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20년 1월 12일 주일[(백) 주님 세례 축일] | |||
---|---|---|---|---|
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20-01-12 | 조회수1,128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20년 1월 12일 주일 [(백) 주님 세례 축일] 공현 대축일을 1월 7일이나 8일에 오는 주일로 옮겨 지내는 곳에서는, 주님 세례 축일은 바로 다음 월요일에 지낸다. 이때 신경은 바치지 않는다.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낸 사건이다. 그러므로 주님 공현 대축일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전례력으로는 이 주님 세례 축일로 성탄 시기가 끝나고, 다음 날부터 연중 시기가 시작된다. 오늘 전례 ▦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 대한 순종과 예언의 성취를 위하여 겸손하게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에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순종으로 우리도 주님의 세례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세례에 감사하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 품위에 걸맞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말씀의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선택하신 이는 성실하게 세상에 공정을 펴리라고 예언한다(제1독서).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의 복음을 전하셨다고 강조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제1독서◎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이다.> 42,1-4.6-7 1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화답송◎ 시편 29(28),1ㄱ과 2.3ㄱㄷ과 4.3ㄴ과 9ㄷ-10(◎ 11ㄴ) 평화를 주시리라. 그 이름의 영광 주님께 드려라. 거룩한 차림으로 주님께 경배하여라. ◎ 주님이 당신 백성에게 강복하여 평화를 주시리라. 주님이 넓은 물 위에 계시네. 주님의 소리는 힘차고, 주님의 소리는 장엄도 하네. ◎ 주님이 당신 백성에게 강복하여 평화를 주시리라. 그분의 성전에서 모두 외치네. “영광이여!” 주님이 큰 물 위에 앉아 계시네. 주님이 영원한 임금으로 앉으셨네. ◎ 주님이 당신 백성에게 강복하여 평화를 주시리라. ◎제2독서◎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입니다. 10,34-38 입을 열어 말하였다. 차별하지 않으시고,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곧 만민의 주님을 통하여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을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계셨기 때문입니다.” ◎복음환호송◎ 마르 9,7 참조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복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복음입니다. 3,13-17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그를 찾아가셨다.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뜻을 받아들였다.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영성체송◎ 요한 1,32.34 참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였다. ◎오늘의묵상◎ 요한의 세례는 죄를 씻는 일이었고, 죄를 씻는 것이 하느님을 만나는 일로 이해됩니다. 죄를 찾아내려 애씁니다. 되돌아보는 일은 꽤나 아픈 일입니다. 뉘우쳐서 아프기보다 그 과오 때문에 부끄러운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 더 아픕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지만 세례를 받으십니다. ‘모든 의로움’을 이루는 일입니다. 제대로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갈등의 자리에서, 권력의 다툼 안에 희생된 약자들의 자리에서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아픔과 슬픔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에서, 신앙인들이 일상에서 만나고 웃고 이야기 나누는 자리를 되돌아봅니다. 있을 수 있고, 죄를 씻기는커녕 서로의 탓을 곱씹느라 죄 속에 허덕이는 피폐한 영혼들을 맞닥뜨리는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끝은 이렇습니다. 드는 아들이다.” 이사야서에 따르면 그 아들은 다른 이의 죄를 대신 짊어져도 말 한마디 없이 죽어 가는 고난받는 종이었습니다. 다른 이를 위하여 대신 죄를 짊어지는 희생을 실천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서로에게 죄를 짊어지우는일만큼은 줄여야겠습니다. 이루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과 실천으로 실현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평범한 일상에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자신을 비워 내고, 내어 주고, 참아 주는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