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마르타와 마리아 (루카10,38-4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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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19-10-08 | 조회수1,117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마르타와 마리아 (루카10,38-42) 주님께서는 요나 예언자가 전한 말을 듣고 니네베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오는 모습을 보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다. (요나 3,1-10) 화답송 시편 130(129),1-2.3-4.7ㄴㄷ-8(◎ 3) 예수님께서는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마르타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 말씀을 듣는 것 한 가지뿐이라고 하신다. (루카10,38-42)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제1독서(요나3,1~10)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이 소식이 니네베 임금에게 전해지자, 그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다." (5-6)
3장의 내용은 요나가 회개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니네베에 전하자 니네베 사람들이 임금을 비롯하여 높은 사람부터 낮은 사람까지 모두 회개하고 그것을 보신 주님께서 마음을 돌리시어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니네베의 회개는 철저하고도 완전하게 이루어진다. 임금부터 용상에서 일어나 용포를 벗고 자루옷으로 갈아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단식하였다.
'단식'(촘; tsom; fast; fasting)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행동이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사람이 살 수 없는데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음식을 거부한다는 것 자체가 곧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도 좋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이러한 행동을 하느님 앞에서 하는 이유는 자신의 죄악을 크게 회개한다는 표시이며, 또 다른 측면에서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현재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고자 행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니네베 사람들 역시 죄악을 크게 회개하였고 장차 철저한 멸망에 이를 수 있는 현실적 정황 앞에서 하느님의 용서와 보존의 은총을 구하여 위기를 타개하고자 단식을 단행한 것이다.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5)
여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니네베의 왕을 지칭하며, 가장 낮은 사람은 사회적 신분이 비천한 자들, 아마도 노예로 분류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표현일 것이다.
'자루옷'(굵은 베옷)에 해당하는 '삭킴'(saqim)의 원형 '사크'(saq)는 조직이 매우 거친 삼베를 말한다. 이것은 장례식에 입거나(창세37,34; 2사무3,31) 국가적 재난을 당할 때(에스테르4,1), 극심한 심적 고통을 표현하고자 할 때(2열왕21,27) 입었다.
이처럼 평상시 입는 옷을 벗고 거친 베를 몸에 걸친다는 것은 일체의 안락함과 편안함을 거부하고, 몸과 마음을 괴롭게 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진심으로 회개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다.'(6)
당시 니네베 왕은 아시리아 제국 전체를 통치하던 샬만에셀 4세(Shalmaneser IV; B.C. 782-773), 혹은 앗슈르단 3세(Asshurdan III; B.C. 772-755)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요나서 3장 6절은 니네베 왕이 주 하느님 앞에 철저히 낮아져 진실로 겸비한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는 하느님 대전에 더 이상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왕좌에서 일어나 왕의 권위를 겉으로 드러내는 자신의 왕복까지 벗고 대신 자루옷을 입었다. 그는 왕좌에 앉는 대신에 잿더미위에 앉았다.
'재'에 해당하는 '하에페르'(haeper)의 원형 '에페르'(eper)는 흩어 뿌리는 행위를 의미하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물질이 완전히 연소되고 남은 매우 가벼운 분말 상태의 찌꺼기인 재(ash)를 의미한다(민수19,10).
고대 근동에서 사람이 재 위에 앉거나 재를 뒤집어 쓰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극심한 육체적, 심적 고통을 나타내거나(2사무13,19; 욥2,8),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그의 은총을 구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를 지닌 행동이다(다니9,3).
당시 세계 최강의 권세를 자랑하던 아시리아 제국의 최고 통치자가 자루옷을 걸치고 잿더미 위에 앉았다는 것은 아시리아 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 누구도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도 서쪽의 작은 나라 이스라엘에서 온, 이름없는 한 예언자의 선포를 듣고 그렇게 했다는 것은 가히 충격적인 일이다.
하지만 아시리아 왕은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비천함과 하느님의 심판 대전에 무기력함을 절감하고 그 모든 권세와 권위를 하느님 대전에 내려놓고 오직 주 하느님만을 최고의 신으로 인정하는 가운데 그에게 은총을 구했다.
이러한 아시리아 왕의 태도는 실로 하느님 대전에 은총을 구하는 자, 회복을 간구하는 자가 취해야 할 합당한 태도라고 할 수 있으며, 좀 더 근본적으로 하느님 대전에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들 누구나 마땅히 창조주 하느님 대전에 취해야 할 바른 태도가 무엇인지를 실제로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는 온 국민에게 이렇게 선포한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든 양이든 아무 것도 맛보지 마라.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으라.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7-8)
고대 근동에서는 나라에 매우 큰 위기가 닥쳤거나 최고 통치자가 서거했을 경우 사람들 뿐 아니라 이성이 없는 우매한 가축들까지 아무 것도 먹지 못하게 하는 관행이 있었다. 니네베 성읍 전체의 모든 생명체가 멸망의 위기를 벗어나 모두 다 하느님의 자비를 구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단식을 통해 철저한 회개의 모습을 가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7~8절은 니네베 읍성 백성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면하기 위한 방법 네 가지가 제시된다. 그것은 음식 뿐만 아니라 물까지 입에 대지 않는 완전한 단식, 자루옷(굵은 베옷)을 입는 것, 하느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 각기 악에서 떠나는 행위이다.
여기에서 네번째 사항이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즉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8) 바로 이것 때문에 심판이 닥쳤으므로 백성들에게 악과 폭행을 버리고 선한 길로 돌이키라고 촉구했던 것이다.
'돌아서야 한다'에 해당하는 '웨야슈브'(weyashubu)의 원형 '슈브'(shub)는 어원적으로 가던 방향을 돌이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는 행위를 의미하는 동사이다(창세8,12). 본문에서는 악한 행위와 폭행을 버리고 과거의 그러한 삶과 전혀 다른 삶을 살 것을 다짐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회개란 단순히 악을 버리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데까지 나아가야 완전한 회개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폭행'에 해당하는 '훼하마스'(whehamas)의 원형 '하마스'(hamas)는 어원상 강한 힘이나 권력을 이용하여 약한 사람들을 압제하고 학대하거나 착취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러한 죄악은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홍수로 멸망당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죄악이었다(창세6,11.13).
어떤 예언서에도 니네베 사람들처럼 이토록 진지하게 회개한 경우를 찾아볼 수 없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종교 학계 등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이 권력과 돈과 지위와 명성을 가지고, 또한 악한 법과 구조와 제도를 가지고서 얼마나 하느님의 신법과 자연법을 거스리며 나쁜 짓을 하고 하고 있는지 모른다. 스스로 하느님의 의노를 초래하고 있는 나라들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높은 데서 권력과 돈을 이용해 불볍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 낮과 밤의 다른 생활, 아니 드러나는 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이 완전히 다른 철저한 이중생활, 야누스적 생활을 하면서 감히 서민들이 생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맛있는 것들을 먹고 마시고, 최고의 사치와 향응과 쾌락과 스포츠를 즐기며 하느님과 백성들 무서운 줄 모른고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통탄할 일이다. 참으로 이 시대는 임금부터 저기 보이지도 않는 잡초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까지 속속들이 썩어 버린 것을 도려내야 하는, 온갖 부패와 불법과 불의로 가득차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이 시대의 사람들이 하느님의 벌을 받지 않고 망하지 않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하느님께서 남겨두신 이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로 기도하고 희생하며 보속하는 몇몇 의인들과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진정으로 회개해야만 한다. 옷이 아니라 심장을 찢으며 진실로 회개해야 한다. 지금 이 시대는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회개가 정말로 필요한 때인 것이다.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복음 (루카10,38-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42)
루카 복음 10장 38~42절의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는 앞의 10장 25~37절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와 함께 루카 복음에서만 등장한다. 이것은 루카 복음 10장 27절에서 언급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본보기를 역순으로 하나씩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루카 복음사가의 교훈은 '이웃 사랑의 모델'은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고, '하느님 사랑의 모델'은 '마리아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 당대의 랍비의 문헌들은 여자들을 탐욕스럽고 호기심 많고 허영심이 강하며 수다스러운 존재로 묘사하여, 여자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심지어 랍비들은 '불신자나 야만인이나 노예나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할 정도였다.
예수님 당대의 여자들은 그렇게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자들과 이야기하고'(요한4,27), '여자들을 가르치고'(루카10,39), 그리고 '병든 여자를 치유하기도'(루카13,10; 마르1,31)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대에 버림받고 소외받은 대표적 계층인 여자들을 수용하시고 그들에게 관심을 표명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은 남녀 빈부에 관계없이 오직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시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루카19,10).
따라서 루카 복음사가는 '마르타라는 여자가'에 해당하는 '귀네 데 티스 오노마티 마르타'(gyne de tis onomati Martha; a woman named Martha)에서 '여주인'이라는 뜻의 '마르타'라는 여성형 고유명사 외에 '한 여자'에 해당하는 '티스'(tis; certain)라는 표현까지 쓰고 있다.
여기서 '여자'로 번역된 '귀네'(gyne; a woman)는 처녀든, 기혼이든, 그리고 과부든 모든 연령 계층의 여자를 일컬들 때 사용된다. 말하자면, 루카는 '한 여자'라는 기록을 첨가해서 예수님을 초청한 사람이 바로 '여자'라는 점을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루카 복음 10장 39절에서는 '마리아가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고 나온다. 여기서 '앉아'에 해당하는 '파라카테스테이사'(parakathestheisa; sat)는 '옆에 놓다'를 뜻하는 '파라카티죠'(parakathizo)의 수동태 분사이다. 수동태가 여기서 사용된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그의 발치에 자리잡고 앉은 후에 말씀을 들었음을 나타낸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은 것은 당시 제자가 스승의 발치에 앉아 교훈을 듣는 자세와 같은 것이었다. 즉 어떤 사람의 발치에 앉는다는 것은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을 뜻하는 행동이었다.
당대의 통념을 따를 경우, 이스라엘에서는 여자들이 랍비들에게 말씀을 배우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예수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은 가히 파격적인 것이다. 이리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천대받던 여인들의 지위가 회복되기 시작하고, 예수님에 의해 복음인 하느님의 말씀이 남녀노소, 빈부귀천, 제 민족 등의 모든 구분과 한계를 뛰어넘어 만인에게 전달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듣고'에 해당되는 '에쿠엔'(ekuen; and heard; listening)은 '듣다'를 뜻하는 '아쿠오'(akuo)의 미완료 능동태 직설법으로서, 마리아가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또한 능동태가 사용된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억지로가 아니고, 매우 적극적으로 능동적인 자세로 들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런데, 루카 복음 10장 40절에서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고 나온다. 여기서 '분주하였다'에 해당하는 '페리에스파토'(periespato; was distracted; was cumbered)의 원형 '페리스파오'(perispao)는 '둘레', '주변'을 의미하는 전치사 '페리'(peri)와 '당기다'를 뜻하는 동사 '스파오'(spao)의 합성어로서, '사방에서 끌어당긴다'는 말이다.
또한 이 동사가 미완료 과거 수동태로 사용되어 마르타의 마음이 차분하게 안정되지 못하고, 분주하고 들떠 허둥대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마르타는 지금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먹을 음식 준비를 하는 일로 마음이 분주했던 것이다.
하지만 루카 복음 10장 41절과 42절의 말씀을 유추해 볼 때, 마르타는 음식 준비도 하면서 마리아처럼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싶은 열망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즉 마르타의 마음은 현재 하고 있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지 않고, 다른 곳에도 신경을 뺴앗겼던 것이다.
루카복음 10장 40절의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의 말 속에는 음식 준비로 바쁘기도 하고, 혼자서 편안히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동생 마리아에 대해 얄미운 심정이 들어 있다.
마르타의 이러한 요청의 뉘앙스는 몹시 바쁜 와중에 있는 자신을 돕지 않는 마리아에 대한 간접적 책망과 이 사실을 알고도 침묵하고 계시는 예수님께 대한 원망,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마리아에 비해 지금 음식 준비를 하고 있는 자신의 행위가 옳다는 것을 은연중 드러내고 싶은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대해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하고 연민을 품은 애정을 가지고(반복된 호칭의 의미), 마르타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신다.
여기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에서 '염려하고'로 번역된 '메림나스' (merimnas; you are worried; you are careful)는 과도한 욕구로 인해 어지럽게 분열된 심적 상태를 나타낸다. 마르타는 음식을 무엇을 준비할까, 좌석배치는 어떻게 할까, 그리고 지금 마리아는 왜 나를 돕지 않는 것일까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몹시 분열되어 있었다.
또한 '걱정하는구나'로 번역된 '토뤼바제'(thorybaze; upset; troubled)도 '어수선하다', '어지럽다'를 뜻하는 '토뤼바조마이'(thorybazomai)의 현재 수동태 직설법으로서, 음식 준비로 인해 분주하고 어수선한 마르타의 심적 상태를 보여 준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루카 복음 10장 42절에서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는 말씀을 통해 마리아가 택한, 말씀 경청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당시 마르타가 했던 음식을 준비하는 일도 가치있는 일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육적인 일이 아니라 영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당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이었으므로, 그 시점에 있어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인 것이다. 그리하여 마리아로 하여금 자신을 도와주도록 일러달라는 마르타의 요청이 거부되고, 오히려 마르타가 마리아의 태도를 따라야 한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신다.
루카 복음 10장 42절에서 '선택하였다'에 해당하는 '엑셀레사토'(ekseleksato; has chosen)은 항상 중간태로만 사용되는 '선택하다'는 뜻의 '에클레고마이' (eklegomai)의 부정과거 직설법으로서 '그녀 스스로 선택했다', 혹은 '그녀 자신을 선택했다'라는 의미이다. 이 동사에는 마리아가 '좋은 몫'('아가텐 메리다'; 'agathen merida'; what is better; good part)을 자신의 영적 유익을 위해 '스스로' 선택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한편,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로 번역된 '우크 아파이레테세타이' (uk aphairethesetai; will not be taken away)는 부정어 '우크'(uk; not)와 '제거하다', '가져가 버리다'의 뜻을 지닌 '아파이레오'(aphaireo)의 미래 수동태 직설법이 나란히 쓰였다. 이것은 마리아의 선택이 마르타의 항의조가 담긴 요청이나 예수님의 권고로 인해 빼앗기지 않을 것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영적 유익을 위해 스스로 좋은 몫을 선택하여 집중하고 있는 사람의 유익을, 외부의 어떤 것이 박탈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말씀 경청은 마르타의 음식 준비보다 더 높은 차원의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기에, 그것은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방해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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