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20년 7월 11일 토요일 [(백)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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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20-07-11 | 조회수1,976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20년 7월 11일 토요일 [(백)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라 불리는 베네딕토 성인은 480년 무렵 이탈리아의 중부 지방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학업을 마친 그는 수도 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동굴에서 3년 동안 고행과 기도의 은수 생활을 하였다. 그의 성덕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자 베네딕토는 마침내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서방에서 처음으로 수도회 규칙서에 공동생활의 규정을 제정하였다. 이 규칙서는 수도 생활의 표준 규범서로 삼을 정도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베네딕토 아빠스는 547년 무렵 몬테카시노에서 선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은 그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제1독서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인데,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서,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뒤흔들리고 성전은 연기로 가득 찼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7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화답송 시편 93(92),1ㄱㄴ.1ㄷ-2.5(◎ 1ㄱ) 주님이 차려입고 권능의 띠를 두르셨네. ◎ 주님은 임금님, 위엄을 입으셨네. 흔들리지 않네. 예로부터 주님 어좌는 굳게 세워지고, 영원으로부터 주님은 계시네. ◎ 주님은 임금님, 위엄을 입으셨네. 당신 집에는 거룩함이 서리나이다. 주님, 길이길이 그러하리이다. ◎ 주님은 임금님, 위엄을 입으셨네. 복음 환호송 1베드 4,14 참조 당하면 너희는 행복하리니 하느님의 성령이 너희 위에 머물러 계시리라. 복음 <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복음입니다. 10,24-33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더 심하게 하겠느냐? 두려워하지 마라.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영성체송 루카 12,42 참조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세우셨네. 오늘의 묵상 성경에서 말하는 두려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많은 경우에 경외로 표현합니다. 하느님을 경외함은 “영광과 자랑”이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물”이며 “지혜의 뿌리”로 표현됩니다. (집회 1장 참조) 반면에 다른 두려움은 세상에 대한 것입니다. 근심은 걱정을 낳고 걱정이 심해지면 두려움으로 바뀝니다. 세상에서 오는 두려움은 우리 자신을 속박하고 성장하지 못하게 합니다.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두려움이라는 같은 말이지만 그 결과는 사뭇 다릅니다. 같은 두려움이지만 다른 두려움입니다. 하나는 우리를 위축시키고 겁먹게 하는 두려움이지만, 다른 하나는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두려움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시작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하기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그 약함은 하느님을 찾고 그분께 의탁하게 합니다. 약한 것이 문제라기보다 그것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향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분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 사랑을 실천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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