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화병 (루카 4,38-4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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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19-09-04 | 조회수1,020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화병 (루카 4,38-44)
바오로 사도는 콜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이 그들 안에서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다며 인사한다. (콜로 1,1-8)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와 질병을 앓는 이들을 고쳐 주시고,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신다. (루카 4,38-44)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제1독서(콜로1,1~8)
"그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희망에 근거 합니다. 이 희망은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통하여 이미 들은 것입니다." (5)
그리스도인들이 지니고 있는 희망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향유하고 있는 구원의 미래적 양상이며, 이 희망은 부활 때 이루어지게 된다. 즉 여기서 말하는 희망은 믿음을 지닌 자와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자가 미래에 얻게 될 것에 대한 바람과 기대를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 '마련되어 있는'으로 번역된 '아포케이메넨'(apokeimenen; is laid up; is stored up)의 원형 '아포케이마이'(apokeimai)는 '간직해두다', '저축하다', '미래에 사용하기 위하여 비축하다'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현재 분사형으로 사용되어 미래에 받게 될 상급을 위해서 이 땅에서 삶을 계속적으로 지혜롭게 살아가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매우 의도적으로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것은 당시 콜로새의 세속적인 사람들이 추구했던 이 땅에서의 안락한 삶과 대조되는 단어이다. 그리고 '희망'으로 번역된 '엘피다'(elpida; hope)의 원형 '엘피스'(elpis)는 미래에 성도들이 성취하게 될 궁극적인 목표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땅에서 그 무엇을 얻는 삶이 아니라 미래에 이루어질 천국에서의 영광스러운 삶이다. 당시 콜로새는 오로지 세상적 관심과 목표를 가지고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콜로새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들과 달리 하늘에 희망을 쌓아두고 살고 있었다.
사도 바오로는 바로 이러한 콜로새의 성도들이 가진 희망으로 말미암아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통하여 이미 들은 것입니다'
여기서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문법적으로 보면 '복음'에 해당하는 '유앙겔리우'(euanggelliu; of gospel)는 소유격 명사로서 '진리'를 수식한다. 또한 '진리의'에 해당하는 '알레테이아스'(elletheias; of truth) 역시 소유격 명사로서 '말씀'(토 로고; to logo; the word)를 수식한다. 따라서 이것은 여러분이 전에 들은 '말씀'이 바로 '진리'에 속한 것이며, 그 '진리'가 바로 '복음'에 속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결국 사도 바오로는 성경에서 사용되는 주요 단어인 '복음'(euanggellion; 유앙겔리온), '진리'(alletheia; 알레테이아), '말씀'(logos; 로고스)이라는 세 단어를 사용해서 각각의 단어들 앞에 정관사를 붙임으로서 콜로새 성도들이 전에 들은 것이 바로 '그 복음'이며, '그 진리'이고, '그 말씀'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사도 바오로는 당시 콜로새 성도들이 신앙 생활의 유일한 기준이요 교과서인 그리스도의 복음에 입각해서 살고 있음을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복음(루카4,38~44)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40)
루카 복음 4장 40절은 고통과 질병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셔서 그들 중 단 한사람이라도 소홀히 여기지 않으시고, 개별적으로 치유해 주신 예수님의 자상함을 잘 드러내 주는 부분이다.
특히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번역된 '헤니 헤카스토'(heni hekasto; each one; everyone)는 치유의 능력이 흘러나오는 예수님의 따뜻한 손이 병자 중 어느 한 사람도 지나치지 않고, 그들 각각의 머리를 감쌌다는 사실을 밝혀준다.
특히 '손'에 해당하는 '타스 케이라스'(tas cheiras; his hands)는 복수형이며, 이것은 예수님께서 한 손이 아닌, 두 손으로 병자들의 머리를 안수하셨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병자들은 두 손을 통해 전해오는 따뜻하고 자비가 많으신 예수님의 마음에 감동했을 것이다.
안식일 하루 종일 복음 선포에 힘쓰신 예수님께서는(루카4,31~39) 해가 져 피곤하셨을텐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신을 찾아 모여든 병자들의 무리 사이에 돌아다니면서 그들에게 일일이 안수하셨다.
구약 시대에는 통상 '머리에 손을 얹는 행위'(안수)가 자신의 죄악을 동물에게 전가시키거나(탈출29,15.19) 증인들이 죄인을 돌로 치기 전에 그 사람에게 죄를 확정하는 방법으로(레위24,14) 사용되었으나, 예수님께서는 '안수'를 하느님의 은총을 전가하는 방법, 치유의 역사(役事)를 일으키는 통로로 사용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안수'('타스 케이라스 에피티테이스'; tas cheiras epititheis; laying his hands on)를 통해서 하느님의 능력이 흘러내린다는 사실을 강하게 심어 주고자 하셨으며, 그 안수 행위를 통해서 당신께서 병자들 개개인에게 자상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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