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20년 6월 24일 수요일[(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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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20-06-24 | 조회수2,177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20년 6월 24일 수요일 [(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세례자 요한은 사제였던 즈카르야와 성모님의 친척인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세례자 요한은 주님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은, 구약과 신약을 이어 주는 위대한 예언자이다. 그는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라고 고백하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임금의 비윤리적 생활을 책망하다가 헤로데 아내의 간계로 순교하였다. 그는 ‘말씀’이신 주님의 길을 준비한 ‘광야의 소리’였다. 제1독서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화답송 시편 139(138),1-3.13-14 ㄱㄴ.14ㄷ-15(◎ 14ㄱ)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잘 아시나이다. 앉으나 서나 당신은 저를 아시고, 멀리서도 제 생각 알아차리시나이다. 길을 가도 누워 있어도 헤아리시니, 당신은 저의 길 모두 아시나이다. ◎ 오묘하게 지어 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어미 배 속에서 저를 엮으셨나이다. 오묘하게 지어 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당신 작품들은 놀랍기만 하옵니다. ◎ 오묘하게 지어 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제가 남몰래 만들어질 때, 땅속 깊은 곳에서 짜일 때, 제 뼛속까지 당신께 드러났나이다. ◎ 오묘하게 지어 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22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나의 뜻을 모두 실천할 것이다.’ 하고 증언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보내셨습니다.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선포하였습니다.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경외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복음 환호송 루카 1,76 높으신 분의 예언자 되어 주님에 앞서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라. 복음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복음입니다. 1,57-66.80 차서 아들을 낳았다.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달라고 하여‘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정신도 굳세어졌다.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영성체송 루카 1,78 베푸시니, 떠오르는 태양이 높은 데서 우리를 찾아오셨네. 오늘의 묵상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아기의 이름을 즈카르야가 아니라 요한이라고 짓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즈카르야라고 부른다면 당시 관례를 따르는 것입니다. 반면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부른다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즈카르야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은 아버지처럼 사제가 되어 명망을 얻고 존경받으며 안정된 삶을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 요한의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언자가 되어 명망과 존경보다는 박해를 받고, 기득권의 삶보다는 광야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는 이 두 가지 갈림길에서 주님의 뜻을 따르고 있습니다. 배 한 척이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선장이 갑판 위에서 보니 어떤 불빛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장은 확성기에 대고 외쳤습니다. “여보시오. 남쪽으로 10도를 회전하시오.” 그러자 저쪽에서 즉각 반응이 왔습니다. “그 배가 북쪽으로 10도를 회전하시오.” 선장이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외쳤습니다. “이 배는 거대한 함정이란 말이요. 그쪽이 움직이시오.” 그러자 상대편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쪽이 움직여야만 하오. 이곳은 섬이고 나는 등대지기요!” 배가 움직여야만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도 그러합니다. 우리의 뜻대로 하느님께서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에 맞게 우리가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느님께서 움직여 주시기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지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움직인 즈카르야는 혀가 풀려 찬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할 때 우리 삶 또한 찬양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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