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20년 6월 20일 토요일[(백)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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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20-06-20 | 조회수1,746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20년 6월 20일 토요일 [(백)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성모 성심 공경은 17세기 프랑스 출신의 요한 외드 성인에게서 비롯되었다. 이는 예수 성심을 공경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다. 성모 성심 공경은 19세기에 별도로 날을 잡아 기념하기 전까지는 예수 성심 미사에서 기억하는 형태로 전례 안에 들어왔다. 1942년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님의 파티마 발현 25주년을 맞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세상을 봉헌하고, 이 기념일을 온 교회가 지내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8월 22일이 기념일이었는데, 1996년부터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날로 옮겨 지내고 있다. 제1독서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리라.> 9 후손은 민족들 사이에, 가운데에 널리 알려져 그들이 주님께 복 받은 종족임을 알게 되리라.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정원이 싹을 솟아나게 하듯 의로움과 찬미가 솟아나게 하시리라. 화답송 1사무 2,1.4-5.6-7.8ㄱㄴㄷㄹ (◎ 1ㄱ 참조) 제 마음 기뻐 뛰나이다. 주님 안에서 제 얼굴을 높이 드나이다. 당신의 구원을 기뻐하기에, 제 입은 원수들을 비웃나이다. ◎ 저의 구원자 주님 안에서 제 마음 기뻐 뛰나이다. 비틀거리던 이들은 힘차게 일어선다. 배부른 자들은 양식을 얻으려 품을 팔고, 배고픈 이들은 더는 굶주리지 않는다. 아이 못낳던 여자는 일곱을 낳고, 아들 많은 여자는 홀로 시들어 간다. ◎ 저의 구원자 주님 안에서 제 마음 기뻐 뛰나이다. 저승으로 내리기도 저승에서 올리기도 하신다. 주님은 가난하게도 가멸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높이기도 하신다. ◎ 저의 구원자 주님 안에서 제 마음 기뻐 뛰나이다. 일으켜 세우시고, 가난한 이를 잿더미에서 들어 높이시어, 존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 저의 구원자 주님 안에서 제 마음 기뻐 뛰나이다. 복음 환호송 루카 2,19 참조 당신은 하느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셨나이다. 복음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복음입니다. 2,41-51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끝나고 돌아갈 때에 그대로 남았다.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그를 찾아냈는데,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영성체송 루카 2,19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네. 오늘의 묵상 사제품을 받고 나니 제 어머니의 귀가 세 배는 커지신 것 같고, 아버지의 시력도 두 배는 좋아지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본당에서 어떤 강론을 하였으며 요즘에는 무슨 일로 바쁜지,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는지 속속들이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행동과 말도 늘 조심하십니다. 한번은 수도자나 성직자들이 주로 바치는 성무일도를 어떻게 바치는지를 물어보기도 하셨습니다. 제가 부르심을 받아 사제가 된 것이지만 부모님도 덩달아 그 삶의 일부를 떠안고 계시는 듯합니다. 숙명과도 같은 삶을 생각해 보면, 왜 교회가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날 성모님을 기억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 역시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시고 예수님의 길에 함께하셨습니다. 생애를 상징적으로 잘 드러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잃어버리십니다. 성모님께서 세상 사람들의 길을 따라 걸으시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러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찾아나서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만이 삶의 의미가 있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머무르셔야 할 자리에 함께 머무시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마치 사제의 부모가 사제가 머물러야 할 하느님의 현존에 함께하듯이 말입니다. 자식을 바라보며 사셨기에 예수님의 길을 함께 걷게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닮은 분이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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