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19년 5월 11일(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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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19-05-11 | 조회수1,169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19년 5월 11일 토요일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 말씀의초대 베드로는 리따에서 중풍 병자를 고쳐 주고 야포로 가서, 병이 들어 죽은 타비타라는 여제자를 일으킨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라고 하시자,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다고 베드로가 고백한다. ◎제1독서◎ <교회는 굳건히 세워지고,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두루 다니다가 리따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가게 되었다. 애네아스라는 사람을 보았는데, 전부터 침상에 누워 있었다.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그러자 곧 애네아스가 일어났다. 그를 보고 주님께 돌아섰다. 여제자가 있었다. 번역하면 도르카스라고 한다. 많이 한 사람이었는데, 씻어 옥상 방에 눕혀 놓았다. 가까운 곳이므로,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사람 둘을 보내어, 건너와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갔다. 그를 옥상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베드로에게 다가가 울면서, 있을 때에 지어 준 속옷과 겉옷을 보여 주었다.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 “타비타,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다. 그를 일으켜 세운 다음, 불러 다시 살아난 도르카스를 보여 주었다.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화답송◎ 시편 116(114─115), 12-13.14-15.16-17(◎ 12) 주님께 갚으리오?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 ◎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주님께 나의 서원 채우리라. 주님께 성실한 이들의 죽음이, 주님 눈에는 참으로 소중하네. ◎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저는 당신의 종, 당신 여종의 아들. 당신이 제 사슬을 풀어 주셨나이다. 당신께 감사 제물 바치며, 주님 이름 부르나이다. ◎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복음환호송◎ 요한 6,63.68 참조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복음◎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6,60ㄴ-69 가운데 많은 사람이 60 말하였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영이며 생명이다.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허락하지 않으시면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다니지 않았다.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오늘의묵상◎ 세상에는 진화론을 믿는 이들과 창조론을 믿는 이들, 두 부류가 존재합니다. 진화론을 믿는 이들이 많고 창조론을 믿는 이들은 적습니다. 창조론을 비과학적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인간이 진화되었다고 믿어야 더 자유롭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되었다고 믿으면 창조된 목적에 따른 심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믿어 어떤 눈치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을 창조한 분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진화론도 창조론도 명확한 증명이 불가능합니다. 다만 내가 살고 싶은 대로 믿는 것입니다. 부모가 주는 사랑을 일단 거부할 것입니다. 사랑을 인정하면 부모를 인정하는 것이고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피를 거부하는 이들도 이런 부류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하느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인간은, 이제 창조주가 있다고 믿어야 할지 없다고 믿어야 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눈치를 보며 살고 싶지 않다면, 그저 그 사랑을 인정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종류의 삶을 살고 싶은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믿고 싶은 것은 내가 살아가야 하는 방향을 알려 줍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삶의 방향을 동시에 결정해야 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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