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20년 2월 20일[(녹) 연중 제6주간 목요일] | |||
---|---|---|---|---|
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20-02-20 | 조회수897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20년 2월 20일 목요일 [(녹) 연중 제6주간 목요일] 말씀의초대 사회적 지위가 어떠하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신앙인의 참된 자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라고 밝히시자 제자들은 큰 충격에 빠진다.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고르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한다면, 아니겠습니까?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바로 부자가 아닙니까? 자들도 그들이 아닙니까? 모독하는 자들도 그들이 아닙니까? 하신 지고한 법을 이행하면, 죄를 짓는 것으로, 여러분은 율법에 따라 범법자로 선고를 받습니다. ◎화답송◎ 시편 34(33),2-3.4-5.6-7(◎ 7ㄱ) 주님이 들어 주셨네.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 ◎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우리 모두 그 이름 높이 기리자. 주님을 찾았더니 응답하시고,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 ◎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복음환호송◎ 요한 6,63.68 참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복음◎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복음입니다. 8,27-33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한 분이라고 합니다.”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하고 대답하였다. 제자들에게,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영성체송◎ 시편 78(77),29-30 참조 주님이 그들의 바람을 채워 주셨네. 그들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으셨네. ◎오늘의묵상◎ 우연한 기회로 신학교 동기 신부들에게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장 공허한 순간, 사제가 되어서 좋은 점과 어려운 점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느끼고 이에 대한 보람과 기쁨을 느끼는 것도 성사나 말씀 선포와 연관된 것이고, 어려움이나 공허함을 느끼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성사나 말씀 선포와 연관된 것이었습니다. 행복과 고통이 공존하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언젠가 국제적인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이 텔레비전에서 강의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떠냐고 물으면 “아주 좋아요.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물었답니다. 그러나 사실 이와 같은 되물음은 잘못된 것입니다.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고, 즐거움 안에도 힘든 부분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기쁨 안에 고통이 있는 것이 우리 삶의 이치입니다. 오르막이 없는 내리막은 존재하지 않습니다.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사탄”이라고 꾸중을 들은 이유는 이러한 삶의 이치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난받으시는 그리스도는 받아들이지 않는 그의 생각은 삶의 이치에도, 하느님의 뜻에도, 구원의 신비에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고난과 역경을 피하려고만 하고 오직 평화와 기쁨만을 추구하려는 것은 아닌지요? (한재호 루카 신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