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그분만을 구세주로 고백해야 할 우리는 / 연중 제6주간 목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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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19-02-21 | 조회수1,273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야누스의 얼굴’이란 말이 있다. 두 개의 얼굴과 네 개의 다리를 가진 신을 말하는데, 인간의 부정적인 ‘이중성’을 표현할 때 쓴다. 신앙에도 이런 이중성이 있다. 늘 예수님을 고백하면서도 희생과 고통은 철저하게 외면한다. 봉사할 때도 남들 눈에 띄는 일은 좋아하면서도, 숨어서 하는 희생은 하지 않는 경우이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지, 예수님을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허상의 예수님을 만들어 내 편리대로 이용하는 분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겠다면 신앙인으로서 희생과 고통도 감수하자. 고통도 ‘선물’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주님의 참된 제자일 테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 엘리야,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담대하게 대답하였다.’(마르 8,27-29) 예수님께서는 필리피를 향하여 떠나시면서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그 지역은 헤로데와 클레오파트라 왕비 사이에 태어난 헤로데 필리피가 다스렸던 곳으로, 로마의 첫 번째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를 기려 세운 곳이다. 또한 이교도의 중심지였으며, 구약 시대에는 그들 신앙의 ‘바알’ 신의 예배 중심지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곳은 이교도인의 유산과 문화를 집대성해 놓은 도시였을 게다.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도시에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신지를 물어보시는 것은 당신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라기보다는, 바로 제자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라고 보아야 할 게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지 않은, 죄와 죽음이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이 당신을 진정한 메시아로 고백하는 참된 신앙인인지를 확인하시려고 계속해서 이 질문을 던지시리라. 우리는 주님의 이 질문에, 어떤 대답으로 우리 ‘정체성’을 드러낼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사람은 좋아하는 이는 사람을 선택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를 다 사랑하신단다. 우리는 좋아하고 사랑하고 싶은 이만을 선택하기에 사람을 차별하고 편애하기가 쉽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한다. 하느님께서는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모든 이를 사랑하신다. 우리가 이 하느님의 마음을 닮아 갔으면 좋겠다. 하느님 마음을 안다면 우리는 늘 하느님 일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게다. 꼭 예수님처럼 말이다. 역사상 인간은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예수님의 질문을 계속해서 받아 왔다. 이에 어떠한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모습도 달라졌고 세상의 모습도 달라졌다. 이 엄숙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게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함은 내 뜻, 내 신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 예수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고백하는 것이니까. 이렇게 그분 제자로 따름으로써 세상의 악과 어둠을 없애시는 그분과 어디서나 늘 함께하는 것이니까. 그러니 구세주란 고백은 엄청난 신앙 행위이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처럼 고백할 수 있을지? 아니 진심으로 할 수 있을지? 누구나 예수님의 손길을 만날 게다. 그분께서 개입하셨다고 느껴지는 ‘사건’일 테니까. 분명히 그분께서 간섭하셨다고 느껴지는 ‘만남’일 터이니까. 그때 우리는 ‘모든 원인은 당신이십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그래야 그분을 구세주로 선언하는 행위일 것이니까. 기쁘고 좋은 만남에선 쉽다. 그러나 억울하고 힘든 사건에선 괴로울 게다. 평소의 연습이 없다면야 참으로 어려운 고백이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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