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20년 6월 13일 토요일[(백)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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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20-06-13 | 조회수1,600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20년 6월 13일 토요일 [(백)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안토니오 성인은 1195년 포르투갈 리스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를 거쳐 성 십자가 수도회에서 생활하다가 사제가 되었다. 성인은 모로코에서 최초로 순교한 다섯 명의 작은 형제회 수사들의 유해가 포르투갈에 도착했을 때 깊은 감명을 받아, 아프리카 선교의 꿈을 안고 수도회를 작은 형제회로 옮겼다. 선교사로 모로코에 파견되었다가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탁월한 설교로 파도바의 많은 이를 주님께 이끌었다. 그러나 1231년 열병으로 36세의 젊은 나이에 선종하였다. 안토니오 성인은 이례적으로 선종한 이듬해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들었다. 제1독서 <엘리사는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나섰다.> 19 길을 가다가 사팟의 아들 엘리사를 만났다.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는데, 그 자신이 부리고 있었다. 지나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그냥 두고 엘리야에게 달려와 이렇게 말하였다. 작별 인사를 한 뒤에 무엇을 하였다고 그러느냐?” 돌아가서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따라나서서 그의 시중을 들었다. 화답송 시편 16(15),1-2ㄱ과 5.7-8.9-10(◎ 5ㄱ 참조)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주님께 아뢰나이다. “당신은 저의 주님.” 주님은 제 몫의 유산, 저의 잔. 당신이 제 운명의 제비를 쥐고 계시나이다. ◎ 주님, 당신은 제 몫의 유산이시옵니다. 주님 찬미하오니, 한밤에도 제 양심이 저를 깨우나이다. 언제나 제가 주님을 모시어, 당신이 제 오른쪽에 계시니 저는 흔들리지 않으리이다. ◎ 주님, 당신은 제 몫의 유산이시옵니다. 제 영혼 뛰노니, 제 육신도 편안히 쉬리이다. 당신은 제 영혼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구렁을 보지 않게 하시나이다. ◎ 주님, 당신은 제 몫의 유산이시옵니다. 복음 환호송 시편 119(118),36.29 참조 당신 법에 제 마음 기울게 하소서. 자비로이 당신 가르침을 베푸소서. 복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복음입니다. 5,33-37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영성체송 마태 24,46-47 참조 보실 때에 깨어 있는 종! 주님은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기시리라.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맹세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수도자나 성직자들은 서원식 또는 서품식 때에 서약을 합니다. 또한 평신도들도 세례 때에 서약을 합니다. 그렇다면 맹세를 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리스 말 ‘옴뉘오’는 ‘절대자이신 하느님을 근거로 자신이 진실하다고 주장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사람이 맹세를 할 때에도 이 낱말을 사용하지만, 신약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를 합니다. (루카 1,73; 히브 3,11; 6,13 참조). 맹세를 하는 경우가 두 번 있습니다. 한 사람은 헤로데로서, 헤로디아의 딸에게 왕국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맹세를 합니다(마르 6,23 참조) 다른 한 사람은 베드로인데, 예수님께서 체포되시어 대사제의 저택에 끌려가셨을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면서 맹세를 합니다(마르 14,71 참조) 이렇게 볼 때 맹세를 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하느님을 이용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하늘, 땅, 예루살렘을 두고 맹세를 하기에 사람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임을 깨달으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하느님을 이용하여 우리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 한다면, 이는 하느님 앞에서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그저 우리의 참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에는 “예.”라고 응답하고, 그분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것에는 “아니요.” 라고 순명하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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