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 <요한19: 1-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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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20-04-05 | 조회수1,249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20. 4. 5. 주님성지주일을 묵상하며~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 <요한19: 1-16> 1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려다가 군사들에게 채찍질을 하게 하였다. 2 군사들은 또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히고 나서, 3 그분께 다가가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그분의 뺨을 쳐 댔다. 4 빌라도가 다시 나와 그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내가 저 사람을 여러분 앞으로 데리고 나오겠소. 내가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라는 것이오.” 5 이윽고 예수님께서 가시나무 관을 쓰시고 자주색 옷을 입으신 채 밖으로 나오셨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자, 이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 6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보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여러분이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목을 찾지 못하겠소.” 하자, 7 유다인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소. 이 율법에 따르면 그자는 죽어 마땅하오.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였기 때문이오.” 8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9 그리하여 다시 총독 관저로 들어가 예수님께, “당신은 어디서 왔소?” 하고 물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0 그러자 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는 당신을 풀어 줄 권한도 있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11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위로부터 받지 않았으면 나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너에게 넘긴 자의 죄가 더 크다.” 12 그 때부터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 줄 방도를 찾았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그 사람을 풀어 주면 총독께서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오. 누구든지 자기가 임금이라고 자처하는 자는 황제에게 대항하는 것이오.” 하고 외쳤다. 13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리토스트로토스라고 하는 곳에 있는 재판석에 앉았다. 리토스트로토스는 히브리 말로 가빠타라고 한다. 14 그날은 파스카 축제 준비일이었고 때는 낮 열두 시쯤이었다. 빌라도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여러분의 임금이오.” 15 그러자 그들이 외쳤다.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가 그들에게 “여러분의 임금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이오?” 하고 물으니, 수석 사제들이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16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넘겨받았다. <아멘>
이제 드디어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에 이르렀습니다. 밤새도록 심문과 고문을 받으신 주님은 제6시경에 빌라도에 의해서 사형선고를 받으신 후에 즉시 십자가로 넘겨져요. 그때 예수님의 모습은? 자색 옷을 입었어요. 주홍색. 가시관을 쓰셨고 온몸은 채찍에 맞아서 피투성이가 된 그런 상태였어요. 그건 바로 선악과를 따먹고 저주를 받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의 그 가시관은 아담에게 내려진 저주의 가시덤불이었어요.
<창세 3:17-18> 17 그리고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18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
가시덤불과 엉겅퀴. 이게 가시떨기거든요? 그것을 저주의 상징인 '가시떨기'를 예수님이 머리에 쓰고 계신 거예요. 그리고 그분이 입으신 자색옷, 다른 복음서에서는 홍포라고 하죠? 그 자색옷은 주홍같은 우리 죄를 상징하는 거죠?
<이사 1:18> 18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이사 53:5>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우리 주님에게 떨어진 그 채찍은 바로 우리에게 떨어져야 할 채찍이었던 거죠? 원래 우리 거라는 이야깁니다. 우리 거를 다-가지고. 예수님이 지금? 심판대 앞에 서 계시는 거예요. 우리가 가지고 가야 할 그 모든 것들을 다~ . 예수님은 바로 이 일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거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에요, 이것이. 우리의 저주와 우리의 죄, 그리고 우리의 허물과 상함을 다 가져가셔서 당신의 몸에 채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흑암에서 건져 올리신 거죠. *그 일은 반드시 일어나지 않으면 모든 존재는 전부 멸망하게 돼 있어요. 예수님은 반드시 죽으셔야 돼요.* 그래서 그분은 죽으시러 이 땅에 오셨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계속해서 예수님을 놔 줄려고 하는데 유대인들이 놔 주지 말라 그래요. 그걸 근데 누가 막은 거예요? 결국은. 하느님이 못 놔주게 하신 것입니다, 빌라도는 일곱 번이나 예수님의 무죄를 시인했어요. '내가 이 이에게서 도저히 죄를 찾을 수가 없다'라는 무죄 시인을 일곱 번이나 했구요. 예수님을 놓으려 애를 썼어요.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을 한 거예요. 근데 그는 이내 예수님이 무죄한 분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정치 9단이란 말입니다, 그 사람은요. 눈치가 아주 그냥 굉장히 빠른 사람이란 말이에요. 그는 이내 예수님이 종교적인 감정싸움에 말려들었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거예요. 게다가 그 청년은 계속해서 자기가 유대인의 왕이래요.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이래요. 어차피 자신은 유대인도 아니고 하느님도 두려워하는 이가 아니에요. 그렇지만 뭔가 찝찝하고 깨림직한 거예요. 자꾸 하느님의 아들이라 그러고 자기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니까. 그러니까~ 빌라도는 계속해서 자기가 아무 죄도 찾을 수 없었고 그리고 혹시 유대인의 왕이나 아니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나와는 상관없지만, 나에게 혹시 무슨 해가 되지 않을까?라는 의미에서 놔 줄려고 한 거예요. 예수님을 믿어서도 아니고 예수님에게 호감을 가져서도 아니에요. 그냥 나와 아무 상관없는 그런 무죄한 청년 하나 죽이고 혹시 자기에게 어떤 불똥이 튈까 봐 자꾸 이제 풀어주려고 한 거죠? 그는 구체적으로 그 청년을 풀어줄 방도를 찾았어요. 그는 먼저, 예수라는 청년을 놓아줄 구실로 명절에 행하던 관례를 들어서 유대인들에게 죄인 중의 하나를 풀어줄 테니까 선택하라,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연히~ 무죄한, 그냥 감정싸움으로 데려온 이 예수라는 청년을 풀어 주세요,라고 할 줄 알았던 거예요. 바라바라는 놈은 진짜 반역자였고 진짜 살인자였거든요~. 그러니까 당연히 이 빌라도는 이 유대인들이 내가 채찍 몇 대 쳐서 내놓으면 이 예수를 풀어주라고 할 줄 알았는데 유대인들이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그러는 거예요. 빌라도의 예수 방면 의지가 또 가로막혔죠? 빌라도가 마지막 방법을 씁니다. 그는 유대 군중들의 화를 진정시킬 요량으로 예수님을 채찍질하라고 시켰어요.
왜, 유대인들이 과월절이라고 관정에 안 들어왔거든요. 지들은 깨끗하겠다고 안 들어왔어요. 그러니까 데리고 나갔어요. 피가 범벅이 돼 있었고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을 거예요. 아마 눈도 안 떠졌을 거 같아요. 하도 맞아서~.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여져 있고 피가 머리로부터 흘러내리고 있어요. 거기다가 어울리지도 않는 자주색 홍포를 입고 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그를 군중 앞으로 데리고 나왔어요. 그런 빌라도가 이야기합니다. "여기 이 사람을 봐라" 그런다고요. 히어 이즈 더 맨. 그 말은 무슨 뜻이겠어요. "자, 됐지? 그만하자" 이런 말이에요. Here is the man. 자 봐~! . 그런데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빌라도가 적이 당황했을 거예요. 빌라도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어요. 자신은 그 예수라는 청년의 무죄함을 알았고 그의 비범함도 눈치를 챘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도무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아요. 그리고 결국에는 나중에 우리가 로마 황제에게 탄원할 수도 있다라는 협박을 합니다.
<요한 19:12> 12 그 때부터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 줄 방도를 찾았다. <그러죠? Here is the man. 힘썼다는 거예요, 그게~. 그러니까 봐라~ 됐지? 이제 그만하자~라고 했던 거예요. >그러나 유다인들은 “그 사람을 풀어 주면 총독께서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오. 누구든지 자기가 임금이라고 자처하는 자는 황제에게 대항하는 것이오.” 하고 외쳤다.
헤로데가 로마로 가서 왕위를 받으러 갈 때, 뒤로 사신들을 보냈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요. 그리고 이 사람들은 겁도 없었어요. 빌라도가 처음에 유대 총독으로 부임을 할 때 로마 황제의 동상을 몇 개를 갖고 왔어요. 군데군데 세워놓고 여기는 식민지다라는 것을 인식시켜 주기 위해서. 그때 유대인들이요~ 예루살렘으로 몰려 들어와가지고 끝도 없이 몰려 들어와가지고 저 동상 안 치우면 우리를 다 죽여라 그러고 거기 누워 버렸습니다. 빌라도는 그걸 경험한 사람이에요. 저놈들 건드리면 분명히 지금 로마로 가서 탄원을 할 거라는 걸 이 사람은 안 거예요. 빌라도는 지금 유대 총독의 자리에서 로마 황실로의 금의환향을 꿈꾸고 있는 상태예요. 당시 로마의 벼슬아치들에게는 식민지의 총독자라는 그 총독자리는 로마 황실로 입성하는 그런 교두보의 역할을 하는 중간 자리였기 때문에 거기에 연연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 자리를 무사히 잘 마치고 더 높은 중앙의 벼슬로 가려고 애를 쓸 뿐이었죠? 근데~ 마침 그 얼마 전에 자기의 후견인이며 그.. 티베리우스의 측근,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의 측근인 세자누스라는 사람이 숙청을 당했어요, 그 얼마 전에. 그러니까 자기가 기대고 있던 담이 왕창 무너져 버린 거예요 지금 빌라도의 처지는~. 그 상태에서 지금 이 사람이 세자누스가 죽는 바람에 자기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로마의 비위를 요만큼이라도 건드리면 안 되는 상태예요. 근데 이 독한 유대인들이 "당신~ 저 사람을 풀어주면 가이사르 반역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해버렸단 말입니다. 그때 빌라도가 '아.. 이 사람을 죽여야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한 거예요. 결국 세상의 권세에 대한 미련이 죄 없는, 자기가 일곱 번 씩이나 무죄하다, 무죄하다, 무죄하다라고 이야기한 그 죄 없는 청년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어떻게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사형선고를 내려서 죽일 수가 있냐고 말씀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타락한 인간의 힘과 권세에 대한 욕구는 그렇게 무서운 거예요. 그게 우립니다. 우리 자신이에요. *도대체 왜 세상은 그렇게 주님을 못 죽여서 안달을 부린 것일까요? 그리고 *왜 하느님은 빌라도의 그런 애씀을 하느이 막으시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놔두셨을까요? 적어도 그 지방의 최고 권세자잖아요. 그가 놓아주려고 했을 때 하느이 조금만 도와주셨으면 예수님 놓아줄 수 있었단 말입니다. 근데 안! 도와주셨어요. 하느님이 죽이신 것입니다. 죽으라고 내려보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죽이신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먼저 고개를 숙이시고 영혼이 떠나갔다,라고 그렇게 순서대로 표현이 돼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누가 죽이기 전에 하늘에 의해 죽은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의 뜻이 하나가 되어 먼저 죽은 거예요. 바로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십자가에 못 박아라' 십자가에 못 박아라 했던 그 사람들 중에는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과 율사들만 있었던 게 아니라 광야에서 오병이어로 배부르게 배를 채웠던 사람들도 있었고요. 거기 적어도 수만 명이 있었단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요. 예수님과 함께 밥을 먹었던 세리, 창녀, 고아, 나그네들도 있었어요. 근데 그 누구도 예수님의 편을 안 들어 줬습니다. 세상 모든 이들이 주님을 향해 죽어라 하고 독설을 내뿜었고 적어도 어떤 이들은 무관심했어요, 거기에. 죽여라라고 외치진 않았을지언정 무관심했단 말입니다. 그게 우리 자신을 포함한 세상의 본질이에요. 나라는 거짓 신을 만들어 놓고 그들의 신은 '나'입니다. 내 배를 불리는게 나의 유일한 목적이잖아요? 내가 신이라는 거예요. 그 거짓 신의 야망과 뜻에 위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적으로 간주합니다,
바리새인들이나 대제사장들, 율사들, 사두가인들은 당시 유대의 권세자 들이었어요. 그들은 로마의 식민통치 아래 있었지만 그 권세자들은 그 상황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권세를 전부 다 누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청년이 나타나서는 자신들의 권세를 부정해요. 게다가 자신들의 종교적 열심과 노력까지도 부인을 하면서 '회개하라' 고 그들의 자존심을 긁어댔어요. '회개하라'라는 건 '너희들이 지금 하고 있는 건 다 꽝이야'라는 뜻이거든요. 자기들은 굉장히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회개를 하라 " 그래요. 그러니까 화가 안 나겠습니까? 당연히 예수가 밉죠. 죽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예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은 이 세상의 빵으로 배 불리 먹여주던 예수가 그렇게 나약하게 죽을 줄은 몰랐을 거예요. 자기들에게 밥을 주고 같이 밥 먹어주고 오병이어로 배 터지게 먹여주고 할 때는 좋았어요. 그런데 지금 자기들의 눈앞에서 나약하게 뚜들겨 맞고 죽어가고 있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질병을 고쳐주시고 죽은 자를 살려주시고 오병이어, 칠병이어로 수천, 수만 명을 먹이실 때 그들은 이 땅에 진정한 메시아가 왔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자기들은 아직도 궁핍하고 부족하고 연약한데 그 모든 게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가 뚜들겨 맞고 죽을 지경이 된 거예요. 그리고 수시로 자기가 죽어야 된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주는 빵은 이 세상의 빵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들의 기대는 곧 원망과 분노와 복수심으로 바뀐 거죠.. 죽이는 겁니다.
이렇게 열심히 하느님의 은혜를 이야기해도요? 죽음이 눈앞에 오면 "내가 하느님께 어떻게 했는데 하느님이 내 이런 병도 안 고쳐주냐고.." 어떤 분은 당뇨로 두 다리를 잃고 그것 때문에 돌아가시면서 '내가 교회를 몇 개를 개척했는데 하느님이 내 두 다리 이렇게 짜르시고 이것 때문에 나를 죽게 하시냐" 고 원망합니다. 그들과 지금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아라 십자가에 못 박아라 하는 사람과 뭐가 달라요, 그들 앞에 예수님이 연약한 모습으로 그렇게~ 두들겨 맞은 상태로 나타났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안 박았을까요? 그 분노가? 잘하면 저도 뚜들겨 팰 기세던데요? "네가 말한 거 믿고 여기까지 왔다가 이게 뭐냐." 그러고는 저한테 살려 달라고 그래요. 제 손을 붙들고.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가 어떻게 살려줘요. 거기서 죽어야 진짜 사는 건데 이 땅에서 살려달라 그러면 어떡해요. 그들이 바로 지금 이 사람들과 똑같은 거예요 .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진짜 예수를 믿고 있는지 매 순간 확인해 봐야 돼요. 예수는 한 번 믿고 끝나는 게 아니에요. 매 순간 확인하셔야 돼요. 그리고 매 순간 회개하셔야 됩니다. '나'라는 신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나 이외의 다른 존재에게 순종과 복종을 요구하시는 진짜 숭배의 대상인, 하늘의 왕이 오시게 되면 그들은 곧 그 하늘 왕을 죽여 버려요. 하늘 왕은 은닉되어서 숨겨져서 이 땅에 오시기 때문에 인간들이 추구하는 힘과 가치를 이 세상에서 그들이 원하는 만큼 안 준단 말입니다. 숨겨져 있는 하느님이기 때문에. 근데 그걸 안 주면 세상은 오로지 그것만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그걸 안 주는 하느님을, 하늘 왕을 그 앞에 순종하지 못하고 때려죽인다니까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성당에 앉아서 하느님의 힘을 이용하여 이 세상 것을 얻어 내겠다고 온 사람들은 하느님이 그걸 안 줬을 때 자해라도 해서 그걸 얻어내는 거예요. 그게 단식 아닙니까. 금식, 백 일기도. 이따위 것들 하면서 하느님을 협박하는 거죠. '안 주면 죽어 버릴 거야.' 그런 거예요. 그게 안 통하면.. 죽이는 겁니다. 하느님을 죽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예수를 믿으면서 자기의 소원과 비전과 야망을 내려놓는 자리로 가는 거지, 그걸 어떡해서 보좌를 흔들어서라도 얻어내는 자리로 가는 게 아니에요. 이게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근데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이 자기를 신으로 숭배하며 태어나요. 모든 인간이! 그래서 바오로가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 그런 것입니다. 하나도 없다. 의라는 게 뭐라 그랬어요? [쟈다크]. 義. 의라는 건 관계를 맺고 있는 [네페쉬]가 그 관계가 요구하는 걸 성실하게 수행해 내고 있는 상태예요. 하느님은 우리에게 행하실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성실하게 수행해내고 있는 상태. 그게 '의'거든요? 그들을 '의인'이라 그래요. 그럼 의인이라는 건 뭐예요. 하느님이 우리를 순종하라고 만들었거든요. "그래야 내가 내 것을 너에게 다 부을 수 있어. 그때 네가 최고로 행복할 수 있어." 이게 창조의 목적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느님 앞에 넙죽 엎드려 그분이 어떻게 행하든 그 앞에 순종하는 것이 '의'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의롭게 사는 이들을 '의인'이라 그래요. 근데 누가 그렇게 사냐고요? 내 뜻을 위해 하느님을 방법으로 동원은 할지언정 하느님의 뜻을 위해 내가 손해를 보는 자리로 내려가 순종하는 이가 어디 있어요. 하느님의 뜻을 위해 "너 당뇨로 니 두 다리 좀 내가 짤라야 되겠다." 그랬을 때 아~무 불평 없이 "하느님, 그러세요. 내 팔은 왜 남겨두세요. 이것도 짤라 가시지" 그 자리로 스스로 내려갈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그 빌라도의 사형 언도의 장면에서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라는 바오로의 일갈의 구체적 그림을 보는 거예요. 진짜 없구나. 38년 된 병자였다가 살아난 그놈은 어디 갔나.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그놈은 어디 갔나. 아니, 열두 해 혈루병 앓던 그 여자는? 어디 가셨나.. 다 어디 간 거예요? 의인은 없는 것입니다. 예수가 십자가 지기 전에 의인은 없는 거예요. 악인은 '나' 라는 왕에게 순종하지 않는, 모든 것. 그게 하늘의 왕이라 할지라도 가차 없이 살해하는 자들이에요. 그게 바로 우리란 말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어떤 인간도 의인으로 날 수가 없어요. 근데~ 그들 중에 하느님의 편애를 받아서 창조이전에 하느님에 의해 택해진 이들이 있어요, 그들이 바로 교회예요. 하느님은 그 교회의 구원 방법으로 하느님 아들의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의 예수 방면 의지가 그렇게 무참하게 하느님에 의해 묵살당한 거예요. 그러나 그러한 묵살도 자기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발로였던 거예요. 내 백성 살리려고 묵살하신 거예요.
*내 아들 죽이는게 목적이 아니라 내 아들 안에서 내가 택한 내 백성 살리려고. 예수를 죽여버린 겁니다.* 하느님의 권세는 그렇게 당신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반드시 성취해 내고야 마세요. 아들의 목숨까지 끊어 내면서까지. 그게 하느님의 권세예요. 누가 이 세상에 그런 권세를 가졌습니까. 하느님 밖에 없어요. 그거를 권세라고 하는 거예요, 진짜 권세. 내 걸 손해 보면서 원수를 살려내는 그 힘. 이 세상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그 힘. 그걸 권세라 그래요. 그건 하느님만 갖고 있는 권세예요. 이 세상에는 그 하느님의 권세를 이겨낼 권세가 없어요. 그럼에도 인간들은 어줍지 않은 세상 권세로 하느님의 권세를 이겨 먹으려고 하고 있는 거예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세상은 하느님의 권세가 어떤 것인지 몰라요. 우리가 바로 그런 약함이 권세다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보세요. 병신 꼴값하네~ 그런다고요. 그게 무슨 권세냐 안 그렇습니까? 우리 부모들도 그래요. 제가 아는 어떤 교우가 아들 자전거를 새 걸 사줬는데 아들이 동네 불쌍한 아이한테 그 자전거를 주고 왔어요. 그리고는 아버지한테 ^^ "아버지 미안해요. 아버지가 사준 새 자전거를 너무너무 갖고 싶어하는 애가 있어서 주고 왔어요." 걔, 그날 맞아 죽었잖아요.(ㅎㅎㅎ) 자기 아들이 그러고 오니까 저게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지 아버지는 무슨 땅 파서 돈을 버는 줄 아냐?^^ 이러면서 아주 죽도록 팼대는 거예요. 권세, 그런 권세를 세상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아요. 그건 약함이라고 여겨버리죠? 절대 권세라고 인정하지 않아요. 그래서 자기들이 원하고 추구하는 세상 권세들을 붙드느라 하느님의 권세의 이끄심에 순종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죽음의 길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권세로 이끌고 가신다,라는 그 확실한 믿음이 있다면 여러분의 지금 현실은 하느님의 권세에 의한 현실이거든요? 근데 인정하지 못하잖아요, 악악대고 있잖아요, 지금 하느님 앞에~. 당신 지금 정신이 있냐고 없냐고. 왜, 침묵하고 있냐고~. 그게 순종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게 악인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반드시 우리를 거기에 순종시켜 내고야 마시는 거예요. 오늘 본문은 그렇게 세상의 권세와 하느님의 권세의 극명한 대조 속에서 긴박하게 진행되어져 가고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요? 요한이 권세, 왕 이런 개념들을 나열하면서 유독 *과월절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끼워 넣는 것을 보실 수가 있어요.
<요한 19:14> 14 그날은 파스카 축제 준비일이었고 때는 낮 열두 시쯤이었다. 빌라도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여러분의 임금이오.”
, 예수님이 어떤 날 죽으셨죠? 어떤 날 죽으셔야 돼요? 유대인의 3대 명절 중에 과월절에 죽어야죠~. 어린 양은 그때 죽어야 되니까~. 예수님이 과월절 날 죽으셨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사형 언도를 받으시는 그 새벽은 과월절이어야 돼요, 그렇죠? 요한은 뜬금없이 그날이 과월절 "준비일"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어요. 생각해 보세요. 요한은 분명히 그 전날~ 저녁에 예수님과 함께 과월절 만찬을 먹었단 말입니다. 과월절 날 먹는 거예요, 그건요. 그리고 그 과월절 만찬의 자리에서 유다가 예수님을 팔러 나갔고 예수님은 바로 그날 밤에 잡혀서 새벽까지 심문과 고문과 선고를 받고 계시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이 날짜 감각이 없어진 걸까요? 왜 갑자기 그날이 "과월절 준비일"이라고 했을까요?
<마르 14:12> 12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가서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보세요. 과월절 양은 유월절에 잡아요. 그런데 그 과월절 양 잡는 날을 무교절 첫날이라 그래요. 원래 무교절은 니산월 15일부터예요. 그 과월절은 니산월 14일이에요.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그 달 14일까지 양과 염소를 잘 가지고 있다가 그 달, 그날 죽여라 그러잖아요. 그리고 무교절이 이어지는데 누룩이 들어가 있지 않은 빵을 먹는 거예요. 일주일 동안. 그런데~ 이 과월절과 무교절이 붙어있기 때문에 유대인들도요, 유월절과 무교절을 그냥 하나로, 아무 이름으로나 불러요. 그리고 15일부터 무교절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14일부터 무교절, 그러니까 그날부터 무교병을 먹어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14일부터 무교절이라고도 불러요, 또. 그리고 그렇게 지내기도 하고. 그렇게 유대인들은 과월절과 무교절을 혼용해서 썼어요. 그리고 그 무교절의 첫날은 항상 안식일로, 그러니까 과월절 다음날은 "무조건" 안식일인 거예요. 원래 요일로 따라오는 안식일이 아니라 무조건 거룩한모임(성회)으로 모여야 돼요. 그래서 안식일이에요. 첫날과 끝날은.
<레위 23:5-8> 5 첫째 달 열나흗날 저녁 어스름에 주님의 파스카를 지켜야 한다. 6 이달 보름에는 주님의 무교절을 지내는데, 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한다. 7 첫날에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8 그리고 이레 동안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쳐야 한다. 이레째 되는 날에는 다시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죠? 이렇게 유월절의 첫날과 마지막 날은 안식일로 지켜야 돼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준비일"이라는 이 단어는요, 항상~ 이러한 안식일 전 날에 붙여졌던 이름이에요. 안식일 전 날에. 오늘 본문 조금 아래로 내려가 볼게요.
<요한 19:31> 31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마르 15:42> 42 이미 저녁때가 되어 있었다. 그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었으므로,
지금 무교절, 무교절이 시작이 되는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다가오고 있어요~. 그런다고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날은 과월절이에요. 예수님은 과월절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미 과월절 만찬은 전날 저녁에 치러진 상태예요. 그 상태에서 요한은 '예수님께서 과월절에 잡혀 죽으실 바로 그 과월절 어린 양으로 오신 분이다'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무교절과 안식일을 "과월절 "로 부르면서 "과월절 준비일"이라고 한 거예요. 왜! 양은 과월절 준비일 날까지 갖고 있다가 그날 죽여야 되는 거거든요. '바로 이 이가 그 어린 양, 출애굽기 12장의 그 어린 양이다'를 일부러 드러내기 위해 과월절 준비일이라는,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 그런 단어들을 끌어다가 쓴 거예요. 그러나 그 진의를 알면은 우리는 더욱더 그 복음의 넓은 지평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거죠. 이해가 가세요? 요한의 의도를 잘 우리가 이해를 하다 보면 요한은 분명히 그 과월절 어린 양을 강조하기 위해 과월절 준비일이라는 이런 단어를 여기다 갖다가 쓴 거예요.
그리고 요한복음에는요. 다른 세 공관복음서에 그 시간과 다른 시간대가 기록이 되어 있어요. 오늘 보시면 지금 예수님이 빌라도로부터 선고를 받기 위해 그 심판대에 딱 서신 시간을 제6시라고 그래요. 마르코복음에선 십자가에 달린 시간이. 선고받고 십자가에 매달린 시간.. 꼭대기에 끌고 올라가 십자가에 매단! 시간이 몇 시예요? 3시라고 그러잖아요. 근데 여기는 아직 선고도 안 받는데 제6시예요? 말이 안 되잖아요. 유대의 시간은 새벽 6시를 0시로 치죠. 그래서 3시 그러면 아침 9시입니다. 예수님은 아침 9시에 달린 거예요, 십자가에. 맞아요. 그리고? 오후 3시에 돌아가셨어요. *각설하고 그렇다면 과월절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러 오신 분이기에 요한이 일부러 예수님의 죽음을 과월절 어린 양의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가!
<출애 12:3-18> 3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에게 이렇게 일러라. ‘이달 초열흘날 너희는 가정마다 작은 가축을 한 마리씩, 집집마다 작은 가축을 한 마리씩 마련하여라. 4 만일 집에 식구가 적어 짐승 한 마리가 너무 많거든, 사람 수에 따라 자기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과 함께 짐승을 마련하여라. 저마다 먹는 양에 따라 짐승을 골라라. 5 이 짐승은 일 년 된 흠 없는 수컷으로 양이나 염소 가운데에서 마련하여라. 6 너희는 그것을 이달 열나흗날까지 두었다가,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가 모여 저녁 어스름에 잡아라. 7 그리고 그 피는 받아서, 짐승을 먹을 집의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라. 8 그날 밤에 그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불에 구워, 누룩 없는 빵과 쓴나물을 곁들여 먹어야 한다. 9 그것을 날로 먹거나 물에 삶아 먹어서는 안 된다. 머리와 다리와 내장이 있는 채로 불에 구워 먹어야 한다. 10 아침까지 아무것도 남겨서는 안 된다. 아침까지 남은 것은 불에 태워 버려야 한다. 11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위한 파스카 축제다. 12 이날 밤 나는 이집트 땅을 지나면서, 사람에서 짐승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맏배를 모조리 치겠다. 그리고 이집트 신들을 모조리 벌하겠다. 나는 주님이다. 13 너희가 있는 집에 발린 피는 너희를 위한 표지가 될 것이다. 내가 이집트를 칠 때,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 그러면 어떤 재앙도 너희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14 이날이야말로 너희의 기념일이니, 이날 주님을 위하여 축제를 지내라. 이를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야 한다.’ 1 ‘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한다. 아예 첫날에 너희 집 안에서 누룩을 치워 버려라. 첫날부터 이렛날까지 누룩 든 빵을 먹는 자는 누구든지 이스라엘에서 잘려 나갈 것이다. 16 첫날에 거룩한 모임을 열고, 이렛날에도 거룩한 모임을 열어라. 이 두 날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너희가 저마다 먹어야 할 것만은 준비해도 된다. 17 너희는 무교절 축제를 지켜야 한다. 바로 이날, 내가 너희 부대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냈기 때문이다. 너희는 이날을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지켜야 한다. 18 첫째 달 열나흗날 저녁부터 그달 스무하룻날 저녁까지, 너희는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한다.
영원한 규례로 과월절을 지키라는 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과월절 사건은. 대대손손 이어 내려오는 하느님의 백성에게 전부 적용이 되는 규례라는 거예요. 과월절이라는 사건 자체가. 하느님께서 사람과 짐승 가릴 것 없이 애굽의 모든 장자들을 전부 죽이기로 작정하셨어요. 장자를 죽인다는 건 상징적인 거예요. 후사를 막겠다는 거거든요? 그리고 장자는 모든 남자의 대표고 모든 남자들은 가족의 대표이기 때문에 전부를 다 죽이겠다는 뜻이에요, 그거는요. 그 장자를 죽인다는 건 후사를 막고 그 후사로 말미암게 되는 모든 것을 몰살시키겠다는 뜻이거든요. 다 죽어야 된다란 뜻이에요.하느님은 당시 세상 권세의 상징인, 애굽을 멸하시겠다는 당신의 의지를 표명하신 거예요. 물론, 그 애굽이라는 상징 안에는 하느님의 권세를 의지하지 않고 이 세상 권세를 힘 삼아 살고 있는, 모든 죄인들이 포함된 거예요. 그게 애굽 이에요. 근데 그 멸망의 대상은 단순히 애굽의 장자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린 양의 피가 묻어 있지 않은 집은 다 죽는 거예요.
만약에 애굽 사람 중에 그 말을 알아듣고 그 피를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면 그 집은 사는 거예요.그래서 중다한 잡족이 같이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안 죽었잖아요. 그런데~ 누가 그 말을 믿겠냐구요, 누가? 다- 죽는대,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다 죽는대요. 근데 다 죽을 건데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럼 어떻게 해야 살어.. 어떻게 하면 사는데? 양, "너 오늘 저녁에 양 잡아먹을 거 아니야. 그 양 잡고 그 피를 인방과 문설주에 발러." 문지방에서 잡는 거니까 문지방은 이미 피범벅이 됐을 테니까 인방과 문설주에만 바르면 사방이 막히는 거예요. 어린 양의 피로. "그럼, 살려주께.", "헛소리 좀 하지 말어.." ㅎㅎ 다들 그럴 거라고요. 그게 믿음입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방법을 믿고 쫓아가는 거예요. 지금 불뱀에 물려서 막 죽어가고 있는데? "야, 너를 물은 뱀을 놋으로 만들어 장대에 달았다 저거 쳐다보면은 너 살려줄게", " 너 죽을래?" 안 그러겠어요? 지금 뱀에게 물려서 죽어가고 있는데 그걸 저주의 상징인 놋으로 만들어서 장대에 달아놓고 "보면 살려줄게" 나 지금 열심히 고약 바르고 있고 열심히 기름 바르고 있고 열심히 운동하고 있어. 나 살으려고. 근데 그걸 쳐다 보라는 거야? 시간 없어. 나. 그런 시간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할 거야. 이게 율법 지킴이에요. 율법주의. 그러면 죽습니다. 미련한 것 같지만 그걸 쳐다봐야 돼요. 그걸 구원이라고 해요. 근데 이 자존심 강한 인간들이 절대 자기 자존심을 굽히질 않아요. 뭔갈 해보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 거예요. 도덕과 윤리 뒤로 숨어보고 ,남 험담 뒤로 숨어보고. 왜! 그래야? 나보다 더 못난이라는 걸 증명해 내야? 내 잘못이 감춰지거든요. 그러니까 열심히 뒷담화하고 그냥. 시기 질투하고. 착한 일하는 척해보고 그러는 거죠. 감추려고. 자기의 더러운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그런 거 아니란 말입니다.
*구원은 그냥 보는 거예요.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를 그냥 바라보는 거예요. 그리고 꼭 그냥 붙들어 버리는 거예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하느님. 그냥 꽉 붙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서만! 아~무 것도 안 했어요. 애굽사람들보다 이 사람들이 뭐가 착한 것도 없었고 더 잘난 것도 없었어요. 아~무 것도 안 했어요. 근데 어린 양의 피를 발른 것 때문에! 살았어요, 그건 은혜로만 산거 거든요? *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가 항상 과월절 뒤에 뭔가가 붙어있어 있음으로 설명이 되어져요. 그게 뭔 줄 아세요? 불기둥과 구름기둥 이야기에요. 항상 과월절 이야기가 나오면 그 뒤에 불기둥과 구름기둥 이야기가 나와요
<출애 13: 20-22> 20 그들은 수콧을 떠나 광야 가장자리에 있는 에탐에 진을 쳤다. 21 주님께서는 그들이 밤낮으로 행진할 수 있도록 그들 앞에 서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 속에서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 속에서 그들을 비추어 주셨다. 22 낮에는 구름 기둥이,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을 떠나지 않았다.
이건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광야 사십 년 동안 과월절을 몇 번 지켜습니까. 영원한 규례로 지키라고 그랬는데 과월절을 몇 번 지켰어요? 사십 년 동안. 나올 때 한번 지키고- 지킨 것도 아니죠 그건요. 광야에서 한번 지켰어요. 시내 광야에서 한 번.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한 번. 그 시내 광야 때는 어땠는지 한번 보고 가자고요.
<민수 9:1-3> 1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그 이듬해 첫째 달, 주님께서 시나이 광야에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 “이스라엘 자손들은 정해진 때에 파스카 축제를 지내야 한다. 3 너희는 정해진 때, 곧 이달 열나흗날 저녁 어스름에 파스카 축제를 지내야 한다. 관련된 모든 규정과 법규에 따라 그것을 지내야 한다.”
하느님께서 원망과 불평으로 뭇매를 맞고도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이스라엘에게 다시 과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세요. 너희들이 어떻게 거기서 나왔느니 다시 기억하란 거거든요? 과월절을 지키라고 그래요. 그리고는 그 과월절 이야기 뒤에 또 똑같이 구름기둥과 불기둥 이야기가 붙어 있어요.
<민수:15-23> 15 성막을 세우던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언판을 모신 천막을 덮었다. 저녁부터 아침까지는 불 모양으로 성막 위에 자리 잡았다. 16 그것은 늘 그러하였다. 구름이 성막을 덮었고, 밤에는 그것이 불 모양으로 변하였다. 17 구름이 천막에서 올라갈 때마다, 그에 따라 이스라엘 자손들은 길을 떠나고, 구름이 내려앉은 곳에 진을 쳤다. 18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은 주님의 분부에 따라 길을 떠나고, 주님의 분부에 따라 진을 쳤다. 구름이 성막 위에 내려앉은 동안 내내 그들은 진을 치고 살았다. 19 구름이 성막 위에서 많은 날을 지체할 때에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주님의 명령을 지켜 길을 떠나지 않았다. 20 구름이 성막 위에 며칠만 머무를 때도 있었다. 그럴 때에도 그들은 주님의 분부에 따라 진을 치고, 주님의 분부에 따라 길을 떠났다. 21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만 머무를 때도 있었다. 그럴 때에도 아침에 구름이 올라가면, 그들은 길을 떠났다. 하루 밤낮을 머무를 때에도, 구름이 올라가면 그들은 길을 떠났다. 22 이틀이든 한 달이든 또는 그 이상이든 구름이 성막 위에 내려앉아 지체하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진을 친 채 길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구름이 올라가면 그들은 길을 떠났다. 23 이렇게 그들은 주님의 분부에 따라 진을 치고, 주님의 분부에 따라 길을 떠났다. 그들은 주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내리신 분부에 따라 주님의 명령을 지켰다.
이렇게 *과월절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통치에 대한 순종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내가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서 그 은혜로만 only by grace 그 은혜로만 구원을 받은 것이다 라는 확실한 인식이 있는 사람은 그를 구원해 준 그 하느님,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상징이 되는 하느님의 통치에 이끌려 간다라는 거예요. 순종하게 되어 있다 라는 것입니다. 내 현실이 왜 이 모양이야. 왜 이렇게 오래오래 여기서 머물러야 돼? 가 아니에요. 구름이 딱 머물러 있으면 그냥 머무르는 거예요. 가! 그러면 가는 거예요. 몇 백만 명이, 한 직할시예요. 직할시. 한 직할시의 백성이 인구가 텐트를 쳤다가 거두는 게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근데 구름이 시키는 대로 쫓아가는 거예요. *과월절은 항상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 하느님의 현현에 순종으로 이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안다고 하는 이들이 그 왕에 대한 순종으로 자기를 내려놓지 못하는 거예요.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입니다. 과월절을 지킨다고 관정에도 안 들어가고 밖에 서있는데 왕에게 순종하는 게 아니라 왕을 죽이세요,라고 이야기하고 있단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어떠냐고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라는 그 은혜의 지평을 정말 충분히 이해를 하고 있다면 우리가 이렇게 하느님 앞에 악악거리면서 우리의 불평과 불만과 원망의 기도를 내어놓을 수 있을까요? 그 은혜의 지평을 우리가 진짜 안다면. 그리고 자기의 현실에 대해서 이렇게 불만족스럽게 살 수 있어요?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며 살 수 있냐고요. 하느님이 그렇게 하신 거라면. 하기 싫어도 불기둥이 가지 마! 구름기둥이 가지 마! 그러면 안 가야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내가 하기 싫은 상황과 현실과 사건을 나에게 허락했다고 하느님을 떠나거나! 아니면 그분을 향해서 입에 담지 못할 불평과 원망을 하는 인간들이 오늘날 교회(하느님백성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여기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했다고 그 죽일 놈들. 내가 거기 있었다면 몸을 던져 막았을 텐데. 그런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사기 치지 마세요. 우리도 똑같이 소리쳤을 거예요. 확실히 죽이라고..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이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 죄악된 타락한 인간의 현실을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도 계속해서 경험하는 거예요. 너무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에~. 너무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에. 너희들이 어떤 자리에서 구원받았는지 알아? 확인시켜 주시는 거예요. 너희들은 오늘도 내 손에 못 박고 있잖아.. 너희들은 오늘도 내 머리에 가시관 씌우고 있잖아. 너희들은 오늘도 그 불명예스러운 홍포를 나에게 입히고 있잖아. 그거 너희들의 죄 아니니? 폭로시켜 버리시는 것입니다. * 십자가는 그렇게 가면을 쓰고 있는, 잘난 척하면서, 착한 척하고 있는, 이 세상의 죄인들의 실체를 낱낱이 폭로시켜 버리는 거예요. 너희들 아니라고.... 보세요. 예수님이 딱! 서시니까 이제 십자가가 서려고 하니까 모든 인간들이, 그동안 빵도 얻어먹고 쫓아다니면서 말씀도 듣고 했던 모든 인간들이 전~부 돌아서서 죽여라! 라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죽여라! 만약에 나중에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섰는데 천국을 보여줬어요. 나는 그 천국 갈려고 죽어라 하고 정말 먹고 싶은 것도 안 먹고 하고 싶은 것도 안 하고~ 화내고 싶은 것도 화 안 내고 그러고 왔는데, 내가 원하는 그런 천국이 아니야. 아니, 내가 고작 이런 걸 위해서 그 고생을 했단 말이야? 만약에 우리들 마음속에 그런 마음이 들었을 때 그 하느님 죽이고 싶지 않겠습니까? 아니, 나보다 강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무서워서 못 죽이는 건 그건 죽이는 거예요. 우리는 이 땅에서 천국을 추구하는 이들이 아니에요. 물론 맞아요. 그러나~ 하느님이 계시는 곳을 천국이라고 해야 돼요. 그리고 그곳을 가고 싶어 하는 것이 천국 추구란 말입니다.
천국은 나를 사랑하는 존재가 나를 죽도록 사랑할 준비를 하고 나를 기다리시는 곳이에요. 그 하느님을 우리가 사랑하냐고요, 지금. 그 하느님이 주는 어떤 것을 원하고 계세요? 성도는 이 땅에서 하느님과 화목하고 가야 돼요. 그러려면 우리가 그 하느님을 좋아해야 돼요. 사랑해야 돼요. 근데 그 하느님이 계속해서 '착하게 살아라~ 이거 하지 말아라~ 저거 해라~.' 계속 잔소리만 하는, 그런 사감 선생처럼 여겨지게 되면 그 하느님과 절대 화목할 수 없어요. 무서워서 그분이 시키는 일을 할 수는 있어요.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존경받기 위해 그 착한 일을 할 수는 있지만 하느님이 너무너무나 사랑스러워서 그 일을 한 것이 아니라면 절대! 천국 못 들어가요. 우리가 이 세상 떠날 때 하느님이 어서 와 이리 와.라고 했는데 딱 보니까 내가 모르는 사람이에요. 내가 별로 안 친한 분이야. 그리고 내가 사는 동안 계속해서 내가 할 수 없는 어떤 일들을 마구 요구했던 그런 분이에요. 그 손 덥석 잡으시겠어요? 아니요, 거기 딴 사람 없어요? 없으면 나 딴 데 갈래요. 지 혼자, 지 스스로 지옥 가는 거예요. 지옥은 누가 보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 은혜로 사는 게 너무 자존심 상해서 자기들 스스로 떠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하느님과 친해져야 돼요. 그래서 때로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죄에 노출이 되고 변하지 않는,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덮는 하느님에 대해서 은혜에 대해서 말씀 속에서 배우셔야 돼요. 그래야 그분이 아휴... 면목 없이, 면목없게 어떻게 이런 것도 용서해 주셨어요? 한 발 한 발 그분께로 우리가 가까이 갈 수 있을 거 아닙니까~. 근데 그분은 늘 나에게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요구하는, 그런 표독스러운 영감탱이처럼 느껴진다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절대 그분이 계신 곳에 가기 싫어할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천국이 별로 안 가고 싶은 거예요. 거짓말들 하지 마세요!!! 무슨 천국이 가고 싶어요!!
이 시대 교회가 무슨 천국을 희망합니까? 자기들 힘으로 그냥 세상에게 칭찬받으면서 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에게도 칭찬받고 하느님에게도 뽄때나는 그런 존재들이 되고 싶은 거예요. 분명히 성경은 교회가 교회다움을 유지하면 유지할수록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고 했는데 건전하고 건강한 교회들이 일간지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어요. 야~!! 교회 재정의 10프로 이상을 구제에 쓴대, 저 교회. 손뼉 쳐주자. 그거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교회가 진짜 교회다와 지려면 세상으로부터 그런 칭찬을 받는 게 아니라요. 오히려.. 그들에게 구제 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진정한 생수이신 예수를 소개하는 게 더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오히려 그러한 일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어야 돼요. 그거 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먼저 해야 할 게 무엇인지를 세상에게 드러내야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 모든 사람들이 모두 평등하게 사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 주자! 그거보다 먼저 이 세상이 왜 이렇게 빈부의 격차가 생겼으며 왜 이렇게 어려운 일들이 많이 생겼는지 복음 안에서 그걸 먼저 가르쳐 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그 어려움 속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존재들이 있다라는 걸 가르쳐 주는 게 먼저다, 라는 걸 우리는 주장할 수 있어야 돼요. 그래서 촛불 들고 섣불리 나가기 전에 복음의 횃불을 들고 먼저 주변을 밝히셔야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때에 세상이 우리를 향하여 욕을 할 거라고요. 저놈들 행동하지 않는 양심. 그건 양심도 아니다라고 우리에게 손가락질할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잖아요. 우리 마음속에 그걸 하지 말자,라는 그런 악한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 진짜 중요한 게 뭔질 먼저 가르쳐 주고 싶다 라는 게 우리의 진심이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는 숨어서 그 일들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게 아니라 늘 지탄을 받게 돼 있단 말입니다. 원수 취급을 받게 돼 있어요. 그 착하고 깨끗하고 건전하고 건강한 세상한테!!
교회는 그런 거예요. 그걸 추구하여 세상에게까지 칭찬을 받는게 교회가 아니라 말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세상은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까. 세상이 왜 미워하냐고요. 왜 미워해요. 세상이 할 수 없는 일을 우리가 하기 때문에 미워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 일에 먼저 착념하셔야죠. 뭘 어쭙잖게 성인군자 흉내들을 내고 있어요,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칭찬받는 건전하고 건강한 교회. 세상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좋은 교회. 그게 교회의 올바른 목적지가 맞아요? 성경적입니까 그것이? 웬 착한 척들을 그렇게 하냔 말이에요, 교회가. 그러면 하느님의 은혜는 도대체 설자리를 어디서 찾냐고요..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과 친해지냐고요. 우리 스스로 다 잘하고 있는데. 지 마음은 시커먼 유전처럼 그렇게 더러운 상태로 갖고 있으면서 그걸 착한 행위로 늘 가리고 있는! 우리 와~ 그렇게 살지 않으면 나를 벌 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믿고 있는 그 하느님과 어떻게 친해지냐고요. 그러니까 참 문제인 겁니다. 이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 그들은 과월절을 열심히 지키고 있어요. 그런데 여전히 자기 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의 가치와 존엄을 치고 들어오는 하늘의 권세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려요, *과월절은 그 자체 안에 난 이제 이 땅의 양식이 아닌, 하늘의 양식으로만 살겠습니다,라는 성도들의 고백을 유발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은혜는.* 은혜는 그 힘을 갖고 있어요.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100프로 가짜입니다. 여전히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고 있으면서 나는 그 과월절의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100프로 가짜예요. 그건 회개한 사람한 사람 아니에요. 반드시 돌아서게 돼 있어요.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이스라엘이 과월절을 지키는데 그때부터 가나안 땅의 소산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하느님 나라의 그 양식, 그것이 이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더니 온전한 과월절이 되어서 그들에게 진짜 풍성하게 주어지는 거예요. 만나는 뭐였어요. 하느님 나라, 약속의 땅의 양식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니 실제로 그 땅 소산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어지더란 말입니다. 상징이에요, 그 지점을 향해 우리가 그 과월절의 은혜를 붙들고 가는 거예요. 근데 이 원수들이 자기들이 기대하지 않는 연약한 모습으로 예수가 왔다고 해서 그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왜 내가 기대하는 모습으로 안 오냐는 것입니다. 왜 내가 기대하는 모양으로 내 신앙생활이 안 풀리냐는 거죠? 그러면 순종은 어느 때 하는 거예요? 내가 잘 될 때만 하는 것입니까? 복종은 언제 하는 거예요, 도대체? ▷ 정신 똑바로 차려야 돼요. 다수가 가는 길이 절대 진리의 길이 아닙니다. 성경대로 가야 돼요. 자, 그러한 과월절.. 이스라엘이 늘 실패해갖고 하느님이 '다시 지켜'. 또 실패. '다시 지켜' 그리고 매년 반복해야 했던 그 과월절.그것이 바로 이 어린 양에 의해 완결이 되는 거예요, 완성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근데(그래서) 이제 다시는 우리가 과월절 안 지켜도 돼요. 아, 순종하라면서요? 예~. 우리를 순종시키려고 성령이 들어와 버리셨어요, 우리 안에. 내가 밖에서 신랑이 돼서 끌고 가도 너 안 쫓아오더라? 이젠 내가 들어간다! 고 들어오신 거예요. 아, 그럼 곱게 끌고 가시지. 왜 이렇게 두들겨 패면서 끌고 가실까? 그게 복입니다. 곱게 끌고 가면 우리가 쫓아갑니까? 안 쫓아가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꾸 세상으로부터 정을 떼야 돼요. 그래야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그리워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너무 좋으면 안 돼요. 자식새끼들 너무 잘 돼도 안됩니다. 그거 자랑하느라 죽기 싫어요. 하느님이 가자~! 하. 내 자식이 이렇게 자랑스러운데 좀 더 누리다 갈게요. 돈 너무 많이 벌지 마세요. 그것 때문에 하느님 나라 가기 싫어요. 너무 유명한 사람 되지 마세요. 그 사람들의 그런 칭찬과 찬사 땜에, 하느님 나라 가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전부 지지부진하게 가는 거예요. ㅎㅎㅎㅎ. 예?^^. 그러나 그게 복이에요,
열심히 하느님이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그냥 "사세요". 그게 순종이에요. 그냥 살아 버리는 거예요. 대단한 거 하려고 하지 마시고 "사세요". 그리고 순간순간 나에게 허락하시는 그런 상황과 사건과 현상 속에서 배우세요. 이 땅의 가치 없음과 하느님 나라의 소중함, 그리고 하느님의 그, 엄청난 은혜. 이런 걸 조금씩 배워 가시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곧' 끝납니다. 우리 인생 그리 길지 않다는 거 살아보셔서 알잖아요. 그 뒤의 삶을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하여 준비를 해야죠. 그... 마귀 나라의 신참이 인간 세상을 요렇게 감시하고 있는데 진리의 조각이 똑! 떨어진 거예요. 근데 인간들이 그걸 탁! 받더니 너무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그걸 다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그 신참이 고참 마귀한테 물었습니다. '저거 가서 뺏을까요?' 그랬더니 고참이 '왜 뺐어~ 놔 둬'. '아니, 놔 두라뇨? 진리의 조각인데', '진리의 조각만큼 인간을 완벽하게 파멸할 수 있는 무기는 없어~. 놔 둬.' 유대인들이 과월절을 전혀 엉뚱하게 지킨 게 아닙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성경 전체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은혜 속에서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진리의 조각만을 붙들고서 우리도 이런 거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도 올바른 거 이야기하고 있는데 왜 우리 보고 잘못됐다 그래? 그게 진짜 위험한 거예요. 그들이 진짜 양의 탈을 쓰고 들어온 이리입니다. 신비주의나 기복주의가 양의 탈을 쓴 이리 아닙니까? 아니요, 그건 이리의 탈을 쓴 이리예요. 양의 탈은 그거보다 훨씬 우리가 알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와요. 그러니까 조심해야 되는 거예요. 예수 엉뚱하게 믿고 죽도록 고생만 하구~ 지옥까지 가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 삶이. 그래서 좀 더 진지해지자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이 떨어지는 곳에는 빠지지 말고 말씀을 배우고 하는 데에 더 진지해져야 돼요, 이 세상의 모든 권세는 전부 위의 권세에 의해 임명을 받고 조종을 당하는 거예요. 모든 권세가 다. 힘, 가치, 권세 다 마찬가지예요. 그냥 하느님이 쓰신, 쓰시기 위해 여기저기에다가 그냥 소품으로 꽂아 놓으신 게 권세예요.
<로마 13:1> 1 사람은 누구나 위에서 다스리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오지 않는 권위란 있을 수 없고, 현재의 권위들도 하느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이 권세 안에 세상의 모든 힘과 가치가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돈이 많고 적고 그런 거 다 그냥 하느님이 정해놓은 거예요. 우리가 필요한 만큼 하느님은 다 정해 놓으셨어요, 이미. 그러니까 많이 나누세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하느님이 정해 놓으셨다니까요? 그럼 많이 나눠주면 그만큼 손해 아닌가? ^^ 그럼 마시든가. 그럴 거라면 아예 꿈도 꾸지 마시고요.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우리가 아무리 권모술수, 임기응변, 사기, 이런 걸 동원하여 끌어 모으려고 해도 죽도록 모아 놓으면 한 방에 날아가고 죽도록 모아 놓으면 한 방에 날아가고 그래요.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이 맞는다면. 왜, 그 권세는 정해져 있거든요. 그러니까 너무 조바심 내면서 그런 거 모으려고 시간을 허비하시면 안 돼요.
<잠언 8:15-16> 15 내 도움으로 임금들이 통치하고 군주들이 의로운 명령을 내린다. 16 내 도움으로 제후들이 다스린다. 의롭게 판결하는 수령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인기 있는 자 힘 있는 자도 다 하느님이 세우신 거란 말입니다. 그러면 놔두세요. 알아서 해 먹으라고. 나는 왜 유명한 자 안 만들어줬어요? 거기 가면요? 되게 피곤해요. 그런 거 부러워하지 마세요.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왕이면서 왜 죽은 자들의 세상에 대해서 그렇게 부러워하세요. 세상은 죄와 허물로 죽었다면서요, 그럼 실체들이 살고 있는 것이고 실체들이 소유한 실체들의 힘이란 말입니다. 근데 왜 우리가 그걸 부러워하냔 말이에요. 세상의 권세는 하느님에 의해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잠깐 사용되는 것일 뿐이에요.
<요한19:9-12> 9 그리하여 다시 총독 관저로 들어가 예수님께, “당신은 어디서 왔소?” 하고 물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0 그러자 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는 당신을 풀어 줄 권한도 있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11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위로부터 받지 않았으면 나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너에게 넘긴 자의 죄가 더 크다.” 12 그 때부터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 줄 방도를 찾았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그 사람을 풀어 주면 총독께서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오. 누구든지 자기가 임금이라고 자처하는 자는 황제에게 대항하는 것이오.” 하고 외쳤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다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쌓여요. 빌라도가 두려워 했다라는 말이 굉장히 여러 번 나와요. 예수님의 비범함을 빌라도는 눈치를 챘어요. 그래서 빌라도가 묻습니다. 너 정말 어디서 온 거야? 하고 물어요. 그건 고향을 물은 게 아녜요. 빌라도가 헤로데에게 예수를 보낼 때 갈릴레아 사람인 걸 알았거든요. 그 말은 너 정말 하늘에서 온 거야?라고 물은 거예요. 빌라도가 두려웠다,라는 말이 계속 앞뒤로 붙어 있잖아요. 근데 예수님이 아무 말도 안 하세요. 그랬더니 빌라도가 너 건방지게 내가 누군 줄 알고 나에게 아무 말도 안 하니?라고 이야길 해요. 내가 누군 줄 알고. 네가 나에게 아무 말도 안 하냐? 내가 왕이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내가 너를 놓아줄 권세도 있고 내가 너를 죽일 권세도 있어,라고 권세 이야기를 해요. 그때 예수님이 뭐라 그러냐면 그 권세는 위에서 너에게 준 거다, 그래요. 그 권세를 위에서 네게 주지 않았다면 너는 나를 해할 권세가 없는 거야. 그러니까 빌라도, 이 세상의 왕으로 지금 서있는 빌라도의 권세는 하느님의 권세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 란 뜻입니다. 그 권세, 힘, 가치는 하느님이 하느님 마음대로 하느님 권세로 할당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바로 그다음 구절에 '그러므로' 나를 너에게 넘겨준 자는 너보다 죄가 더 크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제 풀리죠, '그러므로'라는 게 거기 왜 나오냐면 유대인들은 단순히 율법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죄가 더 크다,라는 말이 아니에요. 사형선고를 내려버린 사람과 사형 시키라고 데려온 사람과 죄는 똑같아요. 그러나 '위에 있는 권세가 너에게 권세를 부어준 걸 이제 알겠니? 그 권세가 너에게 권세를 할당해 준 건데 나에게 바로 그런 권세가 있다'라는 거예요. 하느님의 그런 권세가 있다,라는 거예요. 따라서 그 권세를 가진 이만이 심판을 할 수 있어요. 그 권세를 가진 이만이 죄를 분별하여 죄의 크기를 할당할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너에게 말하노니 내가 나를 넘긴 유대인들에게 더 큰 죄를 할당하겠다"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그러므로!' 인 거예요. 모든 권세는 하느님의 권세로부터 나온 거예요. "아니, 그럼 빌라도는 뭐예요? 그렇게 하느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아서 하느님에 의해 조종 당해서 예수님에게 사형 언도 내리고 지옥에 가요?" 자자손손, 사도신경에 이름까지 올라가 갖고 본시오 빌라도라고 이름 짓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그렇게 만들어 버렸잖아요.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사형 언도 안 내렸으면 그 사람 천국 갈 수 있습니까? (빌라도에게 사형 언도를 내린 건)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사형 언도를 내린 건 모든 인간들, 자기를 신 삼아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은 나에게 순종하라,라고 찾아오는 하느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그러한 상태라는 걸 모형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리고 빌라도도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깐 내가 바로 빌라도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사형 언도를 (내리지) 내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의 삶 속에서 하느님을 죽이는 삶을 산 거예요. 그게 '죄인' 이에요. 그러니까 함부로 "빌라도는 하느님에게 조종당해 가지고 지옥 간 거예요?" 이런 거 물어보지 마세요. 그게 인본주의라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하느님을 버릴 수밖에 없어요. 하느님이 빌라도를 편애하거나 선택하지 않으신 것뿐이에요. 오히려 "빌라도는 어떻게 된 거예요?"라고 묻기 전에 나도 빌라도인데 나도 예수님에게 사형 언도 내렸는데 아니, 내가 망치로 못을 박은 잔데 나는 어떻게 거기에서 면제가 되었는가로 감사해야지. 마치 안 죽어도 될 이가 하느님의 조종에 의해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처럼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빌라도는 누구다? 나예요. 나. 여전히 이 세상의 중심이 되고 싶어 하는 나, 여전히 이 세상 신으로 살고 싶어 하는 나. 근데 하느님이 왜 예수를 믿고도 우리의 모습을 이렇게 여전히 세상 신이 되고 싶은 모습으로 폭로시키세요? 가면 벗으라고요. 가면 벗으라고. 우리는요, 죽은 흙이에요. 썩어 문드러진 시체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새 몸 바꿔주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걸 들키지 않으려고요. 예수님은 우리의 그 실체를 폭로시켜야 버려요. 뜯어 버려야 돼요. 그리고 이게 너야!라고 폭로시켜야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온 세상을 전부 마귀로 폭로시켜 버렸잖아요. "죽여라. 하느님을 죽여라! " 그게 다 마귀지 뭐예요. 하느님의 복음은 우리 안에 들어와서 바로 그런 역할을 해야 돼요. 그리고 "내가 바로 이런 존재구나. 난 어떡하지?" 어떡하긴 어떡해요. 예수님 붙들어야 돼요. 십자가 붙들으란 말이에요. 그리고 예수님과 친해지려고 애를 써야죠. 사돈의 팔촌이 장관이 돼도 그 사람과 어떻게 친해져 보려고 애를 쓰면서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예수가 우리와 관계있는 이라는데 왜 그분과 친해질 생각을 안 하시냔 말이에요.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제발 더 많이 경험하시고 더 많이 배우세요.
우리 전래동화 중에 그런 거 있죠? 어떤 왕자가 왕궁에서 손톱을 깎다가 그 손톱 깎은 거를 쓰레기통에 그냥 싸지 않고 버렸더니 생쥐가 그 손톱 깎은 걸 먹고 왕자의 모습으로 변했어요. 예? 이건 뭐 어떤 사람이 손톱 깎은 건 꼭 싸서 버리자,라는 캠페인을 하려고 만들었는 얘기 같은데. ^^ 그리고는 들어와 갖고 왕자보다 더 왕자다운 삶을 사는 거예요. 근사하게. 결국은 이 진짜 왕자가 쫓겨났어요. 그래서 그지 꼴이 돼 버렸어요. 근데 그 왕자가 어떤 도인의 도움으로 사실은 그놈이 생쥐니까 고양이를 갖다가 풀어라. 그래갖고 고양이를 갖다가 왕궁에 풀었더니 그놈이 갑자기 손톱 먹은 생쥐로 싹! 변해요. 그 고양이 역할을 하는게 십자가입니다. 복음이에요. 우리는 굉장히 근사한 모습으로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그분을 밀어내요. 내가 하느님보다 더 깨끗해. 더 착해. 더 정의로워. 이 세상을 더 걱정해 내가 하느님보다. 가난한 이들을 보면은 눈물이 나서 눈알이 빠질 것 같아. 순 사기꾼들. 근데 십자가가 확 들어왔더니 완전히 썩어 문드러진 시체로 드러나 버리는 거예요. '아니네~?' 내 안에서 성령이 그 일하시는 겁니다. "너희에게 왜 예수가 필요한지 알아? 너희에게 왜 복음이 필요한지 알아? 너희는 손톱 먹은 생쥐야. 그런데 왜 너희들이 하느님 흉내 내고 그래?" 그게 선악과 먹은 아담 아닙니까, 그렇게 내가 폭로되고 예수의 은혜로 채워지게 되면 내 안에서 예수의 삶이 나와야 되는 거예요. 예수가 나오는 거지, 내가 나에게 점수를 주는 일은 절대 내 천국행에 도움이 안 돼요. 그러니까 '오직 예수'예요. '오직 은총', 'only by grace', 우리의 그 어떤 것도 진리와 길이요 생명이 될 수가 없어요. 예수만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에요.
거기에서 하느님이 영광 받는 거예요. 왜 하느님이 착한 일 한 사람한테 '너 니 영광 니가 취하면은 너 하늘에서 니 영광 없다'라고 초를 치는지 아십니까? 그런 거 하지 말라는 거예요. 불가항력적으로 풍기는 향기는 어쩔 수 없지만 일부러 내가 다른 이들에게 향기를 풍기려고 하는 그런 것들은 악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의 죄로 인해 예수가 채찍에 맞았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허물을 인해 예수가 상함을 입었어요.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 예수를 치고 십자가에 달은 자가 누구예요. 나잖아요. 지금도 채찍으로 치고 있잖아요. 우리의 죄를 인함이라면서요. 근데 우린 계속 죄짓고 있잖아요. 그럼 지금 우리가 예수를 뚜들겨 패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근데도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보면서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 눈물 흘리는 게 얼마나 가증스러워요. 자기가 계속 치고 있으면서. 그 뚱뚱한 그놈 이름 뭐예요? 그... 로마 병정으로 나온 그놈. 아주 걔는 얼굴도 보기 싫어요, 이제. 걔를 보면서 얼마나 미워했어요? 그게 '나' 라니깐요? 내가 고 자리에서 예수를 때리고 있는 거예요. 예수의 창자가 밖으로 터져 나오고 있어요. 내 죄 때문에. 그리고 그분을 십자가에 단 게 '나' 란 말입니다. 근데 누구를 욕하고 있냐고요. * 예수님은 이 땅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런 거지꼴로 서 있는 예수님의 모습처럼 은닉되어져 오세요. 우리의 모든 소원을 척척 들어주고 우리가 원하는 걸 다 고쳐주고 야망과 비전을 성취해 주고 하는 그런~ 대단한 왕의 모습으로 오는 게 아니라 홍포 입고 머리에 가시관 쓰고 맞아 죽는 모습으로 온단 말입니다. 그 은닉되어 있는 예수님. 그분이 감추어져 있고 은닉되어져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분을 여전히 죽인다면 성도 아니죠. ◀ 예수님은 이 몽룡, 거지꼴을 한 이 몽룡처럼 오시는 거예요.
근데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금준미주옥반가 효청루낙시 운운하는 시를 알아먹고 냅다 도망가는 거예요. 어디루, 십자가루. 모르는 놈들은 '야, 저 거지새끼 쫓아내고 기생들이나 더 불러라~' 이렇게 신나게 놀다가 능지처참 당하는 거예요, 거기서. 예수님은 암행어사 이 몽룡으로 오는 게 아니라 거지꼴 한 이 몽룡으로 오신단 말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들만 그들을 알아볼 수 있어요. 우리가 그 예수를 알아본다는 건 지금 거지꼴을 하고 있는 남루한 우리의 현실을 수긍하고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그게 우리 안에 오신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분이 왕이에요. 거지꼴 한 이 몽룡이 왕인 거예요. 세상에 빌라도같은 그런, 카이사르같은 그런, 화려한 왕들 그들 권세들? 쫓아가지 마세요. 빌라도 그 후 6년 있다가 총독 자리에서 짤렸고 칼리굴라 때 자살했어요. 그 왕되신 예수님의 권세 앞에서 '내가 널 죽일 수도 있어. 놓아줄 수도 있어.' 했던 그 가짜 권세. 결국 자살로 끝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가 진짜 권세예요. 그분이 왕이에요. 그분이 지금 여러분 앞에 초라한 홍포를 입고 실컷 두들겨 맞은 연약한 모습으로 손을 내밀고 있을지 몰라요. 그때 그 손 뿌리치시면 안됩니다. 그게 우리 현실인 거예요. 지금의 현실.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왕을 달라고 하느님을 속 썩였죠? 그때 사무엘이 뭐라 그럽니까? '하느님, 저놈들이 왕 달라는데 어떡하죠?' 그랬더니 하느님이 '저들이 너를 버린 게 아니라 나를 버렸다.' 오늘날 교회가 하느님을 왕 취급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의 가치들을 왕 취급하여 "다른 왕 주세요." 하고 있잖아요. 그게 하느님 버리는 거라니까요. 근데 그게 무슨 예수 믿는 겁니까. 하느님 버리는 거라는데. 하느님이 직접 말씀하시는데~.. 순 사기꾼들이죠. 맨 가짜들이 성도라고 너스레를 떨고 있는 거예요. 사무엘상 8장에 보면은 하느님이 분명히 경고하세요. '너희들, 세상 왕- 그거 추구하다 보면 그 세상 왕들이 너희들을 어떻게 착취하는지 아니?' 라고 하면서 사무엘을 시켜서 다 얘기해 주라고 그래요. 근데도 불구하고 왕을 세워달라 그러니까 하느님이 세워 줘라. 그러고 사울 세우는 거예요. 사울한테 직싸게 뚜들겨 맞죠. 그게 세상 왕이에요.우리 왕은 초라한 거지꼴을 하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에게 은닉되어 있는 모습으로 손을 내미세요. 그때 우리는 믿음으로 그 손 잡아야 돼요. 요담의 비유 나오죠? 그 기드온의 막내 아들. 그 막내 아들이 아비멜렉이라는 형이 형제 70명을 전부 죽이고 아버지 왕위를 찬탈해버리잖아요? 그때 요담, 막내 요담이 뭐라 그래요. 여러 가지 나무 비유를 대면서.. 가시나무에게 가서 그들의 왕이 돼 달라고 했더니 가시나무가 왕이 되어 주면서 뭐라 그랬다 그래요? '내 그늘에 숨어라. 안 숨으면 불을 내서 다 죽여버린다~.' 그게 세상 왕입니다. 그 그늘에서 그가 조종하는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세상 왕은 여러분을 태워요. 죽입니다. 거기에 놀아나지 마세요.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진짜 애통한 마음을 갖고 계세요? 그 애통한 마음이 있어야 돼요. '애통한 자는 복이 있나니' 에서 애통함. 그게 뭡니까.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거기에서 아들 잃었던 어떤 분이 인터뷰를 했었어요. 뭐라고 그분이 그러시냐면, 울부짖으면서, 이렇게 세상에 악한 인간들이 많은데 왜 하필 내 아들, 그 착한 내 아들이냐구. 엉엉 우는데 이 세상에 그렇게 악한 놈들 많은데 그놈들은 하나두 안 죽고 왜 하필 착하디 착한 내 아들이냐구우- 그게 애통함입니다.왜 세상에 좀비같은 인간들 때문에 왜! 그 예수가 죽어야 되냐구. 그 마음이 우리 마음에 있어야 돼요. 그것을 알기 위해선 내가, 예수를 죽인 내가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를 여러분 자신에게 폭로당하셔야 돼요. 그리고 그걸 확실히 아셔야 돼요, 다른 사람 안에서 찾을려고 하지 말고 내가 얼마나 악당인가를 찾아 보세요. 하느님이 보여주실 거예요. 근데 어떻게 나는 살아있고 예수가 죽었냐구.. 그 애통한 마음이 있어야 돼요. 그때! 그 돌아가신 예수를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거예요. 그 착한 아들 보내놓고 얼마나! 원통한 눈물을 흘렸겠어요, 그 아버지가.. 그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게 우리의 애통이에요. 그게 성도에게서 흘러야 할 눈물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사랑하셔야 돼요... 이 세상에서 딴 거 할 거 없어요. 대단한 업적, 공로? 이딴 거 신경쓰지 마세요. 하느님이 알아서 챙겨가실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세요. 예수를 사랑하세요. 그분의 은혜의 깊이를 더욱더 깊이 체험하세요. 배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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