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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4주일/누가 예수님을 벼랑 끝으로 내 모는가/신대원 신부
작성자원근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2-02 조회수1,262 추천수1 반대(0) 신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루카 4,21-30)


누가 예수님을 벼랑 끝으로 내 모는가?


연중 제4주일이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당신의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해 당신의 사명선언문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목격했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실현 해야 할 사명은 '주님의 은혜로운 해'(루카 4,19)를 선포하시는 일이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여 그들의 삶 속에 기쁨이 넘쳐나도록 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여 억울하게 잡혀가 영어(囹圄)=(감옥).의 삶을 사는 그들이 목 놓아 자유를 노래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또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여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똑똑하게 목도(目睹)하도록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이 땅에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면서 그 모든 일이 곧 주님께서 베푸신 자비에서 비롯됨을 온몸으로 살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이러한 예수님 사명이야말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수행해야 할 사명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열성적 신앙인들이다. 예수께서 이사야 예언자 말씀을 낭독하실 때에도, 또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말씀하실 때에도 그들은 열성신자답게 그 말씀을 하느님 은총으로 받아들이고 놀라워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적 열정은 오래가지 못하고 돌연 무서운 집단적 패거영어(囹圄) 돌변하는 순간이며, 그들이 자긍심을 지녔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잘못됐음을 자인하는 순간이다.

왜곡된 믿음은 눈에 보이는 '기적(잿밥)'에 더 관심을 끌게 하고, 오로지 기적만을 강조하게 한다. 주님의 참된 말씀을 앞세워 살기보다는 자신들의 그릇된 욕심을 앞세우려 하기 때문이다. 기적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일시적 영달을 채우려는 못된 마음 씀씀이가 문제다.

주님께서 베푸신 기적은 당신의 위대함을 드러내시고자 행하시는 이상한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갈라지고 다투며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는 인류를 바로잡으시려는 은총이요 은사다. 따라서 은총은 인류를 사랑하시는 당신 자비에 바탕을 둔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 방문이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은총임을 깨닫기보다는 고향이라는 것을 내세워 몇 배나 더 강한 기적을 행할 것을 주문하려 했다. 선민의식으로 가득 찬 그들은 예수께서 소개하시는 하느님이 그들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하느님도 되신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유다인들의 선민의식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안에서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당신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 당신의 공동체를 세우셨다. 그러나 그분이 뽑아 세운 일꾼들은 또다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그분을 '감실(龕室)'에 가두고, 감실 안에 계시는 분만 세상에 소개하려 한다. 모든 세상 사람들의 주님이 아니라 그들만의 주님으로 섬기려 하기에 그분이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참뜻을 저버리는 신세로 전락하려 한다. 사람이면 누구나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누리면서 살기를 일깨워주기는커녕 그분을 다시금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그러니 그 옛날 나자렛 사람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우리는 교회의 몸이시며 머리이신 분께서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고"(2티모 1,10), 또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8)라는 선언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사정은 어떠한가. 입으로는 무엇인들 말하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지금 우리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 떨어뜨리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 교회 공동체를 세우신 그분, 교회의 몸이시고 머리이신 분의 말씀을 듣고 화를 잔뜩 낸 적은 없는가.

기대려 하고, 교회의 안보를 내 잘못되어 돌아가는 정치에 일침을 가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의를 실천하지 못하고, 작고 약한 이들의 생명을 우습게 여기고, 쥐꼬리만한 세속 권력에세워 불의와 타협하지는 않았는가. 또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다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위로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험담하고, 입만 열면 '십자가' 운운하면서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십자가에 대해서는 교묘하고 해괴한 논리로 회피하지는 않았는가. 그뿐만 아니라 진리나 진실보다는 권력과 재물과 학력에 모든 것을 걸려는 삶의 행태야말로 예수님을 벼랑으로 끌고 가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모습이 아닐까.  

예수님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면 우리가 주님의 자녀나 일꾼이라고 감히 불릴 수 있을까. 신앙의 해를 보내면서 주님 뜻을 올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그래서 참된 믿음을 잃어버렸거나 심각하게 왜곡하거나 혹은 훼손하고 있다면, 주저 없이 예수께로 돌아와 그분에 대한 참된 신앙을 재발견하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다시는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서른 살에 이미 독일 사회의 저명인사가 되었던 슈바이처 박사는 그때 철학과 신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던 학자였다. 또한 바흐 음악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하였다.

그랬던 그가 세상의 잘나가던 모든 명예를 등지고 뒤늦게 의학을 공부해 아프리카 밀림의 원주민들을 돕기 위해 봉사의 삶을 선택한다.

그는 인간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명들을 사랑하고 살리는데 앞장섰다. 슈바이처 박사는 아프리카 밀림에서 생명과 사랑에 대하여 이같이 썼다.

“나는 살려고 하는 여러 생명 중의 하나로 이 세상에 살고 있다. 생명에 관해 생각할 때 어떤 생명체도 나와 똑같이 살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른 모든 생명도 나의 생명과 같으며, 신비한 가치를 지녔기에 존중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 선의 근본은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보호하고 높이는데 있으며, 악은 이와 반대로 생명을 죽이고 해치고 올바른 성장을 막는 것을 뜻한다. 때문에 나는 살아갈 때 하나의 나뭇잎이라도 공연히 따버리지 않으려 하였다. 한 떨기의 들꽃도 그냥은 꺾지 않는다. 기어 다니는 벌레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여름밤 등불 아래에서 일할 때 많은 날벌레들이 불꽃에 날아들다가 떨어져 책상 위에 뒹구는 것을 보는 것 보다는 차라리 무덥더라도 창문을 닫고 방안에 앉아 있는 쪽을 택한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하여 한 마디로 논하시기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 12) 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성 바오로께서는 오늘 사랑의 찬가를 통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약속인 사랑을 가장 높은 가치 위에 두고 있다.

즉, 성령께서 주시는 모든 은총의 선물인 사도직분, 예언의 은사, 가르치는 은사,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 병을 고치는 은사, 도와주는 은사, 지도하는 은사,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 위에 더 큰 은총의 선물을 열심히 구하라고 하면서(1코린 12, 28~31 참조) 가장 뛰어난 길로 사랑의 길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그 같은 사랑의 길은 천사의 언어나 모든 신비와 지식을 뛰어 넘으며, 산을 옮길 큰 믿음은 물론, 자신의 몸을 모두 내어준다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음을 힘주어 가르칩애다.(1코린 13, 1~3 참조) 그리고 지고한 사랑의 자세에 대하여 강조한 뒤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 13, 13)
[말씀자료 : - 신대원 신부 - [편집 : 원근식 요아킴]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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