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19년 7월 14일(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 |||
---|---|---|---|---|
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19-07-14 | 조회수1,602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19년 7월 14일 주일 [(녹) 연중 제15주일] 오늘 전례 ▦ 오늘은 연중 제15주일입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는 율법의 정신을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처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사려 깊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불쌍하고 불행한 형제들을 돕도록 합시다. 말씀의초대 모세는 백성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그들 가까이, 곧 입과 마음에 있기에,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셨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이웃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에 관한 비유를 드시며,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이르신다. ◎제1독서◎ <그 말씀이 너희에게 가까이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30,10-14 말씀을 듣고, 이 율법서에 쓰인 그분의 계명들과 규정들을 지키며,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명령하는 이 계명은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하고 말할 필요가 없다. 건너편에 있지도 않다. 저쪽으로 건너가서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하고 말할 필요도 없다. 아주 가까이 있다. 마음에 있기 때문에,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화답송◎ 시편 69(68),14와 17.30-31.33-34.36ㄱㄴ과 37 (◎ 33 참조) 하느님을 찾아라.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 다다르게 하소서. 은총의 때이옵니다. 하느님,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은 참된 구원이시옵니다. 주님, 너그러우신 자애로 저에게 응답하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를 돌아보소서. ◎ 가난한 이들아, 하느님을 찾아라.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 하느님, 저를 도우시어 보호하소서. 하느님 이름을 노래로 찬양하리라. 감사 노래로 그분을 기리리라. ◎ 가난한 이들아, 하느님을 찾아라.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 보고 즐거워하여라. 하느님 찾는 이들아,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 주님은 불쌍한 이의 간청을 들어 주시고, 사로잡힌 당신 백성을 멸시하지 않으신다. ◎ 가난한 이들아, 하느님을 찾아라.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 유다의 성읍들을 세우신다. 그분 종들의 후손이 그 땅을 물려받아, 그분 이름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곳에 살리라. ◎ 가난한 이들아, 하느님을 찾아라.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 ◎제2독서◎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 그리스도를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말씀입니다. 1,15-20 15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으뜸이 되십니다.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하늘에 있는 것이든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복음환호송◎ 요한 6,63.68 참조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복음◎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복음입니다. 10,25-37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어떤 사마리아인은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오늘의묵상◎ 당시 율법 학자들은 어디까지를 이웃이라고 볼 수 있는지에 관하여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라고 질문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에게는 율법에 충실한 유다인들만이 이웃이었을 것입니다. ‘이웃’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이웃은 더 이상 출신 성분이나 율법 규정의 준수 여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면 누구나 이웃이고, 자비를 베푸는 이는 누구나 이웃입니다. 그 사람이 원수라도 말입니다. 비유를 통하여 율법 학자의 잘못된 이웃 개념을 바로잡아 주고자 하십니다. 어디까지 이웃인지 따지며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그들의 이웃이 되어 주라고 가르치십니다. 사도는 모든 피조물이 우리의 이웃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일부 피조물만의 맏이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시고, 일부만이 그분 안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모든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분을 향하여 같은 길을 걸어가며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고 있기에 서로 이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모든 이, 더 나아가 모든 만물이 이웃임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이어야 합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