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20년 5월 10일[(백) 부활 제5주일] | |||
---|---|---|---|---|
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20-05-10 | 조회수1,281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20년 5월 10일 주일 [(백) 부활 제5주일] ◎제1독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았다.>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4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테파노,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출신 니콜라오스를 뽑아,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화답송◎ 시편 33(32),1-2.4-5. 18-19(◎ 22 참조) 바라는 그대로 자애를 베푸소서. 올곧은 이에게는 찬양이 어울린다. 비파 타며 주님을 찬송하고, 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불러라. ◎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자애를 베푸소서. 그 하신 일 모두 진실하다. 주님은 정의와 공정을 좋아하시네. 그분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자애를 베푸소서.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 건지시고, 굶주릴 때 살리려 하심이네. ◎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자애를 베푸소서. ◎제2독서◎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입니다.> 4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 선택된 값진 모퉁잇돌이다.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 돌이 값진 것입니다. 되었네.” 하는 그 돌이며, 돌과 걸려 비틀거리게 하는 바위”입니다. 그들은 정해진 대로,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그 돌에 차여 넘어집니다.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복음환호송◎ 요한 14,6 참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복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복음입니다. 14,1-12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일이 없도록 하여라. 거처할 곳이 많다.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그 길을 알고 있다.”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보아서라도 믿어라. 너희에게 말한다. 일을 할 뿐만 아니라,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영성체송◎ 요한 15,1.5 참조 나는 참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알렐루야. ◎오늘의묵상◎ ‘어떻게 …….’ ‘어떻게 …….’ 토마스는 ‘어떻게’에 묶여 있습니다. 토마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실은 예수님 그분 자체입니다. ‘어떻게’는 토마스가 아니라 예수님의 일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어떻게’를 찾아 나서는 것은, 지도도 없이 미지를 탐험하는 일과 같습니다. 토마스와 필립보는 자기 경험과 지식의 한계 안에서 예수님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실은 자신을 개방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한계 때문입니다. ‘머물다’입니다. 함께 머무는 것은 경험과 이해의 사전 지식이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말 못하는 강아지나 고양이와도 함께 머물 수 있는 우리 사람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함께 머물기가 그리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이 자문해 봅니다. 말이 통하고 뜻이 통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 사이에,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통하지 못하는 갈등의 시작이 될 수 있음을 뼈저리게 반성합니다. 미워할 수 있다.’라는 말은 신앙생활 안에서도 되짚어 보아야 할 말입니다. 예수님을 너무 믿고, 너무 의지해서 함께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이 꿈꾸는 예수님, 자신이 갈망하는 예수님이라는 우상을 부여잡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말을 다 들어 주신다는 믿음은 예수님께서 이런 죄인 안에서도 자유로이 당신의 뜻을 온전히 펼치실 수 있을 때 터져 나오는 감사와 감탄의 행위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작 우리의 편협한 뜻을 이루시려고 육화하시고 우리와 함께 머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유로우실 수 있도록 예수님 앞에서 조용히 침묵하는 시간을 가져 보아야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