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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황님미사강론]주님 봉헌 축일 제 23회 세계 봉헌 생활의 날 미사 강론(2019.2.2.토요일)
작성자정진영 쪽지 캡슐 작성일2019-02-25 조회수1,776 추천수1 반대(0) 신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미사 강론입니다.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9.index.html

https://www.vaticannews.va/e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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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 강론 날짜] 201922일 토요일[주님 봉헌 축일 (봉헌 생활의 날)]

[강론 당일 독서와 복음 말씀] 1독서 : 말라키 예언서 3,1-4

화답송 : 시편 24(23),7.8.9.10(◎ 10ㄴㄷ)

복음 : 루카 복음 2,22-40

http://maria.catholic.or.kr/mi_pr/missa/missa.asp?menu=missa&missaid=10013&gomonth=2019-02-02&missatype=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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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봉헌 축일

23회 세계 봉헌 생활의 날

 

감사 봉헌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강론

 

바티칸 대성전

2019 2 2일 토요일

 

오늘의 전례는 당신의 백성을 만나러 나오신 예수님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만남의 축일입니다. 새로 나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전통을 만나십니다. 약속은 이루어짐을 봅니다. 젊은 마리아와 요셉은 연로한 시메온과 한나를 만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도착하시자 모든 것이 만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무엇보다 우리를 만나러 오신 예수님을 따뜻하게 맞이하도록 우리도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을 만나는 것은 즉 이러합니다. 우리 삶의 매일 매일 생명의 하느님께서 만나지십니다. 가끔이 아니라 매일 매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최종적이고 완전한 결심이 아니고 모두에게 그것은 매일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가상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안에서, 삶의 구체성 안에서 그분을 만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서는 단지 과거의 좋은 기억이 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을 생명의 주님으로 맞이할 때 그분을 모든 것의 중심이자 고동치는 심장으로 맞이할 때 그때 그분께서 살아 계시며 우리 안에서 새롭게 살아 가십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일어난 일이 또한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그분을 둘러싸고 모든 것이 만나고 그리고 삶은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예수님으로 우리는 다시 계속해 나갈 용기를 발견하고 굳건하게 있을 힘을 발견합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원천입니다. 그렇게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서 그분과 만난 결정적인 순간들을 더듬어 되짚어 살펴 보는 것, 어쩌면 주님과 우리의 사랑 이야기를 써 내려가면서 우리의 첫 사랑을 새롭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봉헌생활에 이로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지나간 시간이 되지 않고 만남의 시간이 되도록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의 근원적인 우리 만남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생각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와 하느님과의 사적인 어떤 일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믿는 사람들의 연장선 안에서 꽃피었습니다. 많은 형제 자매들과 바로 그때 그 장소들에서. 복음은 우리에게 이것을 이야기해 줍니다. 어떻게 하느님의 백성 안에서 그 만남이 일어나는지,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그 살아 있는 역사 안에서 어떻게 그 만남이 일어나는지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성전 안에서 율법을 따라, 예언의 맥락 안에서 젊은이들과 노인들과 함께(루카 복음 2,25-28.34). 또한 봉헌 생활 안에서도 이와 같습니다. 봉헌생활은 교회 안에서 꽃피웁니다. 고립된다면 그것은 시들어 버립니다. 그것은 청년과 노인들이 함께 걸어 갈 때, 젊은 이들이 자신의 뿌리를 재발견하고 노인들이 그 열매들을 맞아들일 때 봉헌생활이 자라납니다. 하지만 우리가 홀로 걸을 때 우리가 과거에 붙들려 있거나 살아 남기 위해서 앞으로 훌쩍 뛰어 넘어가 버릴 때 그때 봉헌 생활은 침체됩니다. 오늘 만남의 축일에 우리는 믿는 이들 안에 살아 계신 주님을 재발견하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우리가 받아온 카리스마가 오늘의 은총을 만나도록 하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복음 말씀은 또한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만남이 출발점이자 목적지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그 복음 말씀은 성전 안에서 부르심으로 시작되고 성전 안에서 보이는 것에 이릅니다. 그것은 이중의 부르심입니다. “율법에 따라”(루카 복음 2,22)서 첫번째 부르심이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부르심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기록된   대로 하기 위해서 성전에 갑니다. 그 구절은 이것을 거의 후렴처럼 네 번이나 강조합니다(루카 복음 2, 22.23.24.27 참조). 이것은 강제된 어떤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은 가는 것 또는 그저 단순히 외면적인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강요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갑니다. 그리고 나서 성령님에 따라 두 번째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메온과 한나의 부르심입니다. 이것도 또한 집요하게 강조됩니다. 시메온의 경우 세 번 성령님을 언급합니다(루카 복음 2,25. 26. 27 참고). 그리고 복음 말씀은 여자 예언나 한나로 마무리 됩니다. 한나는 하느님께 감사 드리도록 영감을 받았습니다(루카 복음 2,38 참고). 두 젊은이는 율법의 부르심을 받아 성전으로 달려갑니다. 두 명의 노인은 성령으로 움직여 집니다. 우리의 영성 생활과 우리의 봉헌 생활에서 율법과 성령님에 의한 이 이중의 부르심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모두 이중의 순명으로 부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에 대한 순명 우리들의 인생에 명령하는 것의 의미에서 그리고 성령님에 대한 순명, 성령께서는 우리 삶 안에서 새로운 일들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과의 만남이 탄생합니다. 성령께서는 주님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인내해야 합니다. 가장 위대한 카리스마조차도 명령된 생활이 부족하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가장 훌륭한 율법조차도 성령님의 새로우심 없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부르심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예수님 삶의 첫 시기에 오늘 성전에 나타나셨는데 우리는 그분 공생활의 첫 시기로 그분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가나로 가야 합니다. 거기에서도 또한 순명으로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마리아님과 함께.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복음 2,5). 무엇이든지 하여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특별한 일을 요구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갑자기 새로운 어떤 일을 하지 않으시고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없는 포도주를 만들지 않으십니다 -  그분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구체적인 어떤 것 간단하지 않은 부담되는 어떤 일을 요구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를 채우라고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율법을 상기시킵니다. 그것은 우물에서 약 육백리터의 물을 부으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간과 노력, 그것은 의미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없는 것은 물이 아니라 포도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물독마다 가득 채우자(요한복음 2,7) 바로 그 물독들에서 예수님께서 새로운 포도주를 내오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구체적인 것들로 진실함을 통해서 그분을 만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구체적인 것들 안에서 만나집니다. 매일의 기도, 거룩한 미사, 고해 성사, 진정한 자선, 하느님의 매일 말씀, 친교, 특히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가장 궁핍한 사람들에게서. 봉헌 생활에서 자신의 장상에 대한 그리고 규율에 대한 순명과 같은 구체적인 것들. 우리가 사랑으로 이 율법을 실천한다면 사랑으로!-그때에 성령님께서는 오셔서 하느님의 놀라움을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 바로 성전에서처럼 그리고 가나에서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일상 생활의 물이 새로움의 포도주로 변화됩니다. 그리고 더 구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삶이 실제로는 더 자유롭습니다. 이것은 사제들과 신학생들과 가깝게 지내는 카리스마를 정말로 갖고 있는 한 겸손한 수녀님을 지금 나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최근 어느 날에 그 수녀님의 시복이 여기 [로마] 교구에서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녀는 잘 알려지지 않는 소박한 수녀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순명의 덕, 진실함의 덕, 그리고 새로운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베르나뎃따(Bernardetta) 수녀님의 전구를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이 길 위에서 걷는 은총을 주시기를 주님께 간구합니다.

 

부르심으로 태어난 만남은 보이는 것 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시메온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복음(2,30). 그는 아기 예수님을 보고 그는 구원을 봅니다. 그는 기적을 행하시는 메시아를 본 것이 아니라 작은 한 아기를 봅니다. 그는 특별한 무언가를 본 것이 아니라 부모님과 함께 있는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은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쳤는데 이것은 가장 작은 작은 제물입니다(루카 복음 2, 24 참고). 시메온은 하느님의 소박함을 보며 그분의 현존을 맞이합니다. 그는 다른 어떤 것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어떤 것을 청하거나 바라고 있지 않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보고 그분을 두 팔에 받아 안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루카 복음 2, 29 참고). 하느님, 그분 계신 그대로의 하느님으로 그에게는 충분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그는 자기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발견합니다. 이것이 봉헌 생활에서 보이는 것입니다. 단순하고 소박함 안에서 예언적인 광경, 그 안에서 우리는 다른 어떤 것을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눈 앞에 그리고 우리 두 손 사이에 주님을 간직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미래입니다. 봉헌 생활은 이 예언적인 광경 안에 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세상에 현존하시는 것을 보는 시선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해도 말입니다. 봉헌생활은 이렇게 말하는 목소리입니다. “하느님으로 충분해, 나머지는 사라진다그것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세차게 흘러나오는 찬미입니다. 여자 예언자 한나가 보여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녀는 나이가 매우 많은 여자였고 그녀는 오랫동안 과부로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우울하지 않았고 향수에 빠져 있거나 자기 자신 안으로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녀는 일어나고 그녀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오로지 그분에 대해 말합니다(루카 복음 2,38참고). 나는 이 여성이 선한 방법으로 이야기하는방법을 알았고 그녀가 뒷담화의 악으로부터 회심으로 우리를 부르는 좋은 수호자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오로지 이렇게 말하면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분이예요! 그 아기예요! 가서 그분을 보세요!” 나는 그녀를 이렇게 이웃집 여자처럼 상상합니다.

 

이렇게 이것이 봉헌생활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에게 기쁨을 주는 찬미, 중요한 것을 드러내는 예언적인 광경. 이와 같을 때 그때 봉헌생활이 꽃피우고 우리 모두에게 평범함에 반대하라는 권고가 됩니다. 즉 우리 영성 생활에 대한 평가 절하를 반대하고 하느님의 중요성을 축소시키는 유혹에 반대하고 편안하고 세속적인 삶으로의 적응에 반대하고 불평들 불평들!-과 불만족과 자기 연민에 반대하고 포기의 정신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해 왔어라는 정신에 반대하라는 우리 모두를 위한 권고가 됩니다. 봉헌 생활은 살아 남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종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시키는 것에 관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기울어 가는 소명들에 직면한 우리 시대의 유혹입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남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고 새로운 삶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우리 중 소수만 있습니다…” – 그것은 새로운 삶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 백성 안에서 주님과의 살아 있는 만남입니다. 그것은 일상적인 생활의 진실한 순명에 대한 부르심이고 성령님으로부터의 예상치 못한 놀라움에 대한 부르심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쁨, 바로 예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 껴안아야 하는 하나의 광경입니다.

 

강론영어원문 ->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9/documents/papa-francesco_20190202_omelia-vitaconsacrata.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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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프란치스코 교황님 미사 강론을 소리로도 전해 드리고 있습니다.

     강론 번역문을 보기 어려우신 분들, 눈이 불편하신 분들, 연로하신 분들,

     또 그밖에 글을 읽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편하신 분들에게 많이 전달되면 좋겠습니다. 

     전달하실 때 도움이 되시도록 음성 파일과 번역문 파일을 함께 올려 두었습니다.

     다음의 사이트에서 교황님 강론을 전하는 소리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마리아 사랑넷

https://www.mariasarang.net/

(홈페이지->신앙 생활 ->교황님 미사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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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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