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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해소에 들어가기 전에.... 해 봐야 할 생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12-15 조회수1,285 추천수1 반대(0) 신고

 

가면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는지요? 얼굴을 가리며 또는 감추는 물건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실 겁니다. 또 다른 가면의 뜻은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뜻입니다. 바로 진짜 속마음을 감추고 거짓으로 나타내는 행위나 태도를 비유적으로 이른다고 국어사전에는 그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가면은 라틴어로는 페르소나라고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영어 personality (인격)가 유래한다고 합니다. 인격이라는 말의 유래를 살펴보면 바로 가면에서 왔습니다.

 

국어사전에서 사용하는 의미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가면은 다른 의미에서는 어떤 사람의 얼굴을 상징하는 면도 있습니다.

 

단지 그 얼굴의 본래 본 모습을 보이느냐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진짜 본 모습은 뒤로 하고 다른 모습을 보이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바가 다를 뿐이지만 원래의 의미는 하나의 얼굴을 상징하는 걸로 봐야 될 겁니다.

 

우리가 흔히 부정적으로 말을 할 때 사용하는 가면이라는 말을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이 때의 가면은 어떤 의미의 가면일까요? 바로 자신의 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가릴 때 쓰는 가면입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이런 목적에서 비유적인 표현으로 이 말을 사용한다고 했을 때 과연 빈정대듯이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런 경우에 우리가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하더라도 비난의 눈길을 줄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상황에서는 그럴 수가 있다고 공감하는 상황이라면 말입니다.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까지 도덕적인 기준에 입각해서 판단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만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조금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가령, 고의적으로 남에게 자신의 모습을 속이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가면을 쓰는 건 이건 누가 봐도 비난의 화살을 보낸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이건 당연히 누구나가 다 이런 걸 비난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다 보면 때로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살면서 어쩔 수 없이 가면을 써야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건 어쩌면 자존심이라는 측면에서 이런 게 아니라 자존감이라는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이건 자신의 모습을 남에게 감춘다 또는 속인다는 개념으로 봐야 될 게 아니라 단순히 굳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 남들에게 그대로 드러내고 싶지 않을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세히 보면 이건 다른 의미에서는 가면을 쓴 것 같지만 이 사람 입장에서는 그냥 드러내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런 모습의 가면은 그나마 이해를 할 수 있는 가면입니다.

 

우리는 이유야 어찌 되었든지 왜 이런 가면을 쓰는 걸까요? 아주 단순한 이유는 자신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떤 모습으로 비쳐질지에 대한 생각 때문에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가면을 쓰게 됩니다.

 

저는 이 가면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는 어떨지에 대해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사람은 설령 가면을 써서 어느 정도는 가릴 수는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느님께는 그 가면이 통할 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리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가 없기에 자신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린다고 한다면 정말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훤히 다 들여다 보실 거라고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근데 참 재미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걸 평상시에는 이성적인 판단으로 이렇게 냉철한 판단을 할 수 있는데 어떻게 죄를 짓는 순간에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하느님께서 보시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가 말입니다.

 

만약 이런 모습을 바로 하느님께서 두눈으로 보고 계신다는 생각이 든다면 쉽게 죄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이런 게 아닐까요?

 

설령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유혹 앞에서 그 유혹에 점령을 당하면 그냥 하느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시고 있다는 시선을 애써 외면하려고는 하지 않는가 말입니다. 그 외면하는 순간에는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죄 짓게 하는 그 유혹이 너무나도 달콤하게 유혹을 하기 때문입니다. 근데 시간이 지나면 후회를 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서는 자신이 죄를 지었을 때 자신의 죄짓는 모습의 얼굴을 보게 되면 정말 부끄러울 수가 있습니다.

 

그 부끄러움에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양심의 눈으로 성찰하고 고해로써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기 위해 고해성사를 보게 됩니다. 고해성사를 할 때 우리는 사전에 준비를 해야 될 게 있습니다. 바로 진정한 통회입니다.

 

근데 과연 저는 진정한 통회를 하고 고해소를 들어가느냐 하고 제 자신에게 자문한다면 솔직히 고백해서 어떤 경우는 진정한 통회를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모령성체를 하지 않기 위해서 형식적으로 진정한 통회를 하지 않고 하는 형식상 고해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고해소에서 무릎을 꿇고 고해를 하는 그 순간은 진정한 상등통회가 수반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죄를 짓고 고백하는 그 심정은 무거운 건 사실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그 어떤 가면도 통하지 않기 때문에 고해소 안에서만은 정말 자신의 영혼의 민낯을 전혀 화장하지 않은 모습을 진정으로 보여드릴 때만이 다음에 나약한 인간이라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에 놓인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가 없지만 그때 바로 진정으로 하느님께 자신의 영혼이 발가벗겨진 모습 그대로 보여드릴 때만이 아마 죄를 이길 수 있는 은총을 내려주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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