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우르에서 네겝까지/아브라함/성조사[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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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0-02-01 | 조회수1,192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5. 우르에서 네겝까지 ‘테라는 아들 아브람과, 아들 하란에게서 난 손자 롯과, 아들 아브람의 아내인 며느리 사라이를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칼데아의 우르를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으로 가는 도중에 하란에 이르러 그곳에 자리 잡고 살았다’(11,31). 아브람이 아버지를 따라 가나안으로 가기위해 우르를 나선 것은 몇 살 때인지는 모른다. 아무튼 그가 우르를 떠난 것은 자의반 타의반인 것 같다. 그리고 누가 ‘떠나라.’해서도, 누가 불러서도 아니었다고 여겨지기도 하다. 다만 아버지 테라를 따라 나선 것뿐인 것 같다. 하느님의 개입이 아브람, 또는 아버지 테라에게 내려졌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아무튼 목적지를 가나안 땅으로 정해 두고 테라는 아들 아브람 내외와 손자 롯만을 데리고 이렇게 칼데아의 우르를 떠났다. 떠남의 주체는 테라이지, 아브람은 아닌 것 같다. 그러면 과연 테라는 왜 우르를 떠났을까? 그것도 여러 민족이 우글거리는 가나안 땅을 향해서. 그렇다고 기후도 썩 좋은 곳도 아닌데도. 그래서 대부분이 떠돌아다니면서 유목 생활로 끼니를 이어가는 천박한 곳이었는데. 그리고 가뭄이 심해 흉작으로 기근이 끊이지 않은 곳이기도 한데. 여기에는 분명 하느님의 뜻이 담긴 개입이 있었으리라. 사실 가나안은 고대의 주요 통상로들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많은 민족이 그곳에 모여 있어, 당신이 선택한 백성이 다른 민족들에게 당신을 쉽게 드러내 보이고자 하셨기 때문이기도 할게다. 다시 순교자 스테파노의 최고 의회에서의 설교를 다시 한 번 더 들어보자. “부형 여러분, 들어 보십시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자리를 잡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느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네 고향과 친족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칼데아인들의 땅을 떠나 하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죽은 뒤, 하느님께서는 그를 하란에서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땅으로 옮겨 오게 하셨습니다‘(사도 7,2-4). 창세기 내용과는 달리, 그는 아브람에게 하느님의 개입이 이미 우르에서부터 있었음을 설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고향과 친족을 떠나 출발했고 가는 도중에 하란에 자리를 잡았던 것 같다. 아무튼 테라 가족이 우르를 떠난 이유에 대해서 여러 설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직접적인 개입 여부가 있었느냐이다. 그렇지만 있었다고 해도 좋고 없었다고 해도 좋다. 어디 우르에서도 하란에서도 두 번이나 있었다 하면 그게 어쩌랴! 그것은 오직 하느님 그분만이 가진 계획일 테니까. 암튼 테라는 하란에 자리 잡았다. 드디어 하느님의 공개적인 개입이 테라가 아닌, 그의 아들 아브람을 통해 시작되었다. 어떤 방법으로 그를 불렀는지는 모른다. 나타나셔서 전하였는지, 아니면 다른 방법이었는지는 모른다. 좌우간 노아 이후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을 통해 당신의 구체적 구원 계획을 손수 밝히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12,1ㄴ-3). 아브람은 하느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그는 아내 사라이와 조카 롯과, 자기가 모은 재물과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길을 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일흔다섯 살이었다. 아브람은 그 땅을 남쪽으로 가로질러 스켐의 성소 곧 모레의 참나무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족이 살고 있었다. 스캠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갈림길에 위치해 있었기에 요충지로, 성경 곳곳에 이 지역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리고 ’모레의 참나무‘는 히브리어에서 ’예언하는 자, 곧 점쟁이의 참나무‘, 또는 ’예언의 참나무‘를 뜻하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네 마을 어귀의 큰 나무 아래 사당을 세워 ’기도하는 곳‘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드디어 하느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 과연 하느님께서 어떻게 아브람에게 나타나실 수가 있었을까? 모세는 하느님으로부터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탈출 33,20)라는 말을 듣는다. 이렇게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 존재라면, 어떻게 그분께서 나타나실 수 있을까? 만약 하느님께서 나타나셨다면, 어떻게 그분이 보이지 않는 존재일 수 있나? 사도 요한도 말한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요한 1,18; 1요한 4,12 참조). 바오로 사도도 그분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1티모 6,16)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성경은 절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보이신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는, 보이신 분은 한 번도 보이신 적이 없는 아버지 하느님이 아니라, 내려오시기를 원하셨기에 내려오셔서 사람들 눈에 보이기를 원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는 것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실로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콜로 1,15)이시다. 이는 ’최후의 심판‘에서 언급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에서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마태 25,40.45 참조)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게다. 또는 우리가 성체 조배하면서 묵상 중에 누군가와 나누는 그 상대일 수도 있을 게다.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을 위해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 그는 그곳을 떠나 ‘하느님의 집’을 뜻하는 베텔 동쪽의 산악 지방으로 가서, 서쪽으로는 베텔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아이가 보이는 곳에 천막을 쳤다. 그는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야훼’라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 아브람은 다시 길을 떠나 차츰차츰 팔레스티나 남쪽에 위치한 사막 지방의 네겝 쪽으로 옮겨 갔다. 이는 반유목민의 이동 방식으로서, 천막을 치고 얼마 동안 살다가 다시 천막을 거두어 이동하기를 반복하면서 옮겨 감을 의미한다. 이렇게 아브람은 우르에서 하란으로, 거기에서 오랜 기간 머물고는 가나안 지역의 산악 지방을 지나 네겝으로 이동해서 유목민의 삶을 살았다. [참조] : 이어서 '6. 이집트로 간 아브라함'이 소개될 예정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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