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11.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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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18-11-20 | 조회수1,596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2018년 11월 20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제1독서 묵시 3,1-6.14-22 나 요한은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천사에게 써 보내라. ‘하느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말한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2 깨어 있어라.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 가는 것들을 튼튼하게 만들어라. 나는 네가 한 일들이 나의 하느님 앞에서 완전하다고 보지 않는다. 3 그러므로 네가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들었는지 되새겨, 그것을 지키고 또 회개하여라. 네가 깨어나지 않으면 내가 도둑처럼 가겠다. 너는 내가 어느 때에 너에게 갈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4 그러나 사르디스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 있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이다.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5 승리하는 사람은 이처럼 흰옷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을 것이고, 내 아버지와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6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천사에게 써 보내라. ‘아멘 그 자체이고 성실하고 참된 증인이며 하느님 창조의 근원인 이가 말한다. 15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16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17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 나에게서 불로 정련된 금을 사서 부자가 되고, 흰옷을 사 입어 너의 수치스러운 알몸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제대로 볼 수 있게 하여라. 19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21 승리하는 사람은, 내가 승리한 뒤에 내 아버지의 어좌에 그분과 함께 앉은 것처럼, 내 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해 주겠다. 22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복음 루카 19,1-10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2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3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4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5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7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8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에게 이르셨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이러한 생각까지 이르게 되면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유리컵과 종이컵을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이 모습에 사람들은 “보십시오, 주님! 나의 이웃들에게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사랑의 말을 남겨 놓아야 함을 나는 배웠다. 어느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이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샤를 드 푸코) 자캐오가 올라갔다는 예리코의 돌무화과 나무. 내가 경기를 보면 지는 이유 (박진영,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중에서) 인간은 의미에 목말라하는 동물이다 아무것도 아닌 자극에서조차 어떤 뜻을 읽어 낸다. 우연히 일어난 일을 운명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돼지꿈을 꾸면 복권을 사듯, 알 수 없는 일을 가급적 ‘알 수 있는 일’로 끌어내려고 설명과 해석을 찾는다. 이유는 무엇일까? 삶에서 겪는 다양한 사건에는 미리 예측하고 통제할 수 없는 것도 많다. 그럼에도 최대한 그럴싸한 규칙을 찾아내면 ‘그 이치대로 살면 되겠구나.’ 하고 위안을 얻는다. 예를 들어 내가 응원하는 팀이 경기에서 이기거나 지는 상황, 즉 나의 통제력을 전혀 끼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이런 생각이 가능하다. “지난번엔 내가 중계를 봐서 진 거야.” 이번에는 안 보면서 어느 정도 결과를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연구자들은 다양하고 무작위적인 자극과 규칙적인 패턴을 보여 주었다. 그 뒤 자신의 삶이 얼마나 의미 있다고 느끼는지 물었다. 그 결과 규칙적인 자극을 본 사람들이 더 삶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며 공허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일상의 예측 가능한 부분, 예컨대 아침마다 마시는 커피, 매일 지나치는 출근길, 규칙적으로 만나는 사람들 등 사소한 것이 사실 삶의 의미를 받치는 중요한 요소라고 한다. 사실은 변하지 않는 규칙들이 있기에 자신감을 갖고 사는 것 아닐까? 이를테면 어떤 상황에도 아침은 찾아오고, 2호선을 타면 신촌에 갈 수 있고, 드라마는 언제나 재미있을 것이다. 설사 몇 가지 일이 잘못되더라도 삶은 비슷하게 흘러가고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은 이렇게 소중하다.
변함없이 성지 앞을 가득채우는 순례객들의 차. 감사할 일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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