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19년 1월 2일 수요일(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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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19-01-02 | 조회수1,218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19년 1월 2일 수요일 [(백)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바실리오 성인은 330년 무렵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 체사레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와 조모, 누이 마크리나,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오 주교와 세바스테아의 베드로 주교가 모두 성인일 만큼 영광스러운 가문의 출신이다. 은수 생활을 하기도 한 바실리오는 학문과 덕행에서 특출하였다. 370년 무렵 체사레아의 주교가 된 그는 특히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싸웠다. 바실리오 주교는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그의 수도 규칙은 오늘날까지도 동방 교회의 많은 수도자가 따르고 있다. 379년 무렵 선종하였다. 그레고리오 성인 또한 330년 무렵 바실리오 성인과 같은 지역의 나지안조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료 바실리오를 따라 은수 생활을 하다가 381년 무렵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가 되었다. 그레고리오 주교도 바실리오 주교처럼 학문과 웅변이 뛰어났으며, 이단을 물리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390년 무렵 선종하였다. 말씀의초대 요한 사도는,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라고 한다(제1독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하며, 자신은 뒤에 오시는 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한다. ◎제1독서◎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2,22-28 부인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자가 곧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라야 아버지도 모십니다.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여러분 안에 간직하면,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신 약속,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관련하여 이 글을 씁니다. 기름부음을 받았고 보존하고 있으므로,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거짓이 없습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화답송◎ 시편 98(97),1.2-3ㄱㄴ.3ㄷㄹ-4 (◎ 3ㄷㄹ)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 자애와 진실을 기억하셨네.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복음환호송◎ 히브 1,1-2 참조 예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네. ◎복음◎ <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 복음입니다. 1,19-28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엘리야요?” 하고 묻자,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말하는 것이오?”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보낸 사람들이었다.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오늘의묵상◎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자동차는 자동차로 쓰이고 비행기는 비행기로 쓰여야 합니다. 자동차가 하늘을 날려 하고 비행기가 도로를 달리려 하면 불행해집니다. 누구나 자신이 생겨난 이유를 알아 그 목적대로 사용되어야 기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정체성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누구요?” 라고 묻습니다. 정체성을 묻는 것입니다. 요한은 명확하게 “나는 ……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라고 대답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소명’ 으로 대답한 것입니다. 만약 요한이 “나는 유다 산악 지방 출신이고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아들이다.” 라고 대답하였다면, 여전히 그가 왜 세례를 주고 있는지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는 이러한 일을 하려고 하느님에게서 파견받았다.”라는 식으로 대답하여, 자신이 하는 행위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나는 누구이다.”라는 각자의 대답 안에 주님께 받은 소명이 들어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실제로 하느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이 살아갈 가능성이 큽니다. “나는 의사이다.”와 “주님께서 내가 의사로 살기를 원하신다.” 는 천지 차이입니다. 각자에 대한 어떠한 창조 목적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목적 없이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례자 요한만이 아니라 우리 각자를 만드실 때 저마다 소명을 부여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왜 만드셨는지 알아야 삶이 의미 있어집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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