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는 지금 제대로 된 양식을 먹고 있는가? (마태복음 6: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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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20-08-12 | 조회수2,026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글 속에서 하나라도 건지시기를 빕니다. (공동번역성서) 나는 지금 제대로 된 양식을 먹고 있는가? (마태복음 6:11) 11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이게 문자 그대로, 일용할 양식(糧食)을 구(求)하라는 기도라면, 우린 너무 많은걸 구하고 있는 거죠? ‘일용할’이란 말이 한국말로 하면 하루의 양식이죠, 하루에 쓸 양식! 그런데 하루에 쓸 양식만 구하십니까? 성도는 씨가 없는 자, 생명(生命)이 없는 자로 이 땅에 와서,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의 씨로 받아서, 아들이 되는 상태가 되면, 그들은 그 하늘들 안에, 그 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그 하늘들 안에 나를 낳는 진리의 말씀, 그 아버지를 갖게 되는 거고, 그 상태가 되는 거고, 그러면 그 이름, ‘쉠’은 말씀이라고 그랬습니다. 묵시록에서 분명히 그 말씀! 그 이름이 깨끗하게 ‘하기오스,’ 거룩하게 된 자들이고, 그것이 바로, 이 땅에서 흙에 불과한 나에게서, 그리고 이 역사, 이 크로노스의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그 하늘의 뜻 이라고 그랬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나라가 임하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우리의 상태라고 그랬습니다. 이미 이렇게 되어 있는 거죠. 그래서 그 하느님의 그 섬김. 그 진리의 섬김, 그 말씀의 섬김, 그 통치! 성경에서 사실 그 통치, ‘다스리다’라는 그런 개념은 없어요. ‘섬김’의 개념밖에 없어요. 하느님 나라에는 ‘다스림, 통치’가 ‘섬김’이에요. 그렇게 되면 그 말씀에 의해, 내가 섬김을 받게 되면, 그게 바로 내가 ‘나라’가 되는 거잖아요? 그게 ‘바실레이아’거든요 그게 ‘바실류스,’ 왕이라는 단어하고 어근(語根)이 같은데, 왕이라는 단어가 漢字도. 하늘, 땅, 사람, 이렇게 썼습니다, 원래 글자가. 그것이 하나로 통하면 왕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원래 이거는 일(1)이라는 숫자로 썼습니다. 옛날에는. (王)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 하나가 되면,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거예요. 자, 그래서 그렇게 우리가 그런 상태가 되려면, 우리에겐 그렇게 되기 위한 어떤 에너지, 양식(糧食)에 관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세요.’라고 기도를 하라고 그러죠. 다시한번 말씀 드리지만, 주의기도문의 모든 피티션(Petition)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그러나 동시에 아직 아닙니다)의 그 눈으로 봐야 하는 거라고 했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건데, 이 땅에서 우리는 그 완전한 것, 우리에게 주어진 그것을 간절히 바라는 자가 된다는 거죠. 그래서 전부 부정과거시제 명령형으로 동사가 쓰였다고 그랬어요.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시제라고 그랬습니다. 따라서 양식에 관한 것도,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대한 그런 확실한 긍정(肯定), ‘나에게 이미 주어졌어.’라는 그런 확실한 긍정과 그러한 긍정을 더욱 공고히 하는 간절한 구(求)함, ‘그렇죠! 그거죠! 그거 없으면 안 되는 거죠!’라는 이 구(求)함. ‘근데 그걸 나에게 주셨네요!’라는 그 긍정. 그렇게 봐야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양식을 주세요!’ ‘나에게 그 빵을 주세요!’ 그 양식이, ‘알토스, 빵’이거든요? 그러니까 빵, 양식, 같이 써요 그냥. 그 ‘빵 주세요, 양식을 주세요!’라고 기도를 할 수 있는 그런 이! 그런 이가 반드시 거치게 되는 과정이 뭐겠어요? 누가 양식을 달라고 그래요? 거지도 배부르면 양식 달라고 안 그럽니다. 당연히 ‘굶주림’입니다. 배고픔이에요. 지독하고 처절한 굶주림을 맛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먹을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게 아담들의 자존심이에요. 선악과 먹고 하느님처럼 된 아담들의 자존심(自尊心)! 그래서 주님은 ‘주린 자가 복이 있어!’ 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왜냐하면 절대로 주리지 않아요. 이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의 것들로 자기의 주림을 채우려고 하지, ‘나는 주린 자구나!’라는 것을 인정(認定)하려 들지 않아요. 그게 아담들의 속성(屬性)입니다. (루가복음 6:21) 21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여기 보면 ‘이제’라는 단어 ‘눈’이에요, ‘지금,’ ‘누니데.’ ‘그러나 지금에서 쓰인 그 단어 ‘눈!’ ‘지금 여기에서 굶주린 자가 복이 있다.’ 그래요. ‘지금’라는 말은, 크로노스의 이 역사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여기에서 자기들이 주린 자라는 것, 그런데 이 주림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그 다른 차원의 어떤 것이 오기 전에는, 굶주린 자일 수 밖에 없다는 것! 그걸 아는 자! 그자가 복 있다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나는 굶주린 자가 맞네요!’라고 인정하는 그 자가 복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지금’ 그 말은 ‘그날’이나 ‘그때’라는 개념의 반대적 개념으로 보시면 돼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굶주린 자들이, 하느님이 주시는 빵을 먹고, ‘그 날,’ ‘그 때’의 빵으로 양식을 먹고, 여기에서, 배가 부를 거예요. 물론 영적인 이야기인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서 내가 굶주린 자라는 걸 반드시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쎄메론’ 즉, ‘그 날의 양식을 구하라’라고 되어 있는 거예요. ‘쎄메론’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이라고, 거기서 ‘오늘날’이 오늘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 ‘쎄메론’이라는 단어는요, ‘그 날’, ‘그 때’의 양식이에요. 그러면, 여기의 양식은 아니라는 거죠 ‘이제 여기에서 굶주린 자는 복이 있다.’ 그랬으니까. 그러면, 그 사람들은 여기에서 양식은 못 찾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그 날, 그 때, 거기’의 양식을 찾게 되겠죠? 이게 ‘굶주린 자’라는 뜻이에요. 그들이 복이 있다는 거예요. 그 굶주림을 지금 경험하고 있냐고요. ‘아! 나는 그거 없으면 안 돼!’라는 그 굶주림.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느님은 의도적으로, 애굽에서 건져 내온 당신의 백성들을, 이 광야, 그냥 크로노스의 이 인생, 역사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걸 숫자로 바꾸면 40입니다. 그 광야에서 하느님이 일부러, 의도적으로 굶주리게 하고 목마르게 해버리셨어요. (신명기 8:2-3) 2 너희는 지난 사십 년간 광야에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어떻게 너희를 인도해 주셨던가 더듬어 생각해 보아라. 하느님께서 너희를 고생시킨 것은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킬 것인지 아닌지 시련을 주어 시험 해 보려고 하신 것이다. 3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고생시키시고 굶기시다가 너희가 일찌기 몰랐고 너희 선조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여 주셨다. 이는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 하느님이 광야에서 굶주리게 하셨다고 그래요. 근데 굶주려요? 지금 살을 어떻게 빼야 될까 고민 중이죠. 그러면 이 굶주림은 무슨 굶주림이겠어요? ‘사람이 빵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거다, 그게 양식이야!’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사람들을 굶주리게 만드셨다는 거예요. 당신 백성들을! 그러면 그 백성들은, 그 굶주림을 경험해야 되는 거죠? 그리고 인정(認定)해야 되는 거란 말이에요. (아모스 8:11) 11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내릴 날이 멀지 않았다. - 주 야훼의 말씀이시다. 양식이 없어 배고픈 것이 아니요,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야훼의 말씀을 들을 수 없어 굶주린 것이다. 창세기에서도, 요셉이라는 인물이, 나중에 예수라는 아들을 낳는, ‘완성(完成)’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인물이 요셉이거든요? 그래서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요셉 넷! 거기에서 완성이 되는 거예요. 그럼 그 사람은 어떤 양식을 줄 수 있는 자가 되어야죠? 그래서 그 기근이든 애굽에서, 모든 양식을 그에게 맡기는 거예요. 그래서 그가 양식을 나누어 주게 만드는 거예요.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뭐, 하느님의 뜻대로 열심히 성실히 살았더니, 세상의 양식을 관장하는 사람이 되더라는 것엔 성경은 관심이 없어요. 성경은 이 양식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요셉을 통해서도. 그렇다면 성도는 이 광야(曠野) 인생길에서, 말씀이라는 양식! 하늘의 빵이라는 그 양식에 굶주려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그 날의 그 양식을 나에게 주세요!’라는 기도를 할 수 있단 말입니다. 그렇게 그 기도를 할 수 있는 이들을, ‘마음이 가난한 자’ ‘그거 없으면 나 죽어요!’가 ‘푸토코스’라고 그랬습니다. ‘페네스’는 상대적(相對的) 가난(家難), ‘푸토코스’는 절대적(絶對的) 가난. 그 성령 안에서, 말씀 안에서, 진리 안에서, 정말 가난한 자! ‘그거 없으면 나 죽어요!’라는 것을 인정하는 그자가 ‘푸토코스’한 자! 그가 복이 있다고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 하느님의 말씀에 굶주려야 하는 게 성도인데, 성경은 그 말씀, 그 진리를, 또 ‘의(義)’라고도 해요. (마태복음 5:6) 6 옳은 일(義)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조금 전에는 ‘말씀’에 굶주리는 자는 복이 있다, 그랬어요. 그걸 ‘의(義)’라고 이야기 한단 말이에요. 성도는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에 굶주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목말라야 하는 거예요. 하느님은 이 역사의 굶주림을, 말씀에 대한 굶주림이라고 그랬어요. 역사가 이렇게 어둡고, 이렇게 추악하고, 이렇게 공허한 건 말씀의 굶주림 때문이지, 그걸 너희들의 힘과 노력으로 채울 수 있는 굶주림이 아니라는 걸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말씀에 대한 굶주림, 그 말씀을 성경이 ‘의’ 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반대로, 인간들이 그 말씀이 아닌 그 진리, 그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닌, 인간 측에서의 어떤 것들을 동원(動員)하여, 인간들의 그 굶주림을 채우려고 하는 모든 시도(試圖)와 나타난 현상이 다 뭐라는 거예요, ‘죄(罪)’라는 거예요. ‘죄’라는 건, 그냥 도덕적, 윤리적, 사회법적, 인간들이 합의하여 그건 악한 거니까 하지 말자고 금한 걸 해버리는 걸, 죄라고 하지 않아요. 적어도 성경은. 물론 그런 것들도 죄죠. 인간이 행하는 것 중에 죄 아닌 게 어디 있습니까? 죄인데, 진짜 성경이 말하는 ‘죄’라는 건 하느님이 하늘의 그 진리를, 우리에게 그냥 못주세요. 왜냐하면 현상계(現象界), 이 물질계(物質界)는 초월적(超越的)인 그 세계의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없어요. 그러면 하느님은 그 것(그 진리)을 주기 위해, 이 땅의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피조세계가 가지고 있는, 가장 흔한 어떤 것을 들어서, 그 진리를 설명 해주셔야 돼요. 하느님께서 이 아래의 것, 그 하늘 아래의 것을 들어, 그 위의 것을 설명해 주기 위해, 나타난 현상, 형상으로 준 모든 것 들을 통해서 하늘의 것을 알아야 되는데, 그냥 그 아래의 것들에, 보이는 것들에 묶여 있으면, 그걸 ‘죄(罪)’라고 그래요. 성경이요. 이 죄! 그 아래의 것을 통해서, 위의 것을 알아 버렸어요. 그러면 그걸 ‘의(義)’라고 하거든요? 그러면 그 ‘의’라는 것을 알아 버린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 ‘죄’라는 건 없는 거네요? ‘의’를 가르쳐 주기 위해 ‘죄’를 준거니까. 그러면 ‘죄’가 없는 상태에서, 이 ‘의’라는 거는, 이게 개념이 통해요? ‘의’라는 게 뭐냐면, ‘죄’가 아닌 그것이 ‘의’거든요? 그러면 나에게 ‘죄’가 없으면, ‘의’를 알게 해주기 위해 하느님께서 아래의 것으로, 모형(模型)으로 주신 것이 ‘죄’라면, 그걸 알아 버렸어요. 그러면 그 ‘죄’라는 게 나와 아무 상관없어지면, 그걸 ‘용서(容恕)’라고 해요. 그러면 ‘죄’가 없는 상태에서 ‘의’도 없어요. 보세요, 그러면 ‘아담,’ 하느님은 아담을 통해서, 우리에게 아들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시려고 해요, 하느님의 백성이 뭔지를. 그런데 아담이 아래의 것, 사람에서 그냥 머물러 버리면, 그 상태를 ‘죄인’ 이라고 해요, 이거를. 근데 이 아담이, ‘아! 나의 부끄러움, 나의 존재의 완성은, 하느님이 친히 자신을 위하여 자신이 준비하신 그 제물에, 그 껍데기, 그 옷으로 가려야, 나는 비로소 죄인에서 벗어나, 의인이, 아들이 될 수 있는 거군요.’라고 알았어요. 그러면 이 아담은 ‘의인’이 되는 거예요 그 즉시. 그러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 이 죄는, ‘없는’ 거예요. 그냥 아들! 그 아들을 설명하기 위해,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그냥 나타난 형상(形象), 그 형상으로만 이해(理解)해버리면, ‘죄인’이고, 그것으로 그가 아들이 뭔지를 알았으면, 그걸 ‘의인’이라고 그래요. 근데 그 죄가, 개념이 없어진 상태에서는, 의인도 없다니깐요? 그냥 ‘아들!’ ‘그분!’이라고 하는 거예요. 자, 쉽게 말해서, 성도는 이러한 인간 세상의 악함과 공허와 추함과 어두움의 그 해결책은, 그 하느님의 말씀, 즉,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구하는 자로 살아야 된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그것은 진리의 영이 들어간 사람들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반응(反應)이요, 추구(追求)인거예요. 보편적 아담들은, 이 역사와 인생의 배고픔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열심히 달려요. 도덕과 윤리와 발전, 성숙, 번영, 평등, 평화, 뭐 이런 걸로, 역사와 인생의 배고픔을 채우려고 해요.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들의 힘으로! 성경은 그러한 보편적 아담들의 시도와 추구를, 뭉뚱그려서 율법(律法) 혹은 행위(行爲)라고 이름하고, 그걸 ‘죄(罪)’라고 한단 말이에요. ‘과녁을 벗어났네!’ 이렇게. 그건 헛배를 부르게 만드는 공갈빵 같은 거예요. 그럼에도, 인류는 그러한 것으로 이 역사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메뉴들을 개발하고 생산해내요. 공산주의나, 민주주의 같은 이데올로기, 교육, 종교, 과학, 문명, 선행체계, 지식체계 등을 생산해내고 창조해냅니다. 여러 가지 메뉴들을 개발하고 만들어서, 역사를 먹여요. 끊임없이! 인간들은. 그리고는 ‘배부르다!’하면서 자기들을 칭찬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배부른 자들은 복 받은 자 아니죠? 하느님이 이렇게 말씀하세요. (루가복음 6:25) 25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굶주릴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날이 올 것이다. (요한묵시록 3:17) 17 너는 스스로 부자라고 하며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네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주님은 지금 이 크로노스의 역사 속에서, 자기들이 배고픈 자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영원한 주림! 우리는 뭘 먹어야 그걸 에너지 삼아 사는데, 영원한 주림이라는 건 죽음이라는 뜻이에요. 그 영원한 죽음!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반면에, 이 세상에서는 그 어떤 땅의 소산(所産)으로도, 우리의 생명 양식을 삼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그런 영적 굶주림과 가난함 속에 있는 이들은, 하늘의 풍요(豐饒)로 채워져 있는 자라는 역설(逆說)을 던지신단 말이에요. (요한묵시록 2: 9) 9 '나는 네가 겪은 환난과 궁핍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너는 부요하다. 네가 유다인으로 자칭하는 자들에게 비방을 당하고 있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유다인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이다. 이 역사가 하느님의 말씀으로만 양식을 얻어서, 생명으로 이를 수 있다는 걸 아는 이들이, 실상은 하늘의 부요 가운데 있는 이들이라는 거예요. 근데 그러한 하늘의 부요에 반대편에 있는 이들이 누구라 그래요? 자칭 유대인이라고 그래요. 그걸 바울이 표면적(表面的) 유대인이라고 그랬죠? 율법주의 대표(代表)로 잠깐 등장했던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냐?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지’ 그랬단 말이라고요. 그 ‘이면적 유대인’ 안에는 우리도 들어가는 거죠? ‘하느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의미니까. 그 표면적 유대인, 율법주의의 대표로 등장 했던 그들을, 성경이, 하느님이 ‘사탄의 교회!’ 그래요. ‘사탄의 무리’라고 번역을 해놨는데, 그 무리(會)가 ‘수나고게’거든요? ‘회당! 교회!’란 말이에요. 교회는 교회인데, 사탄의 교회가 있어요. 사탄의 교회는 이 땅의 것들로 배 부르려고 하는 그런 자들이 모여 있는 그곳! 그리고 그게 신앙생활인 줄 알고 열심히 달려가는 그 사람들. ‘사탄’이라는 말이 ‘사타나스’가 그냥 ‘대적자’라고 그랬잖아요? 교회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전해서, 목적지를 잘못 잡게 만들어, 손에 손을 잡고 함께 달리는 거. 그걸 사탄의 교회라고 그래요. 중들은 아예 관심도 없어요, 우리한테요. 그리고 하느님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하느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니까요? 사탄의 회당은 교회에 있단 말입니다. 교회에!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엉뚱한 양식을 추구하고, 그 양식으로 배불리면, 그건 졸지에 사탄의 군대가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을 원문으로 보면, ‘호 아르토스 오고 호 에피우시오스 디도미 에고 쎄미론’이에요. ‘호 알토스’가 ‘그빵’이거든요? 그 양식! 헬라어나 히브리어에서는 가장 중요한 단어가 맨 앞에 온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주제는 뭐예요? 핵심 키는 ‘빵’이에요. 빵! 양식! 근데 그 빵은 ‘에피우시오스’의 빵이래요. 위의 양식인데, 어떤 양식이냐면, ‘위의 것으로 있는 양식!’이에요. 이게 ‘일용할 양식’의 ‘일용할’ ‘에피우시오스.’ 그런데 이렇게 써놓고 뭐라고 읽느냐면? ‘꼭 필요한, 생존을 위한’ 이렇게 읽어요. 그런 의미로 쓴다구요. ‘위에 존재하는 그것!’이라고 써놓고, ‘꼭 필요한 것!’ ‘생존에 필요한 것!’ 이런 의미로 읽는다구요. 그러니까 꼭 필요한 것! 생존을 위해 필요한건, ‘위에 있는 그것’이란 말이에요. 근데 이걸 진짜 의미는 모르고 그냥 ‘꼭 필요한 것!’ ‘생존에 필요한 것!’ 이렇게만 우리가 써버리면, 일용한 양식은 뭐예요? ‘에피우시오스,’ ‘호 알토스’는? 우리가 이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여기에서의 생존에 꼭 필요한, 그 양식을 주세요라는 말이 되죠?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청원을 갖고 그런 기도만 한단 말이에요. 내가 먹을 거, 내가 입을 거, 내가 마실 거, 이 땅에서 내가 필요한 그걸 주세요! 라고 기도한다니까요. 그럼 아예 그냥 확실하게 ‘오늘 것’만 구하던가. 그것도 아니잖아요? 만약에 이게 그런 기도라면, 바로 밑에 있는 이 구절과 충돌(衝突)을 하게 돼요. (마태복음 6:25) 25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바로 위에서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그러고, 바로 밑에서는 ‘뭐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마!’ 이게 말이 돼요? 예수님이 일구이언(一口二言)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성경자체가 충돌(衝突)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적어도 '일용한 양식'은 육적생존에 필요한 먹을 것과 마실 것은 아니지요. 이 부분을 아람어 성경으로 보면 ‘오늘 우리에게, 내일의 빵을 주소서!’라고 되어 있어요. 이 ‘내일’이라고 번역이 된 사용이 된, 아람어 ‘마헬’은 다가올 날, 차원이 다른, 이 시대가 아닌, 다른 세대의 그 날’이란 뜻이에요. ‘그 날의 빵으로 나에게 주세요!’ 그래서 그걸 ‘에피우시오스, 위에 있는 그 거!’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에피우시오스.’ 차원이 다른 그런 시대의 그 빵 이라는 말이죠. 아래의 빵이 아닌 위의 빵! 이 크로노스의 역사의 빵이 아닌 카이로스의 빵! 이런 말이에요. 그러한 내일의 빵에 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는 곳이 출애굽기죠? 거기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내일의 빵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빵이 내려오는데, 어떤 날은 내일의 것까지 함께 주신 적이 있었잖아요? (출애굽기 16:2-5) 2 이스라엘 백성의 온 회중은 이 광야에서 또 모세와 아론에게 투덜거렸다. 3 '차라리 에집트 땅에서 야훼의 손에 맞아 죽느니만 못하다. 너희는 거기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우리를 이 광야로 데리고 나와 모조리 굶겨 죽일 작정이냐?' 4 그러자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먹을 것을 내려 줄 터이니, 백성들은 날마다 나가서 하루 먹을 것만 거두어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해 보리라.5 여섯째 날 거두어 들인 것으로 음식을 차려 보면 다른 날 거두어 들인 것의 곱절이 되리라.' 육 일째에는 ‘내일의 양식’을 미리 준다, 그래요. 자, 내일의 양식, 안식일의 양식, 그리고 그 양식은 일용할 양식,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모세에게 ‘애굽에서 배불리 먹던 빵을 달라는 거예요 지금. 광야에서. 그리고 그 빵과 함께 먹었던 고기도 그리워해요. 고기, 가마 옆에서 앉아서 먹던 빵!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으세요? 20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 가마 옆에서 빵을 먹었던 기억(記憶)을 함께 공유(共有)하고 있어요. 그들이 모두 공히 고기, 가마 옆에서 빵을 먹지는 않았을 거 아녜요? 다 그렇게 뭐 똑같은 경험(經驗)을 하지 않았을 거 아닙니까? 근데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청원(請願)으로 이렇게 이야기 한단 말이에요. ‘고기, 가마 옆에서 빵을 먹었을 때의 그 빵’이라고 이야기 한다구요. 근데 이스라엘이, 적어도 광야에 나온 사람은, 전부 그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언제 입니까? 과월절(過越節)에~. 어린양을 잡아서, 뼈는 꺾지 않고, 그 고기를 다 먹으라 그랬어요. 다 먹고, 그것과 함께 누룩없는 빵을 같이 먹었죠? 쓴나물도 먹고. 그러면 고기, 가마 곁에서 앉아서 먹었던 그 빵은, 과월절의 그 고기와 그 빵을 이야기 하는 거겠죠?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고기 주세요, 했을 때, 그 고기는 과월절 어린양이라는 그 고기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전체가 공히 경험했던, 먹었던, 그리고 그리워하는 그 고기! ‘예수’라는 고기라는 거예요. 예수의 살! ‘어? 그럼 먹어야 되는 거 아닌가?’ 자, 그 육신의 빵과 그 육신의 고기! 어린양의 그 고기와 무교병을 육신의 고기! 육신을 위한 고기! 나를 위한 고기! 나의 구원을 위한 고기! 나의 육신을 위한 빵! 그걸로 그냥 받아먹으면 그건 죽음의 고기 죽음의 빵이 된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광야의 빵 즉, 만나를 그냥 만나로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라고 이야기 한 거란 말이에요. 하느님이 주긴 줘요. 주는데 그걸 의미로 먹지 않고, 빵으로만, 만나로만 받아먹으면 죽는다고 그러신다니까요? 만나라는 단어 뜻이 ‘이게 뭐야?’잖아요? 그러니까 모르고 먹으면 죽는다니까요? ‘What is this?’가 만나예요. 그러면 하느님의 말씀을 줬는데, 그걸 의미로 못 먹고, 그냥 율법으로 껍데기로 먹어 버리면, 그걸로 죽는다니깐요? 그래서 만나예요, 이름이. 그 만나는 하느님이 지은 이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지은 이름이에요. 왜? ‘이건 뭐야?’ 아무도 몰랐거든요. 그래서 만나예요. (요한복음 6:49) 49 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다 죽었지만 만나를 먹고 죽었다는 말이에요. 만나를 그냥 만나로 먹어버리면, 그걸 먹고 죽는다는 거죠. 만나는 하느님이 준거예요. 그걸 진의(眞義)대로 못 먹으면 죽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광야에서 주어지는 그 빵과 고기는, 육신을 살찌우고, 이 육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육신을 빛나게 하는 그런 빵과 고기여서는 안 되죠?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성숙시키고 변화 시키고, 가치있는 존재로 만드는데 사용되면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이 목적이 되면 안 돼요, 하느님의 말씀은. 그분의 사랑과 능력과 은혜를 깨닫는데에 도구로 쓰여야 되는 것이지, 나를 증명하고 나의 가치를 상승시키는, 도구로 사용되면, 그게 내 육신을 살찌우는 만나가 되어 버리는 거란 말입니다. 그건 내일의 빵 아니고 여기의 빵이죠? 그리고 그거 먹으면, 이 땅에서 배부르게 되는 거고. 그러니까 말씀을 육신으로, 법으로, 율법으로 받아 버리면, 그 사람은 그 말씀을 먹고 죽는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은 4절에서, 그 광야의 빵을 뭐라고 그래요? ‘내가 빵을 비같이 내리겠다’라고 하시는데, 그 ‘마타르레헴’이라는 단어는 ‘비로 내리는 양식’이라는 뜻이에요. ‘내가 너희들에게 만나를 주는데, 그 떡은 비로 주는 거야!’라고 이야기 한단 말입니다. 그건 그냥 빵이 아니라, 내가 그 빵을 비로 주는 거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게 ‘마타르레헴’이에요. (신명기 32:1-2) 1 '하늘아, 귀를 기울여라. 내가 말하리라. 땅아, 들어라. 내가 입을 열리라. 2 내가 전해 주는 말은 떨어지는 빗방울이요, 나의 말은 함초롬히 내리는 이슬, 소나기가 되어 풀밭을 적시고, 가랑비가 되어 푸성귀에 내린다. 비는 뭐예요? 진리의 말씀이예요. 그러면 하느님이 주는 그 빵! 그 예수! 그 양식을! 그 말씀을! 그 성경을! 진리의 비로 받지 못하고, 그냥 나의 유익을 위한, 나를 증명하기 위한, 그런 양식으로 받으면, 너희는 그거 먹고 죽는다는 거예요. 그럴 거면 차라리 절에 가세요. 달마사로 가시던지. 관음사로 가던지.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만나를 비로 내리시는데, 그걸 비로 받지 못하면, 그 비에 맞아 죽어요. 그게 노아의 홍수 사건이에요. 그런데 그 비는 우리의 ‘기생(寄生)하는 푸쉬케, 육’을 죽입니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 사건 때, 기생(寄生)하는 모든 게 죽었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기생(寄生)’이라는 그 단어가 ‘푸쉬케’예요. ‘육신’이에요. 은혜의 비가 내리면 육신이 죽어요. 근데 그걸 예수님의 육신이 우리의 대표로, 먼저 죽어준 거예요. 그걸 노아의 홍수 사건이, 그냥 알기 쉬운 그림으로 그려주는 겁니다. 그때 거기에 빠져 죽은 기생(寄生)하는 것들은 ‘나’예요 ‘나!’ 그리고 그렇게 빠져 죽은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하느님 나라! 그 안에 들어가 살아나는 거예요. 영으로!. 물 위의 것으로. 동동 떠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만나, 말씀은 우리를 죽이는 거여야지, 우리를 시퍼렇게 살아서 펄펄 뛰게 만들어 주는 게 되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도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라고 하시고 그 말씀을 거기에 붙여 놓은 거예요. ‘내가 이렇게 떡을 주는 건 그들의 이 율법을 마음으로 간직하나, 아니면 법으로 받아서 열심히 뛰나, 이거 시험하려고 주는 거야!’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지금.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내일의 양식 차원이 다른 양식으로, 받아야 하는 것을, 안식일 전날 거두는 6일 째의 양식으로 또 한 번 보여 주는 거죠. 안식일 이라는 건, 하느님께서 홀로 완성하신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상징하는 거죠? 그런데 그 나라에서의 그 양식을, 여섯째 날의 그 자칼과 네케바라는 게, 네케바가 여자고, 자칼이 남자니까, 근데 그 자칼이, 남자가 씨로 오는 거잖아요? 3번째 날과 6번째 날이 짝이니까. 이제 이건 설명 안 해 드려도 다 아시겠죠? 그러니까 그 이들이, 내일의 양식을 거둔 자 들이란 뜻이에요. 그래서 6일째에, 그 내일의 양식을 주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은 ‘아! 우리에게는 반드시 그 내일이 있다!’라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하고, 우리의 인생이. 그러니까 내일의 양식이 오늘 온 거 아녜요? 내일이 없는데, 그 때의 양식이 왜 오냐고요? 나한테. 뿐만 아니라, 그 양식이 오늘 나에게 주어 졌다는 건, 이 크로노스의 역사 속에서, 그 내일을 조금씩이라도 맛볼 수 있다는 뜻이에요. 감정적으로 뭐 좋고, 행복하고, 편안하고, 이렇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는 이 땅에서 분명히 그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현실천국(現實天國), 잠깐 잠깐 오는 거지만, 그걸 우리가 진리 안에서 맛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하늘의 양식, 그 내일의 양식은 이 땅의 것 안에 담겨져서, 우리에게 주어지죠? 성전! 예수! 성경! 호 코스모스의 세상! 사람! 원리! 법칙! 이런 것에 담겨서 나타난 것! 인식되는 것! 안에 담겨서 우리에게 주어진단 말이에요. 왜냐하면 하늘의 것은 직접 땅에게 설명되어 질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라 그랬습니다. 직접 그게 그 하늘의 것이 이 땅에 들어와서, 우리에게 직접 쏴진다면, 그 하늘은 ‘거룩’한 것이 아니죠? 아니, 땅도 담을 수 있는 게, 그게 무슨 ‘거룩’이에요?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 깨끗한 ‘거룩’은 이 땅의 것 안에 담겨져서 우리에게 주어진단 말입니다. 그것으로 하늘의 계시를, 하늘은 우리 수준만큼만 계시한다고 그랬어요, 그 계시를 깨달아 알게 되면, 그것이 바로 하늘의 양식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출애굽 16:6-7) 6 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였다. '저녁에는 너희가 에집트 땅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신 분이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7 그리고 아침이 되면 야훼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 야훼께서는 너희가 당신께 불평하는 소리를 들으셨다. 우리가 무엇이라고 너희는 우리에게 불평하느냐?'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가 여기 똑같이 나오죠? ‘에레브, 모케르’ 똑같은 단어입니다. 근데 저녁에는 뭘 안다고 그래요? 제가 창세기 1장을 설명해 드릴 때, 저녁을 뭐라고 그랬죠? ‘에레브’라는 단어가 ‘덮음, 어두움, 감추어진, 비밀.’ 이런 뜻이라고 그랬죠? 저녁, ‘에레브’ 아래의 것이죠? 이 아래의 것으로 우리가 그 위의 것을 알면 ,그거를 ‘모케르,’ ‘아침, 활짝 열림, 현명해짐,’ 이런 뜻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저녁, 에레브’ 때는 ‘야훼께서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안다 그러죠? 무슨 말입니까? ‘아! 우리가 애굽에서 나갈 수 있는 건 우리의 힘과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구나!’라고 저녁 때 안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그 저녁을 잘 견뎌내면, 인내로, ‘휘포모네,’ 이겨내면 아침이 오는 거예요. 그 아침에는 ‘야훼의 영광을 ‘호라오,’ 본다!’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는 건, 우리에게 오는, 반드시 닥치는 필연적(必然的) 과정이라니까요. 그러면 ‘하나’라고 그래. 이게 첫째 날이잖아요? 그때는 뭐 1, 2, 3, 4, 숫자의 개념이 없었을 때니까 ‘첫째 날’은 아니겠죠? 그걸 ‘하나’ ‘통일’ ‘연합’이라 이야기 하는 거란 말입니다. 자, 그렇게 저녁 때, 우리가 ‘아! 우리는 야훼의 은혜(恩惠)로 그분의 능력(能力)으로 애굽에서 나온 거지!’라는 걸 알게 되는데, 그 저녁의 양식(糧食)으로 그걸 안다면, 저녁의 양식으로 우리에게 준 게 율법(律法)이니까, ‘우리는 율법으로 우리가 죄인(罪人)이라는 걸 알면 돼!’라고 이야기 한 거예요. 그런데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이 저녁에 먹을 양식은 고기, ‘바싸르’인데, ‘고기’라 그러고요, 아침에 먹을 양식은, ‘빵’이라고 그래요.
(출애굽기 16:8, 12-13) 8 모세는 말을 계속하였다. '야훼께서 저녁에는 먹을 고기를 주시고 아침에는 배불리 먹을 빵을 주신다. 야훼께서 당신께 불평하는 너희의 소리를 들으셨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냐? 너희가 하는 불평은 우리에게가 아니라, 야훼께 하는 것이다.' 12 '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너는 그들에게, '해거름이 고기를 먹고 아침에 떡을 실컷 먹고 나서야 너희는 나 야훼가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 고 일러 주어라.' 13 저녁 때가 되자 난데없는 메추라기가 날아 와 그들이 진을 친 곳을 뒤덮었다. 아침에는 진 둘레에 안개가 자욱하였다. 안개(이슬)는 말씀이죠, 저녁의 양식은 고기! 아침의 양식은 떡! 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성경은 고기든, 떡이든, 그걸 전부 양식, 떡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떡을, 양식을 고기로 먹는 자와 그 양식을 떡으로 먹는 자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고기를 먹는 자는 저녁의 사람, 떡으로 먹는 자가 아침의 사람이라고 해요. 그런데 그 저녁의 고기를, 아침의 그 떡으로 먹게 되면, 야훼의 영광(榮光)을 보게 되는데, 저녁의 고기를 끝까지 고집(固執)하는 그 사람은, 그 고기를 먹고, 저녁에, ‘에레브’의 양식이니까, 저녁의 사람으로 죽는 거예요. 유다가 저녁으로 나갔다, 밤에 나갔다. 밤의 양식을 먹고. 그래서 그 유다가 받은 건 부스러기예요. 율법을 상징(象徵)하는 부스러기. 다른 제자들은 덩어리로 줬는데, 꼭 유다에게 준 것만 부스러기라는 단어를 쓴단 말이에요. 율법이라는 거죠. 그래서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고기를 먹는 자들은, 전부 죽어요. 하느님이 얼마만큼 주느냐하면, 두 규빗. 90cm입니다. 90cm씩 쌓아서 하룻길. 메추라기가. 그렇게 줘 놓고, 그걸 씹기도 전에 다 죽여 버려요. 그건 고기를 주긴 주는데, 먹고 죽으라고 준단 말입니다 저녁의 양식은. (민수기 11:4, 18, 31-34) 4 그들 가운데 섞여 살던 외국인들이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을 하자, 이스라엘 백성도 다시 우는 소리를 했다. '아, 고기 좀 먹어 봤으면. 18 또 백성에게는 이제 곧 고기를 먹게 될 터이니, 내일 까지 몸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단정이 가지라고 일러 주어라. '아, 고기 좀 먹었으면, 에집트에 있을 때는 좋았는데' 하며 울부짖는 너희 소리를 야훼가 듣고 이제 먹을 고기를 주리라. 31 야훼께서 바람을 일으키시어 바다 쪽으로 메추라기를 몰아다가 진지 이쪽과 저쪽으로 하루 길 될 만한 사이에 떨어뜨리시어 땅 위에 두 자(90cm)가량 쌓이게 되었다. 32 백성들은 몰려 나와 그 날 밤과 낮 동안, 또 다음날 종일 메추라기를 모아서 진지 주위에 널어 놓았다. 아무리 적게 모은 사람도 열 섬은 모았다. 33 백성들이 고기를 한창 뜯고 있는데 야훼의 진노가 그들에게 내렸다. 야훼께서 극심한 재앙으로 백성을 치신 것이다. 34 욕심 사나운 백성을 거기에 묻었으므로 그 곳 이름을 키브롯하따아와라고 부르게 되었다. ‘키브롯하따아와’ 이게 ‘키브로트 핫타아바’거든요? ‘키브로트’가 ‘케베르, 무덤, 매장지(埋葬地)’라는 뜻이고, ‘핫타아바’가 ‘탐욕(貪慾), 욕망(慾望)’이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의 욕망의 무덤’이란 말이에요. 고기를 먹고 육신(肉身)이 죽는 거예요. ‘인간의 욕망의 무덤.’ 그러니까 저녁의 양식인 고기는 탐욕의 떡이요, 죽음의 떡인 거예요. 그거는 내일의 양식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그리워했던 그 고기 가마의 그 고기가 무슨 고기라고 그랬어요? 과월절 양고기요. 그걸 공통적으로 다 먹고 나왔다니깐요?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이 합심(合心)하여 그 고기를 그리워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하느님이 그 고기의 대용으로 어떤 고기를 주어서, ‘너희들 이거 먹으면 이게 저녁의 양식이고, 이건 죽는 거야. 광야에서 이거 먹으면 죽는 거야!’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거는 애굽에서 ‘먹고 나와야’ 되는 고기지, 광야에서도 그 고기 먹으면 안 돼요. 광야에선 무교병, 떡 먹는다니까요. 그리고 과월절 양 잡는 그 시간이, 무교절로 이렇게 물리는 거예요. 과월절에 고기 먹었으면, 이제 무교절 칠일 동안에 무교병 먹는 거예요. 떡 먹는 거예요. 떡! 만나 먹는 거예요. 비로 내리는 만나! 그냥 ‘이게 뭐야?’라는 율법의 만나가 아니라, 비로 내리는 은혜의 그 만나를 먹어야 되는 건데, 고기를 계속 추억하면, 어떻게 된다는 거예요? 또다시 과월절로 돌아가서, 그 고기의, 그 어린양의 그 살과 피만 의지 하는 거예요. 희생제사적 섬김! 거기에 머물러 버리는 거예요. 교회에서! 광야에서! 그러니까 맨 그냥, ‘이천 년 전에 예수님이 날 위해 죽으셨대.’ ‘그분이 살과 피를 내게 먹이셨대.’ 그리고 맨날 성찬식(聖餐式)만 해. 근데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있어요? 그건 전설(傳說)이라니깐요? 생명(生命)을 주시는 진짜 치유(治癒)를 하시는 그분이 오셨는데, ‘전설에, 천사가 내려와서 저 물을 한번 동할 때, 제일 먼저 내려가는 사람이 낫는대요!’ 이러고 앉아 있는 거예요. ‘이천년 전에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대요. 그래서 나는 그거 믿고 지금 교회 나와서 앉아 있답니다.’ 그게 전설이지 뭐예요? 그러니까 그 고기를 추억(追憶)하면 안 돼요. 그 양을 추억하면 안 된다니까요. 떡! 그걸! 그게 뭔지를 말씀으로 내가 받아, 그 과월절 어린양의 그 현실이 내 현실이 돼야 되는 거예요. 여기에서. 그래야 그 사람이 아들인 거라니까요. 근데 그 고기를 자꾸 달라고 그러면, 그럼 ‘너는 뭐냐?’는 거예요 너는! ‘그래 그 고기 줄게’ 그러면 그 양은 안 죽은 양이에요. 계속 죽어야 되니까. 그러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예수가 안 죽었다니까요. 그 희생제사는 계속 드려져야 된다니까요. 그러면 죽지도 않은 예수를 믿고, 어떻게 구원을 받냐구요? 그러한 매일 매일의 그 희생제사적 섬김으로 신앙생활 하고 있는 게, 율법주의의 이스라엘 이었잖아요? 그들을 엘리야가 자기 몸을 사용하여, 그림으로 한번 보여줘요. (열왕기상 17:1-7) 1 길르앗의 티스베에 살고 있던 티스베 사람 엘리야가 아합왕에게 말하였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내가 다시 입을 열기 전에는 앞으로 몇 해 동안 비는 물론 이슬도 한 방울 이 땅에 내리지 않을 것이오.' 2 야훼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내렸다. 3 '이 곳을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르단강 동편에 있는 그릿 개울에서 숨어 지내며 4 개울물을 마셔라. 음식은 까마귀들을 시켜 날라다 주도록 하리라.' 5 엘리야는 야훼의 말씀을 따라 요르단강 동편에 있는 그릿 개울로 가서 살았다. 6 까마귀들이 아침 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날라다 주었다. 그는 계곡의 물을 마셨다. 7 그렇게 얼마를 지내는데 개울의 물마저 말라 버렸다. 온 땅에 비가 전혀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게 ‘판임 야르덴’이거든요? ‘야르덴’이 요르단인데, 이게 ‘야라드’에서 나온 단어죠? ‘풍성하게 흘러내리다.’ 그래서 율법에 보면, 흐르는 물에 씻어야 정결해져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요르단, 그 흐르는 물에 들어가, 그걸 건너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나아만도 흐르는 물, 요르단에 들어가, 그 ‘흐르다’ 그 말이 헬라어로 바꾸면 ‘레마’예요 ‘레오, 흐르다’라는 뜻이에요 그게. 그런데 어디예요? ‘요르단 앞’이라고 되어있는데, 이게 ‘판임’ 그 흐르는 물! 진리에 나타난 것! 이 세상의 것으로 준, 그 흐르는 것! 율법이죠?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너 세 번째 제물로 갖고 와, 그거 취해!’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그 제물을 반으로 똑 쪼개는 걸 ‘바탈, 바타르’라고 해요.(창세15,10) 그러면 하느님이 제물을 사이에 두고 건너가 버려요. ‘아바르.’ 그러고선, 아브라함과 하느님 사이를 쭉 쪼개버리시는데, 그게 ‘카라트’예요. 그게 ‘그릿 시내’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지금 상태가 뭐냐면, 열심히 제사지내고 열심히 율법 지키고 있는데, 하느님은 정작, 그들의 경계 너머로 건너가 계신 거예요. 그래서 그릿 시내예요. 왜? 그들은 ‘야라드’ 흐르는 물, 그 진리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았어야 되는데, ‘판임 야라드’ 율법으로 그 진리를 이해하고 열심히 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엘리야가 그들의 대표로, 너희들이 지금 그렇게 열심히 행하고 있는 그게, ‘지금 물이, 비가 내리지 않는, 기근의 상태’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앨리야가 가서 요르단 앞 ‘카라트’에 가서 머물면서, 뭘 받아먹느냐 하면, ‘까마귀,’ 이 까마귀가 저녁 ‘에레브’라는 단어하고 똑같은 단어예요. 모음만 달라요. 저녁, 밤이 주는, 아니 예수님도 그랬잖아요? ‘공중에 나는 까마귀를 봐라!’ 그랬죠? 공중에 나는 새라고 그랬다가, 그거 까마귀라고 그랬잖아요? 근데 성경에서 공중에 나는 새는 항상 성전이잖아요? 그 성전은 저녁의 양식, 율법밖에 못 준다니깐요? 그러니까 그 까마귀가 고기 떡을 갖고 와요. 그 고기를 저녁에 먹고, 아침에 떡으로 먹어야 되는데, 아침에도 고기 떡, 저녁에도 고기 떡. 고기양식!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게 망(亡)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릿시내 까지 완전히 말라버리고, 엘리야가 경계를 넘어 이방으로 가는 거예요. 그랬더니 거기에 풍년이 이는 어떤 곳이 있죠? 기름도 떨어지지 않고 밀가루도 떨어지지 않는, 기적이 일어나는 어떤 곳이 있어요. 유대 밖으로 건너갔더니. 그러니까 유대주의를 박살내고 있는 거예요 지금요 엘리야가. 그 까마귀 ‘오레브’라는 그 단어가 ‘에레브’라는 단어하고 같은 문자로 되어 있는데, 사실은요 그 광야에 ‘오렙’ 족속이라는 족속이 있었어요. 족속이름을 어떻게 까마귀라고 지었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어둡다, 덮여있다’ 이런 말이거든요? 그들이 엘리야에게 음식을 줬을 거예요. 까마귀가 물고 온 거 아녜요.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 하고 싶은 건, 그 오렙 족속이 엘리야를 먹인 그 이야기를 통하여, 단어들을 이렇게 주시면서, ‘이게 무슨 이야기 인지 알아?’라고 메시지를 담아 주는 거라니까요. 아니, 요만한 까마귀가 뭘 얼마나 큰 걸 물고 왔겠어요? 그걸로 한 수천 번 와야, 아침상 하나 되겠네. 그런 거예요. 고기를 먹고 애굽에서 나왔으면, 이제 광야에서, 하늘의 떡인, 그 누룩 없는 떡! 무교병을 먹어야 된다는 거예요. 과월절 어린양의 살과 피로 애굽에서 나온 이들은, 더 이상, 그 과월절 어린양을 추억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진리의 말씀을 양식으로 먹고, 그것으로 자기의 살과 피를 삼아야 되는 거예요. 그게 어린양과의 연합(聯合)이라는 겁니다. 나오긴 나왔는데, 여전히 그 어린양의 살, 고기죠? 그게, 살, 고기 똑같은 단어예요. ‘바싸르.’ 그 ‘살’만을 추억(追憶)하고, 그 공로(功勞)만 치하(致賀)하고 있으면, 그게 광야에서 죽음의 고기, 탐욕(貪慾)의 고기를 그리워하는 형국인거예요. 그러니까 공로는 거기서 다했으니까, 우리는 이제 막살아도 되겠네? 이런 소리 하는 거예요. 그 고기만 그리워해! 그 살만 그리워해! 그리고는 그게 선이지! 그게 복음이지! 이렇게 우기는 거예요. 그래서 나오는 거예요 민수기 11잘 18절에. ‘애굽에서 그것이 선이지~! 토브지~!’ 그걸 좋았다, 재미있다 이렇게 번역을 해놨는데. ‘그게 선이지!’ 이렇게 우긴다니까요. 아뇨, 나왔으면, 여기서 진리로 내가 ‘되어짐’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돼요. 그걸 연합(聯合)이라고 한다니까요. 근데 나왔다고 우기는데, 그 상태에서…, 아니, 노자(老子)나, 석가(釋迦)나, 이런 사람들도, 그 율법으로 부터는 자유로웠다니까요? 그래서 그런 진리 비스무리한 것들을, ‘법에 묶이지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거야!’라는 경전을 쓴 거 아녜요 그 사람들이요. 그러면 그게 다라면, 율법에서 풀려나는 게 다라면, 아니 유교(儒敎)나, 노자(老子), 장자(莊子)의 그 도가사상(道家思想)이나, 불교(佛敎)나, 그리스도교(基督敎)나, 뭐가 달라요? 전부 거기서 풀려나는 거라면서요? 그리스도교는 그 진리로 ‘되어짐’이 있다니까요? 그래서 신약(新約)이 붙어있는 거예요. 성경에만. 다른 경전은 전부 구약(舊約)에서 끝난다니까요? 그러니까 뭐 그냥 ‘건너가라, 건너가라 거기에 진리가 있다.’ 그러고 끝이에요. 모세에서 끝이에요, 다. 그 진리가 뭔지를 설명해 주는 데가 없어요. 신약이 붙어 있는 건, 성경밖에 없어요. 우리는 이제 살아 있는 제물(祭物), 거룩한 산제물로 바쳐져야 되는 거지, 그 죽은 제물들을 자꾸 추억하면 안 돼요. 하느님이 그래서 성경을 통하여, ‘너희는 이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려져야지!’라고 얘기를 하신 거예요. 바오로를 통해. ‘야 이제 죽은 제물로 너희 들이 살았으면 이제 산 너희들을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로 받을게!’ 근데 자꾸 그 제물만 얘기해. 살아있는 나를 갖다가 바쳐야 되는데. 열심히 뭐, 희생, 봉사, 충성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 내가 그렇게 살았습니다.’라고 내가 그분에게 바쳐져야 된다니까요. 자꾸 그냥 그 고기만, 그 과월절 어린양만, 추억하고 있는 거죠. 그건 전설(傳說)이라니까요. 그건요. 그래서 주님이 당신의 살과 피 이야기를 하시면서, ‘그것이 바로 떡인 거야!’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그 고기잖아요? 살과 피는 고기! 그 고기는 떡이지! 라고 이야기 했어요. 그리고는 거기서 한발 더 가십니다. (요한복음 6:55-63)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58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 간 그런 빵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59 이것은 예수께서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하신 말씀이다. 60 제자들 가운데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며 수군거렸다. 61 예수께서 제자들이 당신이 말씀을 못마땅해하는 것을 알아 채시고 '내 말이 귀에 거슬리느냐? 62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 \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 그러면 과월절 그 양고기! 그 살과 피도 영적으로 이해를 해야 되겠네요? ‘육은 무익하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지. 내 말을 진리로 받아들여! 그럼, 그게 내 살과 피야. 누가 나 뜯어 먹으래? 누가 날 떡으로 먹을래?’ 나를 믿으면 된다는 거예요. 내가 무슨 내용을 담고 왔는지, 그걸 진리로 이해하면 된다는 거예요. ‘말이 영이야! 말씀이 영이야!’ 그러는 거죠. 그럼 그 말씀이 떡이라는 거죠? 그 말씀이 고기라는 거죠? 그럼 지금 그 말씀을 여러분이 듣고 있고, 그걸 마음으로 가져 이해하고 있잖아요? 그리고는 ‘평생에 듣던 말씀 또 들려주세요, 또 들려주세요.’가 뭐예요? ‘일용할 양식을 주세요!’ 기도하는 거예요 그게. 그래서 주님은 돌로 떡을 만들어 먹고, 주린 배를 채우라는 마귀의 시험을 받아서, 이렇게 말씀 하셨던 거예요 (마태복음 4:1-4) 1 그 뒤에 예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2 사십 주야를 단식하시고 나서 몹시 시장하셨을 때에 3 유혹하는 자가 와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께서는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고 하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무슨 말이에요? 이게. 분명히 신명기 8장에서, 하느님께서 광야에서 아들들, 장자들, 이스라엘을 주리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유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걸 가르쳐 주기 위해서 주리게 하셨다고 했잖아요. 그럼 예수님도 당연히 그 광야에서 주리셨어요. 그럼 하느님이 주리게 하신 거죠? 그리고는 예수님 혼자 정답을 내어 놓으시는 거죠. ‘사람은 떡으로 사는 거 아냐. 그 떡을, 과월절 고기를, 그 만나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해해서 네 마음의 양식으로 갖는 거지.’ 거기까지 가라는 거예요. 근데 과월절 고기, 광야의 만나, 거기서 머물러 ‘야! 하느님이 나를 살리기 위해서 이런 걸 주셨대!’ 거기서 그냥 칭송(稱訟)하고 끝나버리면? 그건 내 것 아니라니까요? 그래서 주님이 굶으신 다음에, 광야에서. ‘나를 배부르게 하는 건 그 돌도 아니고,’ (돌은 우리에게 처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내려올 때, 돌비에 쓰여져서 내려왔잖아요? 그 말씀은 예수고. 그러니까 예수가 돌이죠 돌이 떡이 되어야 하는데, 그 떡은 말씀으로 끝나야 되는 거예요. 완성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 예수는! 그래서 예수님은 아시는 거예요.) ‘우릴 살리는 건 그 말씀이지! 그 진리지! 그 하느님이지! 그 사랑이지!’ 정확히 대답하시는 거죠. 그러니까 고기! 살은 떡으로, 떡은 진리의 말씀으로, 또 그 고기의 피는 물로, 물은 성령으로. 이렇게 완성(完城)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중간에 멈춰버리면 안된다니까요. 아니, 요한1서에 나오잖아요? ‘물과 피와 성령은? 셋인데, 그건 하나다.’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성령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물과 피는, 오히려 우리를 죽이는 것이 될 수도 있다니까요.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으로 나타난 형상으로 오신 예수와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들을 통해서, 그리고 그 사건들을 기록한, 성경과 성전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라는 진리를 가지면 되는 거예요. 그분의 주권! 그분의 능력! 그거 인정하면 되는 거예요. 나는 noting!. 그리고 그것을 마음으로 전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아래의 것. 아래의 소리. 아래의 글. 아래의 몸짓으로 위의 것을 전하게 되죠? 어떻게 전할 거예요? 아래 것으로 전해야 돼요. 그런데 그걸 그 위의 것으로 받아들여요. 성령이 그 일을 하시는 거예요. (마태복음 14:15-20) 15 저녁 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군중들을 헤쳐 제각기 음식을 사먹도록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셨다. 17 제자들이 '우리에게 지금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하고 말하자 18 예수께서는 '그것을 이리 가져 오너라' 하시고는 19 군중을 풀 위에 앉게 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제자들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20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주워 모으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율로게오’라는 말이 뭐냐면? ‘유,’ ‘좋은, 선한’ 이런 말이에요. 그리고 ‘로게오’가? ‘로고스’예요. ‘하느님이 ‘감사의 기도’를 하셨다’는 건 그 율법을, 오병이어를, 그 부정한 것을 하느님이 선한 로고스, 말씀으로 덮어 버리자, 이걸 ‘‘감사의 기도’라고 번역했어요. ‘율로게오!’ 그게 그들의 양식이 되더라는 거예요. 그랬더니 그들이 광야에서 배불리 먹네요.
성경에 나오는 숫자들이요 그냥 괜히 막 쓴 게 아녜요.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의 계약이 7로 주어지죠? 이건 약속(約束)의 수(數)입니다. 7입니다. 이게 뭐냐면, 하늘의 3이 땅의 4, 땅의 숫자가 4니까. 여기에서 이루어지면, 이 둘을 합해서 완성(完城), 안식(安息), 7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계약의 수라고 그래요. 그러나 이 계약 7은 우리가 잘 모르니까, 하느님이 이 땅의 어떤 걸로 가르쳐 줘야 되죠? 그러면 그건 계명으로 출애굽기에서 십(10)계명으로 주죠? 십계명. 근데 이거를, 이 계명을 계약으로 잘 이해하면, 하느님의 말씀으로 잘 이해하게 되면, 그들을 ‘아들’이라고 그래요. 그러면 이 아들이 된 이 사람들은 이 10을 가지고 7이 된 자들이네요, 70. 이들을 하나(1)라 그래요. ‘모노게네스, 독생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물이 없었을 때, 하느님이 마라의 쓴물을 ‘십자가, 나무’를 던져서 단물로 만들어 주고(출애15,25) 엘림으로 가는데, 거기에 열두(12) 개의 우물과 칠십(70) 그루의 야자(종려)나무가 있죠? 이게 기둥, 계약이라는 뜻이에요. 둘 다. 말씀! 거기에 괜히 나무가 70그루, 그걸 누가 세어서 거기다가 적어놓고 그런 거 아니란 말입니다. 이런 숫자가 나오는 거죠.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말씀을 전하러 보내시는데 70으로 보내죠? 70명이라고 안 되어 있어요. 70으로 보냈다라고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의 12지파가 계명을 받아서, 나중에 이것을, 이들을 가르치는 자로 70원로가 서죠? 이게 다 그냥 그런 숫자란 말이에요. 하느님의 진리가 되면, 이 70은 이 하나(1)로 간다니까요? 그래서 12사도 다음에 7집사가 오는 거예요. 집사라는, ‘디콘’이라는 단어 자체가, 섬김 이라는 말이거든요. 섬김은? 성경에 나오는 섬김은, 말씀으로 섬기는 것 밖에 없어요. 구제! 그런 것들도 다 말씀으로 구제하는 거지, 무슨 뭐 돈으로 사람들 양식 사가지고 구제하고 이런 거는, 성경에 나오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열둘(12)이 된 그들은 반드시 칠(7)로, 말씀으로 섬기는 자가 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원로가 되면, 반드시 집사의 역할을 해야 되는 거예요. 교회에서 사제, 원로사제, 무슨 총회장, 부회장, 0분과장,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건 그건 그냥 정치(政治)라고 보면 돼요. 그런 거에 묶이지 마세요. 자, 그렇게 우리는 광야에서 말씀을 먹고 배불러야 하는 하느님의 백성들이에요. 우리는 그거 구하는 거예요. 그게 율법을 갖고, 위의 것을 깨달아 아는 거죠. 그래서 성경이 그걸 십(10)을 갖고 위의 것 하나(1)을 깨달아 알면 그걸 ‘십의 하나’라고 그래요. 그걸 성경이 ‘십일조’라고 번역을 한 거죠. ‘십(10)으로, 계명으로 하나(1)가 되어라!’ 이런 말이에요. ‘그러면 그건 내가 받아!’ 이런 말이에요. 우리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느님이 받는다는 게 아니라. 알아서 잘 쓰세요. 헌금을 하든지, 뭘 하든지. 그리고 십분의 구는 내꺼 이거 아니라, ‘십으로 네가 하나가 되면, 너를 내가 받을게.’ 이런 말이에요. 그게 ‘모노게네스’ 하나를 가진 자! 마음으로 가진 자! 진리를 가진 자! 그러면 그가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거죠. 오병이어의 기적(奇蹟)에서도, 다섯, 둘, 그리고 그것으로 배부른 하나를 가진 어떤 자, 이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이야기가 오병이어의 이야기와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이 ‘너희들 내가 만나를, 이 양식을, 하늘의 떡을, 비같이 내려 줄 테니까, 한 오멜씩 받아 거두어가!’ 이렇게 이야기 한 거예요. 한 ‘오멜’이라는 게 ‘십일조’라는 말이에요. ‘너희들 내가 양식을, 하늘의 양식으로 말씀을 던질 테니까, 그걸로 하나가 돼.’ 이런 말이에요. 그래서 만나는 한 오멜만 가져가야 되는 거예요. 그게 에바 십분의 일이라고 그러죠? 그게 십으로 하나가 되는 거예요. 양식을 그렇게 안 받으면 안 된다니까요. (출애굽기 16:15-16, 36) 15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서로 '이게 무엇이냐?' 하고 물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야훼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시는 양식이다. 16 야훼의 명령이니 저마다 먹을 만큼씩 거두어 들여라. 한 사람에 한 오멜씩 식구 수대로 거두어 들이면 된다.' 36 한 오멜은 십분의 일 에바이다. ‘십으로 줄 테니, 하나로 받아라.’ 이 말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떡은 모세가 주는 떡! 율법(律法)이란 말이에요. 모세의 떡은! ‘그거 아니지!’라고 이야기 한 거예요. (요한복음 6:26-35) 26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 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27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이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주려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에게 그 권능을 주셨기 때문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30 그들은 다시 '무슨 기적을 보여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시겠습니까? 31 '그는 하늘에서 빵을 내려다가 그들을 먹이셨다' 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32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진정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이시다. 33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이며 세상에 생명을 준다.' 34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이 '선생님, 그 빵을 항상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35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게 빵이야! 이렇게 말씀하세요. 이렇게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은 ‘진리의 양식’이에요. 그건 우리에게 주어졌고, 그것을 받은 이들이, 그 하늘들 안에 그 아버지를 가진 자들이고, 그들의 이름은 이미 거룩해진 것이고, 그들의 ‘푸토코스’의 존재가 되어서, 그 하늘의 양식을 갈망하는 삶을 살게 되는 거죠. 주린 자로 살게 되는 거죠. 그러면 그들은 배고픔 속에서, 풍요에 거하게 되는 거예요. 여기에서 모든 사람들이 배고픈 상태죠? 그런데 그걸 아는 이들이, ‘그게 부요한 거야. 그게 배부른 거야.’ 그걸 바오로가 이렇게 이야기 한 거예요. (필립비 4:11-12) 11 내 처지가 어려워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12 비천하게 살 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이 땅의 그 굶주림 배고픔 안에서, 어떤 게 풍요라는 걸 내가 알았단 뜻이에요. ‘나는 먹을 거 없어도 괜찮고 부자로도 잘 살 수 있어, 겸손하게.’ 이런 말이 아니라니까요. 성경은 그런 배고픔 그런 부요함에 대해서 한 줄도 기록하고 있지 않아요. 이 땅에서의 그 말씀이 없는 그 상태의 굶주림! 그것도 내가 알았고, 그걸 아니까, 어떤 게 풍요인지 내가 알게 되었어. 그게 풍요에도 처하고 비천에도 처한다는 게 그런 말이죠. 그렇게 되니까, 자기가 바리새인으로, 율법주의의 대표적 선두주자로, 열심히 쌓아 왔던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이게 배부르게 하는 거 아니구나! 이게 인간의 가치를 결정 짓는 게 아니구나!’하고 안거예요. 그래서 ‘나는 배고픈 자가 맞구나, 굶주린 자가 맞구나. 그래서 나는 하느님의 말씀으로만 배불러야 되는 거구나.’ 그래서 ‘굶주림 속에서 풍요를 안자가 되었다.’라고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은 배고파야 되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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