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주 우리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지극히 거룩하시고 만군의 왕이시며 살아 계신 자비의 하느님, 오늘도 저에게 생명을 주셔서 감사하며 주님의 구속사업의 도구가 되게하시고 평온한 죽음을 맞게하소서.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여! *~*~*~*~*~*~*~*~*~*~*~*~*~*~*~*~*~*~*~*~*~* [ 온 세상과 모든 가정에 주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기도드립니다 ] [ 긴 고해를 하시는 분들은 명동성당의 상설고해소를 방문하세요 ]
하느님 관점에서 본 장애인 이해 9가지
1. 장애인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만드신 걸작품입니다 (탈출기 4,11)
작품이란 상품과는 다르게 상대적이거나 조건적이 아닌 그 자체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을 의미합니다. 작가의 뜻과 혼을 담아 만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것을 걸작품이라고 합니다. 장애인이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 특별한 섭리 가운데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로 만드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작가의 의도를 알지 못한 채 성급한 평가를 내리는 장애인은 하느님의 특별하신 뜻을 간직한 걸작품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장애인을 통하여 우리들의 영적 장애를 깨닫게 하시고, 만족하는 삶의 비결을 배우게 하시며, 진정한 성숙과 강함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따라서 장애인(障碍人)은 장애인(長愛人)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2. 장애인은 성숙한 인격을 가진 존재입니다 (마태 18,1-10)
우리나라의 인간문화재 가운데 병신춤을 추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부가 장애인의 약점을 가지고 흉내내어 춤을 추는 사람을 인간문화재로 특별히 보호를 해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사회는 연약한 자의 약점을 통하여 상대적으로 기쁨을 누리는 미성숙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애인은 다른 사람의 약점을 통하여 기쁨을 얻는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도움을 청할 따름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인정할 수 있는 용기는 성숙함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숙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 곳은 서로의 다른 특성을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업신여기는 용기를 가진 자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3. 장애인은 강한 자를 부끄럽게 만드시는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1코린 1,27-29)
장애는 질병과는 다르게 평생을 씨름해야 할 만성적 슬픔이며 사람이 극복하기 힘든 한계적 상황입니다. 따라서 능력이 중시되는 경쟁사회에서 많은 장애인들이 사회적 불리한 존재로서 낮은 자존감을 지닌 채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능력이 떨어지는 장애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단지 불쌍하게만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장애인 - 이들은 하느님에게 쓸모없는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상대가치의 범주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한 채 욕망의 노예요, 경쟁의 투사가 되어 살아가는 영적 장애인들에게 육신적 장애는 분명 하느님의 거룩한 도구입니다.
4. 장애는 벌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법입니다 (요한 9,1-5. 39)
제자들은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누구의 죄 때문인지 예수님께 질문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선입견을 단호히 배격하시며 시각장애인을 통하여 "하느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요한 9,3) 그것은 육신적 장애를 치유(25절)하는 일과 영혼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전인적 구원을 베푸시는 것은 메시아만이 하실 수 있는 것으로 일찍이 하느님께서 구약의 많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셨던 내용입니다. 따라서 약속의 실현은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증명하는 것이며 세상 속에 하느님의 나라가 강력히 임한 것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과 직결됨을 살펴볼 때 장애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인 것입니다.
5. 장애인은 들러리가 아닌 복음의 주체입니다 (루카 14,12-14. 21)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악인과 선인들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구원으로 초청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초청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잔치에 거부하자 주인이신 하느님이 화가 나서 어떤 특정한 대상들을 지목하여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가난한 자들이며 장애인들입니다. 들러리가 아닌 초청 받은 주빈(the guest of honor)입니다. 이들은 잔치에 초청 받고 감사의 예물을 준비하지 못할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조건 없이 베푸시는 은혜의 성격에 꼭 맞는 것입니다. 그저 감사한 마음을 갖기만하면 되는 것입니다.
6.장애인은 우리가 도와줘야 할 나의 이웃입니다 (루카 10,30-37)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나의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는 가"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구원 받은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어야 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경건의 생활은 생명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야고보 1,27)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애인도 고아와 과부처럼 도움을 줘야 할 우리의 이웃입니다.
7.하느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고난을 주셔서 믿음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잠언 3,11-12)
하느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당신의 자녀들을 훈련시키십니다. 욥처럼 고난을 통하여 단련케 하시며 믿음의 높은 산봉우리에 우뚝 서게 하십니다. 장애는 분명 한계 상황입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이르렀다면 그것은 곧 한계상황을 두고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어떤 고난도 문제는 아니며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인생으로 하여금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도구입니다(시편 119,71)
8. 장애인은 교회의 하나됨을 위하여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요한 17,11)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통하여 차별 없는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온 교회가 하나가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사랑과 희생을 부르짖는 교회에서는 장애인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도움이 되지 않는 장애인일지는 몰라도 교회의 하나됨과 성숙함을 위하여 장애인은 함께 해야 합니다. 장애인사목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적 사목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는 교회의 본질적 사목입니다.
교회는 건강한 체질을 위하여 장애인들을 구제와 동정의 대상이 아닌 전교와 교육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9. 인류역사에 위대한 공헌을 했던 장애인들은 교회의 하나됨을 위하여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요한 17,11)
*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킨 천체물리학자 스티브 호킹 박사 [ 루게릭병/전신마비장애인 ] * 흑인팝 음악의 살아있는 신화 Steive Wond [ 시각장애인 ] * 음악의 성인 베토벤 [ 청각장애인 ] * 초인적인 의지로 세계인에게 도전을 주었던 헬렌켈러 [ 언어, 시각, 청각장애인 ] * 형 에사우를 만나기 전 야뽁 강가에서 하느님의 사자와 씨름하다 엉덩이 뼈를 다쳐 지체장애인이 된 야곱(창세 32,31) * 예로보암 시대에 시각장애를 가지고 예언자의 역할을 감당했던 아히야(1열왕 14,4) * 이스라엘의 적 블레셋 사람 삼천 명을 죽였던 이스라엘의 시각장애인 삼손(판관 16,21) * 원형탈모증의 장애를 극복하고 멋있게 쓰임 받았던 엘리사(2열왕 2,23) * 눈의 질환으로 고통을 겪었으나 평생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순종했던 사도 바오로(2코린 12,7) * 의심 많은 토마스를 위하여 영광의 부활체를 포기하고 영원한 장애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요한 20,27)
(김해용님)
조지 뮐러의 대답
영국의 조지 뮐러(1805~1898)는 일생을 고아를 위해 헌신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에 말년에 뮐러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평생을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조지 뮐러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조지 뮐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평판, 선택, 좋은 것, 싫은 것, 원망 이런 것들에 대해서 내가 죽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세상의 칭찬이나 비난에도 나는 죽었습니다.
제가 두려워했던 것은 하느님의 책망이었고 제가 원했던 것은 하느님의 칭찬이었습니다.
그러자 나의 인생이 나도 모르게 바뀌었습니다. 달라졌습니다』
조지 뮐러의 대답은 간단한 대답이지만 가장 중요한 대답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기 부인" 이라는 기초위에서 시작됩니다.
자기를 부인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자비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죽을 때 비로소 성경적인 진정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아의 죽음은 매일, 매순간마다 계속되어야 합니다. 내 속에는 선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쳐서 날마다 죽이는 것이 나의 의지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기도와 은총, 성령충만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너무도 많은 신자들이 "자기부인"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날마다 죽는다는 것" 과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 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나는 지옥에 가야 마땅한 죄인입니다" 라고 생명으로 고백하는 신앙이 되어야 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임신하지 못하는 부부를 위한 기도 우리 조상들의 주 하느님, 주님은 진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하와를 그에게 동무로 주시어 주님을 위하여 이 세상에 인류를 번식하게 하시고, 그들을 주님께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게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의 축복과 자비를 가지고 내려오시어 원수가 간음과 실망이라는 두 가지 죄로 이끌어가기 위하여 닫아 놓았던 태를 열어 수태시켜 주십시오.
지극히 높으신 조물주, 거룩하신 아버지, 이 두 자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들을 행복하고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내는 포도나무와 같이 번식력이 있게 하시고, 남편은 그를 받쳐주는 지주(支柱)와 같이 그의 보호자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오 생명이여, 내려와 생명을 주십시오. 오 불이여, 내려와 다시 따뜻하게 하십시오. 능하신 분이여, 내려와 행하십시오. 내려오십시오!
올해의 풍성한 수확에 대한 찬미의 축제를 위하여 이들이 산 곡식다발을, 즉 주님께 바라는 자들에게 복을 내리시는 영원하신 주님께 봉헌된 그들의 맏아들을 바치게 해 주십시오.
( 그리스도의 시 ) ( 이 모든 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드립니다. 아멘 )
교만의 증상들
이기심
자기의 욕심을 감추기 위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짓밟고 있다면, 자기의 재능을 활용해도 다른 이에게 축복이 되지 못한다면 자신의 재능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중심적인 교만으로 인해서 섬김을 받고자 하며, 항상 자기만 옳다고 여기며,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자신의 소원이 항상 성취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자라나게 된다.
우월감
교만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그들을 멸시하도록 부추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교리나 행동, 고유의 가치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여기게 만든다. 우리를 분리시키는 것은 교리나 불화가 아니라 바로 교만이다. 서로에게 주고받을 만한 가치 있는 것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때, 모든 분쟁과 분열, 불신, 갈등과 불화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비꼬는 말
비꼬는 말은 위장된 유머로서 다른 사람의 결점을 부각시켜 상처를 입히고 우리 마음속에 있는 편견을 드러낸다. 비꼬는 말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았거나 감정이 상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당당히 그것을 다룰 용기가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마음속에는 쓴뿌리가 자라나는 것이다.
정죄와 비난
교만한 자는 비판하고 정죄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장점을 잘 발견하지 못한다. 상대방의 장점이 드러나면 삐딱하게 받아서 무시해 버린다. 비난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의 기쁨이나 은혜를 다른 사람과 나누지 못한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충분히 다른 사람을 모함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연약한 점에 대해 있는대로 얘기해 버리는 것은 곧 그 사람에 대한 모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참지 못함
참지 못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계획, 일정을 사람보다 더 중시한다는 것을 나타내며, 사람들이 잘못했을 때 참지 못하는 것은 우리 안에 사랑과 절제가 없다는 증거다.
탐심
질투와 탐심은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것에서 시작된다. 탐심은 우리가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과는 동떨어진 세상의 것을 바라보게 하는 태도와 방식이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갖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 갈망할 것이다.
강퍅한 마음
마음이 강퍅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은근히 기뻐한다. 다른 이들을 위로할 줄도 격려할 줄도 모르며, 다른 사람이 잘 되는 일에 함께 기뻐해 주지 못한다. 강팍한 마음으로 변해가는 첫 단계는 싫어하는 사람과 마주하지 않는 것이다. 만나는 것을 피하게 되면서 서서히 냉각되어 그들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다. 그대로 방치하면 교만에 뿌리를 내린다.
배우기 싫어하는 마음
고침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완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 어떤 잘못을 지적할 때, 그 말을 경청하는가?, 화를 내는가? 합리화하고 변명하는가? 아니면, 해명하는가? 성숙한 사람일수록 남의 충고나 지적을 잘 받아들인다. 대부분의 훈계 속에는 최소한의 진실이 들어있게 마련이다.
아부
칭찬과 아부는 같은 것이 아니다. 칭찬은 다른 사람을 신실히 세워주기 위한 것이지만, 아부는 조종하려는 의도로, 다른 사람의 환심을 얻기 위한 정직하지 못한 행위이다.
자기연민
상처받고 지치고 약점잡히고 오해받고 압박받고 죄를 지을 떄, 그리고 낙심하거나 침체될 때 우리는 쉽게 자기연민에 빠진다. 이런 습관을 깨뜨리기 위해 때로는 격전을 치러야 하며,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자기 연민은 교만을 조장하며 그 이면에 있는 이기적인 목적을 합리화한다. 만족할 줄 모르며 이기적이기 때문에 또 다른 무언가를 요구한다.
(창골산 봉서방)
성모 승천 (루카 1,39-56)
우리 교회는 성모 마리아께서 하늘 나라로 영광스럽게 개선하시어 하늘에 오르셨음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성모 승천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분명한 기록이 없다 하더라도 모든 크리스찬들은 의심할 여지 없는 역사(성전)로 믿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는 높은 자격과 신분을 보아서라도 그분의 육신이 무덤에 묻혀 썩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성경의 말씀을 좀더 깊이 살펴볼 때 그분이 하늘 나라에 오르셨음은 추호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인간 마리아는 그의 전 일생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했습니다(1,38). 이러한 성경적 사실을 근거로 하여 우리 교회는 성모 승천을 모든 신자들이 반드시 믿어야 할 진리로 공포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모님의 승천을 경축하면서 성모님이 세상에 살면서 지니셨던 마음가짐의 일부를 복음을 통해 잠시나마 더듬어 보기로 합시다. 복음에서 성모님은 언니 엘리사벳으로부터 축복의 인사를 받으십니다(1,42). 그러나 당신은 축복을 받을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고 축복받는 모든 일은 다 하느님의 은혜요 덕분이라고 이르십니다(1,49). 성모님은 지난날 미천했던 자신의 처지를 보더라도 축복받을 만한 이유가 없음을 솔직히 밝히십니다(1,48). 당신이 가지신 것은 가난과 미천 같은 보잘것 없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이렇게 엄청난 은혜를 베푸시는 것으로 보아,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고 낮은 사람들에게 특별히 큰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전인류에게 알려 주십니다(1,50). 하느님의 이 같은 섭리를 찬송하는 마음이 성모님의 감사가(1,46-55) 전체에 잘 흐르고 있습니다. 성모님이 읊으신 이 감사가는 성모님 한 분의 감사가일 뿐 아니라, 동시에 당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당신 이전의 모든 사람들과 당신 이후의 모든 사람을 대표한 감사가이기도 합니다.
성모님은 평범한 인간이시면서도 우리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성모님께는 항상 인간이라는 신분에서 더하거나 덜하거나 하는 과장과 꾸밈이 없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신분에 솔직하셨고 그 이상을 넘어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는 높은 지위에 올림을 받으신 다음에도 당신은 여전히 비천한 여종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심으로써(1,38.48), 당신 본래의 겸손한 자세에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성모님의 이 같은 겸손한 자세야말로 하느님의 어떠한 은혜도 받아들일 수 있는 완전한 바탕이기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와 같이 성모님께 크신 은혜를 주신 것처럼, 진실하고 겸손한 바탕 위에 당신의 모든 계획을 펴신다는 섭리를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모 승천을 축하하면서, 하느님의 엄청난 은혜를 받게 된 성모님의 깊은 겸손을 마음으로부터 본받고 몸으로 따를 때 성모 승천을 축하하는 뜻이 되겠습니다.
(김용배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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