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9.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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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19-09-19 | 조회수1,221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2019년 9월 19일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제1독서 1티모 4,12-16 사랑하는 그대여, 12 아무도 그대를 젊다고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니 말에서나 행실에서나 사랑에서나 믿음에서나 순결에서나, 믿는 이들의 본보기가 되십시오. 권고와 가르침에 열중하십시오. 곧 원로단의 안수와 예언을 통하여 그대가 받은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15 이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 일에 전념하십시오. 그리하여 그대가 더욱 나아지는 모습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도록 하십시오.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이 일을 지속해 나아가십시오. 이렇게 하면, 그대는 그대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이들도 구원할 것입니다. 복음 루카 7,36-50 그때에 36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38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42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44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46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신부님, 신부님 옆에 타면 안 되는 거예요?” 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제 차의 빈자리를 찾아 앉았지요. 그런데 한 분이 조수석에 앉으려다 말고 옆에 타면 안 되냐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제가 뭐 특별한 사람도 아닌데 왜 안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요? 조수석 자리에는 그 누구도 앉을 수 없도록 짐이 가득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글라스, 우산, 책과 노트, 그 밖에 여러 전선까지 이 자리에 있으니 사람이 도저히 앉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사실 혼자 살고 있기에 누가 제 옆에 탈 일이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조수석 자리가 편안하게 하나의 짐칸처럼 사용된 것입니다. 쏟아부은 뒤에야 이 자매님께서 자리에 앉을 수 있었지만, 이 경험을 통해서 내 마음을 바라보게 됩니다. 혹시 내 마음에도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공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닐까요? 세상 것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욕심으로 인해서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을 찾기 힘들어집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사랑을 보여 주셨지만, 그 사랑이 점점 흐려지고 있습니다. 주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상대방에게 내 마음을 내어주는 것, 그래서 내 안에서 위로와 힘을 얻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섣부른 판단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한구석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향유 옥합을 들고 한 여인이 서 있습니다. 잠시 뒤 그녀는 예수님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바릅니다. 최고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런 사랑을 표현하는 여인에 대한 칭찬을 아무리 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본 바리사이는 전혀 칭찬하지 않습니다. 이 여인의 마음을 보기보다는, 죄인이라는 사실 하나에만 주목하려고 하지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루카 7,39) 이제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으신 예수님까지 판단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자기 마음을 내어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도 자신들의 마음을 내어드리지 못하고 판단합니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내 마음 안에 소중히 모실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하느님 앞에서 언제나 자기 죄에 책임을 지고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유혹을 마주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인간이 해야 할 위대한 일입니다. (성 안토니우스) (향유를 부어 바르는 마리아) 어떤 비교를 할 것인가? 자신이 한 달에 10만 원을 더 받는 경우와 주변 사람들이 한 달에 20만 원을 덜 받게 되는 경우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10만 원을 더 받을 때는 주변 사람이 20만 원을 더 받습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20만 원을 덜 받게 될 때는 나는 더 받지도 덜 받지도 않습니다. 20만 원을 더 받더라도 내가 10만 원 더 받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주변 사람들이 20만 원 덜 받게 되는 경우를 선택한다고 합니다. 전자는 내가 받는 액수가 남과 비교해서 –10만 원이지만, 후자의 경우는 내가 받는 액수가 남과 비교해서 +20만 원이기 때문입니다.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100년 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니 더 행복해할까요? 아닙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는 있지만, 행복 지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하락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타인과의 비교 때문입니다. 바로 행복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비교하지 않고서 산다면 그만큼 발전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비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부닥쳐진다면, 우리는 비교 대상을 바꿔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완벽한 사람과의 비교가 아니라 덜 완벽해도 열심히 사는 사람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드디어 내일 순교자성월 기념음악회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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