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18년 9월 27일(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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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18-09-27 | 조회수1,445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18년 9월 27일 [(백)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빈첸시오 드 폴 성인은 1581년 프랑스 랑드 지방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란치스코 수도원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1600년에 사제품을 받았고, 1617년에 가난한 이들을 만나는 체험을 하였다. 이때 그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것’임을 깨닫고, 자선 단체인 사랑의 동지회, 전교회, 사랑의 딸회를 창설하여,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일생을 바쳐 봉사하였다. 1660년에 선종한 빈첸시오는 1737년에 시성되었다. 1885년에 레오 13세 교황은 그를 ‘모든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 으로 선포하였다. 오늘날 수많은 이들이 성인의 영성을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사랑의 딸회, 사랑의 씨튼 수녀회,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와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서로 연대하며 활동하고 있다. 말씀의초대 코헬렛은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하고 말한다(제1독서).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하며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한다. ◎제1독서◎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그곳으로 서둘러 간다. 도는 바람은 돌고 돌며 가지만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바다는 가득 차지 않는다. 계속 흘러든다.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새로운 것이다.” 말하는 것이 있더라도 이미 있던 것이다. 기억하지 않듯 장차 일어날 일도 마찬가지. 그 후에 일어나는 일도 매한가지다. ◎화답송◎ 시편 90(89), 3-4.5-6.12-13.14와 17(◎ 1)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돌아가게 하시며 당신은 말씀하시나이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 ◎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그들은 아침에 든 선잠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 같사옵니다. 아침에 돋아나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헤아리도록 가르치소서. 저희 마음이 슬기를 얻으리이다. 돌아오소서, 주님, 언제까지리이까? 당신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실어 주소서. ◎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복음환호송◎ 요한 14,6 참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복음◎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복음입니다. 9,7-9 예수님께서 하신 7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하는가 하면,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였다.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만나 보려고 하였다. ◎오늘의묵상◎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덧없음을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은 어느 순간에 생겼다가 또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것이지요. 재물도 명예도 인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코헬렛은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이 겪게 되는 무상함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은 이런 무상하고 덧없는 삶을 살아가다가 죽음을 맞이해야 하기에, 그 앞날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가 불안에 떱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풀고, 병을 낫게 해 주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지요. 더욱이 소문은 꼬리를 뭅니다. 죽은 세례자 요한이 살아났다고도 하고,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합니다. 시달리다가 호기심에 못 이겨 예수님을 만나 보려 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세로는 결코 주님을 알아 뵙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면 나도 믿겠다.” 라는 식의 말을 많이 합니다. 그렇지만 믿음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헤로데처럼 결코 예수님을 체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지요. 예수님께서 붙잡혀 빌라도에게 넘겨졌을 때, 헤로데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징이라도 보려고 이것저것 캐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루카 23,9 참조). 예수님과 참된 만남을 이루려면 믿음으로 다가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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