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평생 잊을 수 없는 신부님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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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 작성일2019-02-24 | 조회수2,406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저에겐 평생 잊지 못할 신부님이 한 분 계십니다. 사실 형 같은 신부님입니다. 수도 사제이십니다. 지금은 외국에 계십니다. 이 신부님과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사실 그러니까 제 어머니께서 투병하실 무렵 몇 개월 전에 제가 많이 신앙적으로 또 한 차례 고비가 찾아왔습니다. 개종한 거에 대한 후회였습니다.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성당을 떠날 생각으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근데 지금 보면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성당을 떠날 마음을 가졌는데 이상하게도 떠날 때 떠나더라도 제가 떠나면서 마음의 고통을 가지지 않으려고 교구청에 계신 신부님께 부탁드려 면담성사를 봤습니다. 면담성사를 보면서 제가 솔직히 말씀드렸습니다. 개신교를 다시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까지 말씀드렸습니다. 지금에 와서 그때 당시의 제 심리 상태를 살펴보면 제 마음 깊은 구석에는 이미 떠날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제가 생각을 할까요? 그때 그 신부님과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신부님께서 천주교와 개신교 양쪽 면을 비교도 해 주셨고 저도 천주교로 개종하면서 정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면을 조목조목 정말 논리적으로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신부님께서 그럼 형제님 개신교에 다시 가더라도 괜찮습니다 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제가 그때 그 신부님께 면담성사를 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어떤 불안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만약 다시 개신교를 갔을 때 제가 나중에 최후의 심판 때 하느님으로부터 이런 행위에 대해 어떤 심판이 내려질지 그게 하나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마음의 짐이 덜어져야 다시 개신교를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면담성사를 통해서 한번 이 부분을 영성적으로 판단을 해보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근데 그날 신부님의 반응에 사실 좀 놀라웠던 부분이 있습니다. 만약 보통 그런 상태라면 역으로 생각해봤을 때 분명히 저에 대해 신부님께서 만류하시는 방향으로 상담을 진행하는 게 보통의 심리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근데 그날 신부님께서는 여러 가지 제가 드린 말씀을 들으시고 그런 다음 저에게 마태오복음 성경 최후의 심판을 펴시면서 이미 하느님께서 어떻게 심판하실지를 이미 성경에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형제님이 어디에 있든지 만약 지금까지 형제님이 말씀하신 신앙의 정신이라면 다시 개신교를 가더라도 그 부분에 대한 책임은 하느님께서 묻지 않으실 겁니다 라고 말씀하시길래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만약 신부님 말씀 듣고 그렇게 했다가 그런 책임을 하느님께서 물으시면 어떻게 해야 되죠 하니 신부님께서 만약 하느님께서 그때 그런 책임을 물으시면 그건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시고 다시 개신교에 가도 됩니다 라고 말씀하셔서 제가 한편으론 의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거라고는 도저히 예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날 신부님과 면담성사를 보고 제가 고민을 좀 더 해보겠습니다 하고 성사를 마무리하면서 신부님께서 복음에 나오는 비유에 관한 외국 신부님께서 저술한 책 한 권을 주시면서 헤어졌습니다. 참 사람의 심리는 이상합니다. 집에 와서 혼자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히려 그때 신부님께서 잡지 않으신 게 의문이었습니다. 제 같으면 분명 설득을 했을 겁니다. 지금에서 와 생각해 보면 어찌 보면 그때 그 신부님께서 대단한 도박을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제가 제 심리 상태를 말씀드렸을 때 이미 이 사람은 말은 이렇게 해도 근본적으로는 다시 개신교를 가지 않을 거라고 제 마음을 간파하셨을 거라고 저는 봅니다. 그렇게 제 맘을 파악하시고 일명 그때 저와 밀당을 하신 거라고 저는 봅니다. 정말 고도의 수를 사용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그날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하다가 최종적으로 다시 한 번 더 고민을 해결할 방법으로 수도원을 찾아 갔습니다. 그때 만난 신부님이 바로 제가 서두에 형 같은 신부님이라고 말씀드린 신부님입니다. 사실 지금에서 와 생각해 보면 이 신부님과의 이때 만남이 제가 다시 가톨릭 신앙으로 확실히 굳힌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신부님에게서 작은 예수님의 모습인 목자의 모습을 봤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저와 세상적인 나이가 좀 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어느 날 피정을 하면서 신부님께서 왜 어떻게 신부가 되었는지 연유를 말씀하셨는데 그때 대충 신부님의 연배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랑 나이가 몇 살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걸 그때 알았던 겁니다. 그때 그 신부님과 인연이 되어 제가 다시 신앙에 매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신 분입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수도원을 다니면서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하게 되었던 겁니다. 이때 신부님 덕분에 기도생활의 습관을 들일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마음을 다잡으면서 어머니를 위한 기도를 하기 위해 시간만 나면 수도원에 와서 기도를 하며 제 마음을 기도로 달랬습니다. 거의 매일 2년을 수도원을 어머니께서 선종하실 때까지 다녔으니깐요. 어머니 병 때문에 정말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그때 그 신부님 덕분에 제가 정말 기도로 많이 인내하게 해 주신 분이라 저에게는 정말 잊을 수 없는 신부님입니다.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그 신부님이 인간적으로 형 같다고 느낀 적이 한 번 있었습니다. 사실 신부님과 2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하면서 정도 많이 들었었겠죠. 어느 날 하루는 신부님께서 저에게 쵸코릿 하나를 주신 날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날 이때 신부님이 마치 형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수도원에 새벽에 미사를 마치고 신부님께서 소성당 문 앞에 잠시 기다려라고 하시길래 제가 성전 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신부님께서 성당 문을 살며시 여시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주위를 살피시는 겁니다. 그리고 저에게 다가오시면서 초코릿을 주시면서 형제님 이거 선물 받은 건데 하나 형제님 드리는 거라고 하면서 먹으라고 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때 저는 신부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왜 신부님이 주위를 살피셨는지 말입니다. 제가 이심전심으로 읽었습니다. 사실 초코릿은 하나밖에 없는데 누군 주고 누군 안 줄 수 없는 상황이라 저에게 주고 싶은데 만약 주위에 다른 분이 계시면 입장이 곤란하실 거라고 생각하셔서 그렇게 하셨으리라고 생각을 했는데 역시 나중에 알고 보니 제 생각이 맞았습니다. 이때 신부님께서 하신 행동과 모습을 보면 마치 옛날 드라마에 나오는 형과 동생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 속 형이 동생을 아껴 동생에게 뭔가 주는 그런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저는 그날 저녁에 그날 신부님의 그 마음 씀씀이를 잊을 수 없고 또 그때 주위를 살피시는 그 표정 또한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 그 모습 때문에 저는 마음 한 켠에는 신분상 신부님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인간적인 감정으로는 형처럼 느끼는 겁니다. 이렇게 2년 가까이 지내다가 신부님께서 다른 수도원으로 수도원을 옮겼습니다. 신부님께서 수도원을 옮기셔서 저로서는 신부님께 영적으로 많은 도움과 의지가 되었기에 많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그런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가끔 전화로 안부를 여쭈며 서로 소식을 전하며 지냈습니다. 신부님께서 다른 수도원으로 가시기 전에 부산에 입원해계신 어머니를 위해 병자성사를 직접 해 주셨습니다. 또 부산에 한차례 더 와주셔서 기도를 해 주셨고 마산에 계실 때도 직접 한 번은 마지막 선종하시기 전에 한 번 더 성사를 집접해주셨고 광주에 계시면서 마산에 오실 일이 있어셔서 오실 때에도 제 어머니를 위해 일부러 다시 병원을 찾아 주신 은혜는 저로서는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나중에서야 알은 사실입니다. 신부님께서 유학가시고 나서 알았습니다. 제가 한 번은 궁금했습니다. 신부님께 여쭤봤습니다. 메일로요. 신부님, 사실 신자가 많이 있는데 제가 봤을 때 제가 생각해도 저에게 정말 과분할 정도로 잘 챙겨주시는데 무슨 이유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그 연유가 있다면 알 수 있을까요 하고 여쭤봤습니다. 그러니까 신부님께서 답장을 주셨습니다. 제가 사실 거의 2년 동안 수도원을 다니면서 제가 제 어머니를 위해 드리는 기도와 또 제 어머니를 위해 병간호 하는 정성에 사실 신부님께서 인간적으로 감동을 하셔서 그래서 저를 좀 더 잘 챙겨주시고 싶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모르겠네요. 그냥 평범한 신자인데 신부님께서는 그런 인간적인 부분에 또 나름 감동이 되셨나봅니다. 그럼 제가 이 신부님께 느낀 감동을 한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이건 평생 잊으면 안 되고 또 잊어서도 안 되는 그런 은혜입니다. 정말 잊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께서 선종하신 날 신부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신부님께서 직접 부산까지 가셔서 병자성사도 주셨고 여러 차례 병원에 오셔서 저희 어머니를 위해 기도를 해 주셨고 평상시에도 새벽미사 때 어머니를 위해 봉헌도 해 주셨기에 그래도 소식은 알려드리는 게 도리인 것 같아 알려드렸습니다. 그러면 또 신부님께서 제 어머니 영혼을 위해 기도를 해 주실 것 같아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사실 그땐 어머니께서 선종하신 사실 때문에도 참담했지만 그것보다도 더 가슴 아픈 건 어머니께서 대세를 받은 사실을 집안에서 모르기 때문에 장례를 불교식으로 치러야 되는 정말 가슴 아픈 상황이라 신부님께 이런 사정을 말씀드리면서 기도를 부탁드렸던 겁니다. 이때 신부님께서는 마침 수도원에 계시지 않았고 재속회 교육 때문에 수도권에 계셨습니다. 근데 극적으로 어머니 장례 발인 하루 전날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원래 어머니께서 선종하신 날 제가 형들에게 어머니 장례를 천주교식으로 치룰 수 없는지 상의를 드렸지만 어머니께서 평생 절을 다니신 분이라 정말 그날 제가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르자고 하는 말에 집안에 분란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 마음이 얼마나 한이 되는 그런 상황이었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발인 하루 전 날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정말 하느님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제 한을 풀어주셨습니다. 아마 제가 2년 가까운 시간을 눈물로 드린 기도 덕분에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장례미사로 어머니를 하느님 품에 보내드릴 수 있는 일이 일어났던 겁니다. 이 사실이 결정이 나고 나서 제가 다시 신부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성당에서 어머니 장례미사를 하게 되었다는 걸 알려드렸습니다. 신부님께서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장례미사에 참여하시겠다는 겁니다. 저로서는 감사한 일이지만 이때 신부님께서는 인천에 계셔서 가까이 계시면은 모르지만 정말 마산까지 오시게 한다는 건 신부님께 부담을 드리는 것 같아 신부님께 만류를 해드렸지만 신부님께서 장상 허가를 득해서 오시겠다고 하셔서 저로서는 미안하고 죄송하면서도 정말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사실 장상 신부님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마산 수도원에도 계셨고 마산에 계실 때는 성소를 담당하셨고 광주를 가시면서 장상으로 가셨기에 평소 수도원에 제가 자주 갔기에 저를 또 알고 계셔서 신부님께서 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시면 아만 장상 신부님께서 허락해주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신부님께서 장상 신부님이 허락해주셔서 바로 그날 저녁 늦게 밤차로 광주로 이동하셨다가 광주에서 새벽에 출발하셔서 오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저에겐 정말 어떤 감사로도 표현할 수 없는 정말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인천에서 밤차로 내려오셔서 광주에서 새벽에 손수 3시간 운전을 하시며 장례미사가 오전 9시에 있었는데 거의 15분 전에 본당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날 신부님 외에 또 한 분 신부님이 오셨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신부님이신데요 원로 신부님이신 마산교구 이형수 몬시뇰입니다. 그래서 그날 어머니 장례미사 때는 본당 신부님께서 주례를 하시고 두 분 신부님께서도 함께 집전해 주셔서 그날 본당에 장례미사에 참석하신 신자분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교우님들은 저만 신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어머니는 제가 평소 계속 미사를 넣었기 때문에 저의 이런 가정 내부의 속사정을 아는 입장인데 그날 어머니께서 선종하신 그날도 장례미사를 못하기에 그냥 기도만 부탁한다고 본당에는 그렇게 소식이 전해졌는데 이건 기적적으로 장례미사를 하는데다가 그것도 본당 신부님 혼자 집전하시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 장례미사를 위해 광주에서 수도원 신부님도 오시고 몬시뇰님도 오시니 평소 제가 물론 전례 때 영세 받고 나서 복사도 열심히 서고 해서 열심히 하는 건 알지만 두 분 신부님의 미사 참례로 저를 보는 시각이 완전 다르게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보기에 제가 부실하게 신앙생활하는 것처럼 보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신앙생활을 잘 했다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그래도 보기와는 조금 다르다는 그런 정도입니다. 그때 저희 본당 큰 수녀님께서도 조금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장례미사를 마치고 장지에 가는 도중에 문자를 주셨습니다. 그래도 참 아들 덕분에 엄마가 마지막 가시는 길에 귀한 신부님 두 분이 오셔서 마지막 세상을 떠니시면도 기도 복을 가지고 떠나신다고 하시면서 문자를 주셨습니다. 마침 어떻게 광주에서 오신 신부님을 잘 아셨습니다. 이날 신부님께서 저는 바로 미사 후에 광주로 가실 줄 알았습니다. 근데 신부님께서 장지까지 가시고 장지에서 어머니 기도를 드린 후에 광주로 가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제가 장례미사까지 참석해 주신 것만 해도 정말 감사한 일인데 장지까지 가시겠다고 하시니 제가 정말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근데 신부님께서 장지가 진주 수곡이라 사실 진주를 거쳐서 광주로 넘어가면 되신다고 하시면서 한사코 가시겠다고 하셔서 장지까지 가 주셨습니다. 장지에서 하관하시기 전에 그냥 신부님께서 저희 집안 분위기를 봐서 거기에서 신부님께서 마지막 기도를 하시기엔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 그냥 가시겠다고 하시면서 마지막으로 기도만 해 주시고 가셨습니다. 이날 신부님께서 저에게 제 어머니께 쏟아주신 정성은 제가 평생 잊어서는 안 되는 그런 은혜입니다. 그러다가 신부님께서 작년에 성목요일을 앞두고 저에게 연락을 주셨습니다. 저를 한번 만나야 되겠다고 하시면서요. 저는 신부님을 어머니 장례 때 뵙고 서너 달 지난 시점이라 신부님을 뵙는 게 좋은 일이고 반가운 일이지만 좀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통화할 때 기분이 좀 이상했습니다. 이상하게 신부님이 어디 뭔 곳에 떠나는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신부님, 어디 멀리 떠나세요. 느낌이 그런 느낌이 듭니다 라고 말씀 드리니 일단 만나서 이야기해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만나는 장소를 고기집으로 하자는 겁니다. 오리집을 알아보고 또 그날 식사는 신부님께서 내시겠다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신부님 그건 안 됩니다. 신부님께서는 수도자이시고 또 수도자가 물론 기본적인 돈을 수도원에서 주시겠지만 사도 제가 사야지 그런 부담은 갖지 마세요라고 말씀드리고 통화는 끊었지만 왠지 좀 이상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유명한 집을 본당에 제가 잘 아는 자매님께 부탁드려 어떤 장소를 섭외를 해서 신부님과 그곳에서 만났습니다. 신부님과 반갑게 인사를 드리면서 식탁에 앉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신부님께서 갑자기 유학을 떠나시게 되었다는 겁니다. 지금 가시면 외국에서 5년 계신다는 것입니다. 역시 제가 전화 통화에서 느낀 느낌 그대로였습니다. 이상하리만큼 정말 어디 먼곳에 떠나시는 그런 기분이 맞았습니다. 사실 공부를 하시러 가는 것이고 이 수도원 최고 관장 신부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고 하시니 신부님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원래 신부님께서는 평소 말씀하시는 철학이 공부와 지식도 수도자에게는 필요하지만 이 신부님은 그쪽보다는 오히려 그냥 단순히 오로지 기도 생활에만 충실한 수도자가 되려고 했는데 신부님 자신도 그래서 외국에서 공부하고 싶은 그런 욕심이 없었는데 신부님께서는 수도자이시기에 이것도 수도자 신분에서 순명해야 되는 그런 상황이라 공부하러 가야 돼서 가기 전에 저랑 밥을 한번 먹고 가야 될 것 같고 또 떠나기 전에 얼굴을 한번 봐야 될 것 같아 그래서 만나자고 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느님 일인데 섭섭하지만 어쩔 수 없죠. 신부님 하고 말씀드린 후 그럼 신부님 언제 떠나시고 또 떠나시면 언제 또 한국 들어오시는지 여쭤보니 성목요일 날 떠나신다고 하셨고 이번에 나가면 5년 공부 다 마칠 때까지는 한국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신부님 부모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는 걸 제외하면 못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신부님이랑 5년이란 시간을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좀 아찔했습니다. 그렇게 그날 그렇게 신부님이랑 식사를 했습니다. 제가 그날 신부님께서 식사비를 신부님께서 계산하시겠다고 하신 말도 있고 해서 제가 그날 상황을 보니 신부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알 것 같아 그래도 저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신부님의 마음은 알지만 신부님께 식사비를 계산하도록 하게끔 할 수가 없어서 살짝 신부님께 잠시 자리를 비우면서 자리를 이동해 제가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하려고 하니 신부님께서 따라오시면서 또 주인이 아까 신부님께서 미리 다 계산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제가 그래서 주인께 죄송하지만 오늘 계산은 제가 해야 되는 그런 상황이라 양해를 구했지만 신부님께서 형제님 오늘은 정말이지 내가 식사를 형제님께 대접하고 떠나야 마음이 편하다고 하시면서 한사코 말리시는 겁니다. 제가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정말 신부님의 말씀을 들어드려야 되는 그런 입장이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식당을 나와서 시간이 좀 남았기에 그럼 신부님 차 한 잔 마지막으로 하시고 헤어지죠 하면서 찻집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그렇게 신부님과 헤어졌습니다. 헤어졌지만 그날은 신부님께서 마산에 있는 수도원에서 주무시고 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랑 헤어지고 나서는 바로 다른 지역에 있는 수녀원에 가셔서 수녀님들께도 인사를 드리고 오셔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제가 그날 신부님께서 신부님의 마음은 알지만 신부님께서 식사비를 계산하시고 가셨기 때문에 그리고 또 5년이라는 세월을 서로 보지도 못할 거란 생각에 그냥 그렇게 신부님과 헤어지는 게 마음에 너무 걸렸습니다. 갑자기 신부님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뭘 하나 선물이라도 준비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정말 아쉬운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저녁 때 마침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그러면 신부님께서 외국에 계시는 동안 공부하시면서 필요한 게 뭐가 있을지 고민하다가 생각한 게 면도기를 하나 사면되겠다 싶어 전자매장에 가서 브랜드 있는 면도기를 하나 구입해서 수도원에 다른 신부님께 맡기고 왔습니다. 그때 신부님께서는 수녀원에서 돌아오시지 않으셔서 얼굴은 뵙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날 신부님께서 받으시고 문자로 인사를 주셨습니다. 잘 사용하겠다고 하시면서 그렇지 않아도 면도기가 하나 필요했는데 고맙다고 하시길래 저로서도 정말 자그마한 것이지만 신부님께 작별 선물을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이렇게 이 신부님과의 맺은 인연과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말씀드린 부분이지만 제가 어떻게 해서 어머니 장례미사를 극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는지 조만간에 한번 올려보겠습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오늘 저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신부님 이야기를 정말 장구하게 올렸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시시콜콜하게 올렸는지는 한번 이 글을 읽으시는 분께서 그 이유를 찾아보시는 걸로 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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