려고. 그래서 그 흑암들을 밤으로 불러내셨어요. ? 그걸 빛으로 드러내어 진리로 주려고. 그러면 그게 뭐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는 거고. 그게 연합이라는 거야~. 라는 말이에요.

, 마지막으로 갈라디아서 216절에서35절까지보세요. 2:16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는 길이 율법을 지키는 데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읍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려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누구를 막론하고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17.그러나 만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우리 자신이 죄인으로 드러난다면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행위가 아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되는 거지요! 라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어떤 이들이 저놈들은 어떻게 저렇게 변하는 것도 없이, 성숙되는 것도 없이 저래? 저거? 계속 죄만 짓고 있네? 그래, 너희들 말대로 그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그 신앙생활하다가 죄인이 된다면 그 그리스도가 죄짓게 하는 분이냐? 이런 말이에요) 그리스도가 죄를 조장하시는 분이란 말입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18.만일 내가 전에 헐어 버린 것을 다시 세운다면 나는 스스로 법을 어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뭘 헐었어요? 성전, 예수를 헐었다니까요. 율법을 헐었다니까요) 19 나는 이미 율법의 손에 죽어서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위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20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21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사람이 율법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일이 될 것입니다. 3;1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왜 그렇게 어리석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여러분의 눈앞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미혹시켰단 말입니까? 2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을 지켜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3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성령의 힘으로 시작한 일을 지금 와서 인간의 힘으로 마치려 드는 것입니까? 4 여러분이 겪은 그 모든 경험이 다 헛일이었단 말입니까? 설마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5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신 것이 여러분이 율법을 지켰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입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이 아래 것, 율법, 성경 그걸 갖고 그래 이걸로 죽으면 되는 거지, 라고 죽으면 되는 거예요. 그럼 사는 거예요. 그래서 뱀이 와서 그러는 거예요. 너 이거 선악과 먹잖아? 그럼 네가 선악을 하는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우리가 만나야 되는 하느님은 선악을 아는 하느님이면 안 돼요. 그럼 우린 죽습니다. 네가 선악과 먹으면 너는 그 선악의 하느님 만나게 돼. 그러면 정녕 죽으면 돼. 율법을 여러분은 처음 만나게 되어 있어요. 교회에 와서 성경을 읽을 때 여러분은 처음부터 율법으로 보게 돼 있어요. 당연히. 그러면 그걸 갖고 죽으면 돼. 똑바로 사세요! 이거. 하도 그냥 무슨 신비주의 기복주의가 온 세상을 들썩이게 하길래 그거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사는 거야. 라고 하려고 똑바로 사세요. 그거를 열심히 읽으시고 죽으세요. 그리고 로마서를 들으시면 그렇지. 이렇게 사는 거지라고 알게 되는 거라니까.

그래서 뱀이 그러는 거예요. 선악을 아는 하느님을 알게 되는데 그러면 죽으면 돼. 하느님이 뭐라 그랬어요? 선악과 먹으면 무트, 타무트. 진짜 죽어. 그러면 살아. 이렇게 말하신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해요? ~ 먹지 말아야지. 입을 꼭 다물고. 그러면 그거 없이 어떻게 하늘의 의를 알아요? 아래의 어두움, 흑암이 없이 어떻게 그 빛을 압니까? 우리 창세기에서 봤잖아요. 지금. 모른단 말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그거 갖고 그걸 아셔야 돼요. 그리고 그렇지 그게 은혜지. 이게 자유지. 풀려남이지. 그렇게 알아야 돼요.

그런데 대부분 어디서 머무느냐 하면 그냥 전설, 전설 따라 삼천리에요. 신화, , 그 예수! 그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 예수를 믿으면 산대! 어디서 봤어요? 어디서 봤어요? 38년 된 병자. 누굽니까? 이스라엘에 가데스 광야에서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38년 걸렸거든요. 왜냐하면 가데스 광야까지 가는데 2년 걸렸으니까. 그런데 거기서 실패하고 38년 돼.

그런데 눈앞에 38년 된 병자가 있어요. 그래? 잘 됐어. 내가 이걸로 설명해줄게. 이게 이스라엘이야. 이게 율법이야. 얘야. 너 낫고 싶니? 당연히 낫고 싶죠. ㅎㅎ 그러면 낫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의 근원이 그 앞에 계신데 낫게 해주세요. 그래야 되는데, 저기요, 저 아래요 저 물을요 천사가 한번 내려와서 확 동하고가면 제일 먼저 뛰어 내려가는 놈은 산대요. 이게 전설이었거든요. 실지로 그러지 않았어요. 전설이었단 말에요. 그리고 제일 먼저, 요이땅 했는데 제일 먼저, 바람이 불어서 뭐 동했다고 쳐. 제일 먼저 뛰어 내려간 놈은 멀쩡한 놈이라니까. 어떻게 병자가 거기를 제일 먼저 뛰어 내려가서 퐁당 들어가느냐고요? 전설인 거예요. 그게 널 구원해준대? 네 병을 낫게 해준대? 네 그런대요. 누가 저 좀 도와주세요. 그리고 집어넣어 주세요. 저 전설 속으로.

예수님이 그러는 거예요. 얘야, 내 말 들어. 일어나서 가! 그 말 들으면 살아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말을 들을 생각을 안 하고 전설을 믿고 있어. 2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예수가 다 해결했대. 그 피가 우리를 대속했대. 그럼 우린 나은 거야. 그래놓고는 불안해서 만날 덜 덜 덜 덜. 진짜 그런 거예요? 그걸 알아야 된다니까요.

 

우리가 성당에 와서 바로 그런 안식. 그런 자유를 좀 누렸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이게 성도의 삶이지. 이게 진짜 자유지. 이렇게. 고향, 마치 고향 집, 고향에 온 것처럼.

우린 이 세상을 살 때, 그렇게 이방인같이 살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말이 통하는 이들이 모여 있는 이곳에 오면 우리가 그게 즐거워서 가기 싫고. 이래야 되는 거라니까. 그런데 어떻게 여기를 빠져요? 여기 오셔서 그 본향, 일주일에 한 두 번씩이라도 조금씩 맛보고 그걸 희망으로 계속 붙드는 거예요. 그게 성도의 신앙생활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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