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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4주간 수요일]수많은 옳은 것 중 사랑이 최우선입니다.<으뜸은 사랑입니다.>(18.09.19)
작성자박세양 쪽지 캡슐 작성일2018-09-19 조회수1,429 추천수0 반대(0) 신고

 1독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2,3113,13

형제 여러분, 31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

13,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4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8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10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11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3(32),2-3.4-5.1222(12참조)

행복하여라, 주님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비파 타며 주님을 찬송하고, 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불러라.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고운 가락을 내며 환성 올려라.

주님의 말씀은 바르고, 그 하신 일 모두 진실하다. 주님은 정의와 공정을 좋아하시네. 그분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당신 자애를 저희에게 베푸소서.

 

복음 환호송

요한 6,63.68 참조

알렐루야.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알렐루야.

 

복음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31-35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31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33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4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5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어제 서로 싸우는 두 사람을 봤습니다.
분위기를 보아 선배와 후배 같이 위 아래가 명확히 나뉘어 있는 관계인 듯 했습니다.
로 무언가 쌓고 있던 것이 폭발한 듯한 그런 느낌이었죠.
서로 싸우는 내용을 곰곰이 들어봤습니다.
나오는 이야기가 진실이라 했을 때
둘 다 서로 잘못한 것이 있고 둘 다 옳은 이야기를 서로에게 하고 있었습니다.
서로에게 부족한 이야기를 서로에게 하고 있었죠.
그러나 싸움은 서로 얼굴만 붉히고 끝났습니다. 서로 미워하는 상태로 끝났죠.
왜냐하면 서로가 틀렸다는 것만을 바라보았던 이 싸움은 서로 틀렸다는 것만을 주장하고 끝났으니까요.
참으로 그 둘을 바라보며 안타까웠습니다.
이것이 개인의 도덕률의 한계인 것입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가치관이 다르고 서로 집중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다릅니다.
정의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참으로 힘든 것이죠.
오늘 예수님도 그러한 정의의 희생자였습니다.
정의에 따라 이 사람 저 사람 각종 의견을 들으면 모든 것이 그른 것이 되어 버립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사실 정의의 이상은 너무나 허황된 것입니다.
모두가 옳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회, 얼마나 보기 좋은 꿈입니까?
그러나 참으로 허황된 꿈이지요.
그럼 묻겠습니다.
공동체가 이야기하는 옳음 예를 들자면 국가가 말하는 옳음을 글을 읽는 여러분 모두 인정하십니까?
인정한다 하신다면 그럼 국가가 말하는 옳음을 국민들이 모두 동의할까요?
아닐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여당이 있다면 야당이 있듯이 옳음의 통일은 불가능합니다.
서로 보고 자란 것이 다르고 서로 만들어진 가치관이 다릅니다.
이런 이들 사이에서 정의의 이상을 이루기는 불가능합니다.
나와 의견이 맞는 이들보다 다른 이들이 많기 때문이죠.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계속 고집하며 극단으로 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바로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자주 보았던 악인의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이를 일어서지도 못하게 쓰러뜨려 버리자. 그는 부정한 자로서 하느님을 사칭하는 자이다.

 

우리가 한 처음에 왜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금지 시키셨을까를 되돌아보면
이러한 정의의 결과는 결국 서로 고립되게 만드는 악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정의를 외치는 이들은 다른 이의 잘못을 들추고 낮춤으로서 자신을 높인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만일 그들이 지적한 이들이 전부 그들 말을 믿고 회개하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요?
자기 빼고 다른 사람만 성인이 되는 현상이 펼쳐집니다.
다른 이들은 자신의 말을 듣고 회개했는데 정작 자신은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죠.
이것은 자기희생이 아닌 스스로의 고집과 교만이 이룬 자신의 파멸입니다.
이러한 정의의 한계는 예수님 시대에 극단에 이릅니다.
과거에는 다른 우상들을 통해 정의를 외쳤다면 예수님 시대에는 하느님 이름으로 정의를 외치던 시대입니다.
그 정의에 따라주지 않았다고 예수님을 악인으로 치부하여 십자가에 못 박았던 시대입니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사실 이러한 왜곡에 빠진 이들은 구약에서 자주 보였던 정의와 심판의 하느님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구약에서의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인식해도 정의와 심판의 하느님이 아니셨습니다.
그 정의와 심판의 하느님께서 상당히 많이 자신의 뜻을 인간들에게 숙이신 모습이
많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죠.
심지어 요나 예언자는 이렇게 고개를 숙이시는 하느님에 대해 큰 불만을 품었기에
자신의 성소도 거부하려 했을 정도였습니다.

 

, 주님! 제가 고향에 있을 때에 이미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서둘러 타르시스로 달아났습니다
.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 4.2

 

대표적으로 하느님은 모세의 뜻에 순명하시는 모습도 보이십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횡단 중 수많은 죄를 저지릅니다.
그 때 하느님께서는 이들을 자주 멸망시키려 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에 순명하는 모세의 뜻을 받아들이시고 순명하시는 모습을 자주 보이십니다.
사실 구약시절에 올바르게 기억하던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었습니다.
자신과 다르다고 죽이던 것들은 다른 우상들이었고 말이죠.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다른 우상들을 당신의 발 앞에 꿇리는 모습을 자주 보이십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사랑하지 못하는 이들과 사랑받지 못하는 환경을 심판합니다.
율법학자들에게 불행 선언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에게 옳은 길을 알려주어 미치광이라 불리던 세례자 요한은
사랑하지 못하는 이들을 사랑하라고 권고하고 방법을 알려줌으로서
정의를 실천한 것이며
병자와 과부와 죄인들에게 다가가시어 술꾼이요 먹보가 되신 예수님께서는
사랑받지 못하는 환경을 깨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정의의 중심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정의는 사랑이 없다면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 나온 모든 선에 사랑이 없다면 실현이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를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것을 실현하고 싶으십니까?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유형무형한 세상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사랑하십시오.
그것이 시작점입니다.
누가 무엇을 하면 사랑할 것이며 무엇을 이루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우선이 되어야합니다.
사랑은 옳은 것을 하기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닌 상대가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며 사랑합니다.
사랑은 상대에게 친절을 알려주기 위해 먼저 친절하게 대하며
상대에게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 먼저 사랑을 베풉니다.
사랑은 옳고 그름이 아닌 사랑하는가 아닌가를 바라봅니다.
사랑은 층이 두 개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가 / 하지 않는가
그래서 층이 나뉠 필요도 없고 그저 안하는 이들은 안타까울 뿐입니다.
가톨릭은 먼저 사랑하고 사랑을 식별하며 사랑을 이끌어 낼 뿐입니다.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모든 이들에게 보입시다. 그것이 우리의 봉헌이며 충실한 종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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