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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믿음의 눈으로/하느님과의 대화 배우기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0-02-17 조회수1,292 추천수1 반대(0) 신고

 


하느님과의 대화 배우기

많은 성인은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로 묘사하고 있다.

오래 전에 기도를 이렇게

묘사하는 것을 처음 들었을 때

나의 즉각적인 질문은

"대화는 상호적인 것이므로

하느님이 나에게 얘기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내가 그분과

얘기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모든 관계는 의사소통과 비례한다.

이것은 우리의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사실이고

우리가 하느님과 갖는 관계에

대해서도 진실이다.

'의사소통'이란 말은 어떤 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분과 내가 정말로

의사소통을 할 때 여러분은

나와 공유하는 것을 통해서

여러분을 알 수 있게 된다.

우리의 공통의 소유는 자신이다.

이런 식으로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 또는 의사소통인 것이다.

기도 속에서 점차적으로

더 많은 우리 자신을 하느님에게

열어 보여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을

더 많이 알게 되어야 한다.

누군가는 이런 질문을

할지도 모른다.

하느님이 아직도 모르는 것을

우리가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은 우리가 말할 것을

선택하기도 전에 우리가

선택한 바로 그 말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그러나 이 질문은

한 가지 주요한 점을 빠뜨리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께 정보를 알려주기

위해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앞에서 진실 되기 위해서

말을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 말을 한다는 것은

현재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우리는 자신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자각하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하느님과 진실로 공유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자신의

숨어 있는 부분과 더 많은

접촉을 갖게 될 것이다.

개인기도는 우리 대부분이

기도문을 그냥 읽거나 하느님이

듣기 좋아한다고 생각되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가치를

인정받아 오지 못했다.

반항적인 예언자인 예레미야는

하느님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당신은 저를 예언자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저를 바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욥은 하느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너무나 비참해서

당신이 저를 만든 날을 저주합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까지도

이렇게 외치고 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들은 모두 정직한 기도들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는가?

성서는 하느님과 믿는 사람들의

의사소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하느님은 어제도 오늘도

언제나 똑같은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수신용 안테나를

갖게 해주셨는데,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 우리의 마음,

의지력, 상상력, 감정,

그리고 기억력의 다섯 개의

안테나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첫 번째 는 마음이다.

여러분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느낄 때

하느님이 불어넣으신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적은 없는가?

나는 종종 깨달음을 위해

기도를 한다.

나는 하느님께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하고

누군가를 도와주기 위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글을 쓰기 전에

항상 기도를 하고

내 생각을 읽어 주도록

부탁을 한다.

하느님은 나에게 빈번히

영감을 내려 주시고 더 넓은

시야에서 사물을 보도록 도와주신다.

하느님이 우리와 의사소통을 하는

두 번째 채널은 의지력이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것이 아닌

힘을 체험하는데,

그것은 의지력에서이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힘이다.

그리고 나는 하느님께서

빈번히 우리에게 무엇인가

특별한 일을 하기 위한 힘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으로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내적인 감각이 있다.

내가 여러분에게 눈을 감고

낯익은 얼굴을 보거나

낯익은 목소리를 들으라고

요구한다면 여러분은 상상력의

힘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어떤 장면이나 소리를 우리의

상상력에 집어넣을 수가 있다.

또 우리의 감정이라는

채널도 존재한다.

하느님은 우리의 감정 속에

평화나 불안까지도

집어넣을 수가 있다.

어떤 사람이 말한 것처럼,

"하느님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려고 찾아온다.

그리고 안락한 사람들을

괴롭히려고 찾아온다."

일반적으로, 우리 안에서

하시는 하느님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평화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우리 앞에 버티고 있는

도전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까지

하느님은 우리를 불안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사용하는

마지막 인간적인 채널은 기억력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과거에 베푼

자신의 자애로움을

상기시킬지도 모른다.

또 우리가 과거의 경험을

재평가하는 것을 도와주시고,

해로운 기억을 유용한 기억으로

전환할 때 우리의 기억을

치유해 주신다.

한 가지 최종적인

문제가 남아 있다.

나의 생각, 욕구, 상상력, 감정

그리고 기억력이 정말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왕왕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은총이 항상

그 몫의 일을 해내고 있다.

생각이나 욕구는 되돌아오고

해로운 기억은 치유된다.

어떤 깨달음이 인생을

바꾸어 놓을 만한 결정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면

확인을 하기 위해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기도를

드려야 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이 몇 번이고

어루만진 소경의 눈과 같다.

예수님이 어루만질 때마다 매번

소경은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의 눈으로

(존 파웰 지음 / 정성호 옮김)

- 성바오로 펴냄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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