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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앙인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7-17 조회수2,087 추천수1 반대(0) 신고

사람은 태어나면 한 번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 세상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세상에 죽음만큼 공평한 사실은 없다고 생각한다. 가난한자도 부자도 겪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한생애가 긴 것 같지만 풀잎에 내려앉아 맺혀 있는 초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해가 뜨면 사라지는 그런 존재이다. 풀잎 위에 있는 그 시간이 마냥 영원할 것처럼 살지만 실제로는 짧은 찰나의 삶을 살고 가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살다가 때가 되면 흙에서 왔기 때문에 언젠가는 한줌의 재가 되어 다시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는 게 자연의 이치이다. 어떻게 보면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에게 죽음은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면 세상과 또 다른 이별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법의학 교수가 한 말이 생각난다. 많은 죽은 사람을 접해본 경험에서 우러나온 삶에 대한 인생관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시험을 준비하지 않은 학생이 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듯이 죽음을 평소 준비하지 않아서 죽음을 맞이하면 죽음을 맞이하는 게 아니고 죽음을 당하는 것이라고 표현을 한 것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일생은 생로병사를 거치는 삶이다. 보통 일반적으로 사람은 건강할 때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게 일반적이다. 자신에게 죽음의 그늘이 다가온다는 걸 느낄 때 그제서야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때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만약 죽음이 죽음 그 자체로 모든 것이 끝나고 죽음 이후의 삶이 무와 같다면 굳이 죽음에 대해 그리 준비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신앙인에게는 아니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에게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또 다른 세상으로 옮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도 살면서 주거를 이전해서 다른 집으로 이사를 해서 사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마치 이럴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이 세상에 여행와서 잠시 머물다가 가는 나그네의 삶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나그네가 떠나면서 자기가 묵었던 집을 떠날 때 많은 애착을 가지고 떠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살 집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존재는 영육으로 이루어진 존재와 같다. 비유하자면 영혼에 육이라는 옷을 입고 있는 것과 같은 존재이다. 육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는 존재이다. 영혼은 유한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마치 영원한 존재가 유한한 존재와 함께 공생하다가 육신이라는 생명의 힘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영과 육이 이별하는 그 시점이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비단 지금은 신앙적인 측면에서 죽음을 바라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생명공학이 눈부시게 발달한 시점에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전에는 미지의 학문이었지만 지금은 예전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고 계속 이런 분야에 대해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희미한 빛이지만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도 이젠 학문적으로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게  지배적인 사실이다. 불과 반 세기 전만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젠 어쩌면 신앙인이라는 말에 대한 정의도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단순한 정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젠 시대가 하루가 멀다하고 급변하게 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시대에서는 단순이 신앙의 존재 유무로만 신앙인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을 듯하고 본다. 가톨릭 신앙 안에서 신앙인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그런 신뢰 속에서 하느님 말씀대로 살려고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이지만 부단히 노력하는 자세로 믿음을 가지고 노력해야 진정 올바른 신앙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따라가는 신앙인에게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할까를 고민해본다면 무엇이 있을까?

 

실제로 예전에 통계를 본 적도 있지만 가톨릭 신앙을 갖고는 있지만 사후의 세계에 대해 성경에서 말하는 그런 세계가 존재할지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믿음 생활을 하는 사람의 통계수치를 보고서 아연질색을 할 정도로 믿기지 않았다. 실제 그 통계수치가 사실이라면 왜 그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는지에 대해 의구심이 들 정도인 것이다.

 

이런 모든 사실을 감안해서 만약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에게 신앙인이라는 정의를 다시 정의한다면 단순히 하나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신앙인이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지금 이 시대에서 신앙인이라는 정의를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이 세상의 삶보다 영혼의 세계가 있다는 확고한 믿음 아래에 그 세계에 사는 데에 합당한 영혼이 되기 위해 준비를 하는 사람이 가톨릭이라는 신앙 안에서 신앙인이라고 해야 모름지기 진정한 신앙인이라고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세상을 살면서 현세의 삶을 도외시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현세의 삶을 도외시하는 건 더더욱 신앙인의 삶이 아닐 거라고 본다. 다음 삶을 더 잘 살기 위해서는 현세의 삶에 더 충실해야 다음 생에서 영혼의 삶이 더 충만한 삶이 될 거라고 본다.

 

현세의 삶에 충실하다는 것이 마치 세상에 대해 미련과 애착을 가지는 게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 세상은 현세와 내세를 이어주는 징검다리와 같다고 본다면 어떨까 싶다. 징검다리가 있어야 다음 삶으로 딛고 갈 수 있는 발판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발판이 튼튼해야지 안전하게 건널 수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현세의 삶을 충실하게 보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속에 살면서 어떻게 해야 신앙인으로서 삶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일까? 모든 사람이 수도자, 성직자처럼 살 수가 없을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수도자처럼 살게 된다면 이 세상은 종말이 되고 말 것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하느님 말씀과 배치가 되는 말씀일 것이다.

 

결국은 수도자와 성직자는 그분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추구하는 게 그분들에게 합당한 신앙일 것이고 일반인에게는 일반인에게 맞는 신앙이 있을 것이다. 그건 바로 세상에 살지만 세속에 물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사는 것일 것이다. 세상에 산다고 세속에 물드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얼마든지 마음 먹기에 따라 몸은 세상에 살아도 세속에 물들지 않고 철저히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려고 하는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유한한 이 세상에서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자기의 영혼을 잘 간직해 육신이라는 옷을 벗는 날 나비처럼 애벌레에서 허물을 벗고 환골탈퇴되어 원래의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에 부합한 삶을 살다가 무사히 원래 우리의 고향으로

잘 돌아가려고 힘쓰는 게 오늘을 사는 현대인이 가져야할 신앙인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목적지는 유한한 이 세상이 아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한한 이 세상이 주는 유혹에 붙들려서 내 영혼이 장차 가게 될 영혼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면 모를까 신앙을 가지고 있는 신앙인이라면 더더욱 어떻게 살아야 진정한 신앙인의 삶인지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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